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운길산에 소재한 수종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인 1459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수종사 경내에는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보물 제1808호로 올해 94일에 지정이 되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 원래의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이 오층석탑은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으로 옮겨져 있다.

 

운길산을 오르다

 

수종사 오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종사로 향했다. 915일에 찾아갔으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아직 정리조차 못한 자료를 모처럼 뒤져냈다. 운길산을 오르던 이 날은 한 낮의 온도가 꽤 무더웠다. 그래도 문화재를 보기 위해 얼음물 한 병을 들고 걸어 올랐지만, 워낙 가파른 비탈이라 땀이 비 오듯 한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맥이 풀릴 때는, 어렵게 찾아 간 문화재 앞에 공사 중이란 글씨와 함께 문화재를 가려 놓았을 때이다. 수종사 오층석탑도 주변에 천막을 친 것을 보니, 주변 정리를 하는 듯 한데 다행히 탑은 온전히 볼 수가 있었다. 조선초기의 석탑이라고 하니 500여 년은 족히 넘었을 석탑이 온전히 남아있다.

 

 

불상 등에서 1493년에 조성한 탑임이 밝혀져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같이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 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인 1493년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와 인목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과 보살상들, 숭정원년인 1628년에 조각승인 화원 성인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문양의 조선 초기 석탑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탑이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인해 화려해 보인다.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을 올렸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을 표현하였으며,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연판에는 고려중기 때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목조 탑을 석재로 옮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이 목조 건축의 형태이다. 머리부분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려져 있다. 이 탑은 복장된 내용물에서 확인이 되듯, 왕실 발원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많은 조선시대의 석탑 중에서 특별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불상대좌와 같이 조성하였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다. 또한 상륜부는 팔작 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9월 중순의 한 낮에 오른 운길산. 많은 사람들이 찻집에 들려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지만, 갈 길 바쁜 일정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경내를 바삐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촬영을 한 후에 다시 하산을 서두른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물줄기가 시원한 소리를 낸다. 이 무더운 날에 그 물소리도 행복이려니.

백년지 뒤로 구층석탑이 보인다

 

아무리 장마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퍼부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충남 청양군의 문화재를 답사하겠다고 나선 까닭은 바로 대치면에 있는 장곡사 때문이다. 절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은 유일하게 대웅전이 두 곳이 있는 절이기 때문이다. 장곡사를 나와 칠갑산을 옛 길을 넘어 찾아간 정산면 서정리에 있는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멀리서도 도로 옆 벌판 한 가운데 서 있는 구층석탑이 보인다. 사실 청양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는 딴 곳의 두 배가 더 힘들었다. 우선은 도로에 안내를 유도하는 안내판이 서 있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쏟아 붓는 듯한 장맛비로 인해서 찾아가는 길도 낯설고, 사진을 촬영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을 때 연꽃을 찍느라... 

 

주변에는 400년이 지난 백련지가 조성되어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16-2에 소재한 보물 제18호인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靑陽 西亭里 九層石塔)’은, 공주에서 청양 방향으로 23㎞ 정도 떨어진 벌판 가운데에 서 있다. 이 탑이 있는 부근에 고려시대에 ‘백곡사(白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주위에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이 구층석탑 주변에는 백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백련지는 조선 선조 20년인 1587년에 송담 송남수가 정산 현감으로 재임을 할 때, 정산현 좌측에 연못을 만들고 만향정이라는 정자를 세우면서 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 내용으로 보면 이 백련지는 400년이 훨씬 지난 백련지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구층석탑

 

정산면 서정리 구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 면에 2개씩의 안상을 돌려 새겼는데, 바닥선이 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양식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위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에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인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기단의 위로는 알맞은 두께의 돌을 덮개석으로 안정된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 구층석탑은 탑신의 1층이 지나치게 크다. 하지만 2층부터는 높이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넓이는 그리 좁아지지 않아 우아한 느낌이다. 덮개석인 지붕돌은 층급받침은 1층은 5단, 나머지 층은 3단씩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네 귀퉁이가 약간씩 추켜 올라가 있다.

 

서정리 구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9층이나 되는 층수로 인해 형태가 매우 높아져 안정감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이 구층석탑은 각 부분의 세부적 조각양식이나 기단의 안상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기단부에는 한 면에 두개씩의 안상을 새겼다 

 

천년세월 그 자리에 서 있어 고맙다

 

몸돌인 탑신부는 몸돌과 덮개돌인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는 이 탑은,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동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우아하게 체감되어 있다. 몸돌의 덮개석 역시 탑신에 따라 아름다운 체감비율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모두 없어진 생태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석탑의 형식이 신라시대부터의 전형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하의 비례가 아름답다. 서정리 구층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조형된 균형이 잘 잡혀간 거탑의 일종이다. 고려시대에는 석불이나 마애불, 탑 등을 이렇게 크게 조성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강한 국권의 상징은 아니었을까?

 

옥개석의 사방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나 있다

 

변 백련지에 핀 백련과 아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서정리 구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상륜부만 사라진 채 잘 보존이 되어있어 고맙기만 하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장맛비가 다시 ‘후두둑’하며 쏟아지기 시작한다.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한 가지라도 많은 문화재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 다음에 만나게 되는 문화재는 어떤 것일까? 기대를 하면서 빗길을 달린다.

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입구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과거 전국의 있는 절집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만날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부석사 입구에 선 당간지주

 

지금은 국보로 지정된 철당간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라지만 이 철당간의 위용으로 보아 당시 용두사가 어떠한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17에 소재한 부석사. 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는 부석사 입구에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양쪽의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으며,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다. 옆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세운 당간지주

 

천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부석사의 입구에 서서, 부석사를 드나드는 많은 인간들을 비켜보았을 당간지주. 높이 2.28m의 부석사 당간지주는 양 기둥의 꼭대기에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을 그리며 외부로 꺾어졌다. 이 호선은 1단의 굴곡을 두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이 밋밋하다.

 

이 굴곡부에서 당간지주 사이에는 아름다운 연꽃을 조각한, 원형의 간대석이 놓여 있다. 앞뒷면이 중앙에 종선문이 내려오고, 정상부에는 2단의 아름다운 원호가 경사진 형태로 조각이 되었다. 측면에도 3조의 종선문이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당간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그 오랜 시간을 풍화에 노출이 되어있었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부석사의 당간지주를 만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이 절집을 드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당간지주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얼마나 많은 서원들을 했을까? 그리고 그 서원들이 모여, 이 당간지주가 천년을 넘기면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다. 아마도 앞으로 또 천년, 부석사의 당간지주는 그렇게 손들을 맞을 것이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0에 소재한 보원시지. 보물 제12호인 서산 보원사지 석조 (瑞山 普願寺址 石槽)’는 서산 보원사 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기도 하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과 팔각형, 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 일석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조의 형식을 보인다.

 

 

크기가 거대한 보원사지 석조

 

보원시지 석조는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 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안쪽과 위쪽에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칠게 다듬은 자국이 그냥 남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조는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적 제316호인 보원사지는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보원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석조는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창건된 보원사의 석조이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 석조

 

석조란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용기를 말하는데, 그 용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금당 앞에 자리를 한 석조는 승려들이 예불을 들이기 위해 금당에 오를 때 손을 정갈하게 씻기 위한 것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도 목욕을 하거나 마실 물을 담아두기도 했다. 또는 음식을 조리하기 전에 씻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보원사지 석조는 장방형의 것으로, 길이 3.48m, 너비 1.75m, 높이 0.65m의 크기이다. 이 석조는 당시 보원사라는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좋은 유물이다. 석조의 벽 두 곳에 커다란 갈라짐 현상이 일어 깨어져 있는 보원사지 석조. 오랜 세월 속에서 자연스런 훼손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좀 더 일찍 우리 문화재에 대해 신경을 썼더라면 더 완벽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각종 보물들이 즐비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몇 기의 보물이 남아있다. 그 중 법인국사 보승탑비의 기록에 보면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고 했다. 그런 기록을 유추해 볼 때 보원사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지에는 보물 제102호인 석조를 비롯하여, 보물 제103호 당간지주,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보원사지 가까이에는 국보인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힌다. 석조 하나가 주는 고찰의 의미. 문화재란 그것으로 인해 그 문화재가 갖는 역사적인 면들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소중하다. 그런 문화재를 작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란 생각이다.

2004년도에 수원에서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화성을 돌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마도 화성을 안과 밖으로 돌아본 것이 20여 회는 되는가 보다. 그것도 복중에, 장마철에, 단풍이 들었을 때, 흰 눈이 쌓여있어 몹시도 미끄러울 때. 같은 시기에 돌아 본 적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심지어는 밤에도 화성을 돌아보았으니.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화성을 왜 그렇게 돌아보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화성. 그런데 몇 번인가 계속해서 화성을 돌아보았더니, 아주 조금씩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화성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화성이 정조대왕의 효심과 막강한 군주의 위용이 서린 곳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단지 화성이 그것뿐이었을까? 적어도 화성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거리들이 널려있다. 우선은 자연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과 정조대왕의 위민도 있다. 또한 숱한 석공들의 땀과 희열도 있다.

 

그 화성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저 운동 삼아 화성주변을 돌아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기 보다는, 그래도 그 화성과 말 한마디 쯤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지난해인가, 효원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주송이란 학생이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접하는 순간 충격이었다.

 

 

나는 2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느낀 것을,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하지만 주송이는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화성을 걸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주송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얻은 것일까?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화성에 대한 글을 연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화성을 걸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성을 돌면서 한 가지 깨우친 것이 있다면,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점이다. 문화재는 눈으로 보아서는 그 안에서 무엇도 발견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문화재를 바라볼 때,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달사지에서 또 한 번 좌절을 맛보다

 

화성 못지않게 많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지이다. 고달사지에는 국보인 승탑을 비롯해, 보물이 3점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비는 몸돌인 비는 무너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318일 여주에 동행한 지인들과 함께, 아침에 고달사지를 찾았다. 넓은 고달사지에는 여기저기 석조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혜목산 자락 쪽으로 탑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 한편도 보지 않았는데, 일행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내려오고 있다. 찬찬히 원종대사 탑비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수 뒤편으로 돌아가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띤다. 움푹 파인 것을 그동안 무심히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틀림없이 용의 발톱자국이 그 안에 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간 듯한 자국. 네 개의 발톱자국이 선명하다. 왜 이렇게 이수에 할퀴고 간 흔적을 만든 것일까?

 

그동안 10여 차례나 이 탑비를 보았으면서도, 한 번도 이 움푹 파인 곳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다시 탑을 꼼꼼히 따져본다. 이번에는 이수 앞쪽에 쓰인 명문아래에 도깨비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양편으로는 힘을 주어 금방이라도 비를 떨치고 일어날 것만 같은 발이 표현되어 있다.

 

 

그동안 무엇을 본 것일까? 날마다 찾아와 들여다보았으면서도 아직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다니. 순간 부끄럽다. ‘문화재를 마음으로 보라고 그렇게 떠들어댔지만, 정작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또 한 번의 죄스러움.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얼른 자리를 비켜 승탑이 있는 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 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문화재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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