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04호 진남관.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1번지에 소재한 여수 진남관은 조선조 선조 31년인 1598년에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이다. 진남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을 간직한 곳이다. 진남관은 지금까지도 숙종 44년인 1718년에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이 진남관은 객사로 역대 임금을 상징한 궐자를 새긴 위폐인 ‘궐패’를 모신 곳이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장소로,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원형의 기둥이 웅장한 전각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인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전문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해도 진남관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단청이 벗겨진 그대로 놓아둔 처마 등은 오히려 예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진남관을 한 바퀴 돌아보면 이곳이 바로 전라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그 웅장함이라니. 진남관은 원래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뒤인 선조 32년(1599)에 삼도통제사 이시언이 이 자리에 마련하였다. 숙종 42년(1716)에 소실된 것을 수사 이제면이 재건하였고, 그 후에는 여러 번 중수를 하였으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찬찬히 돌아보면 이 진남관의 건축술이 얼마나 정교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조각 하나에서부터 기둥과 마루의 짜 맞춤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저 돌아만 보아도 그 위용이 저절로 느껴진다. 우리는 가끔 같은 문화재인데 왜 국보며, 보물, 혹은 문화재자료 등으로 구분을 지을까를 의구심을 갖게 된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가치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남관을 돌아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국보에는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올 해가 지기 전에 여수 진남관을 찾아 국보의 참다움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낯 뜨거운 옛 자료

이상은 예전에 운영하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낯이 뜨겁다. 당시는 그저 인터넷이나 자료를 인용해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글은 처음으로 블로그를 운영할 때 썼던 글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열정을 갖고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썼던 때였다. 정말 날밤을 새우면서 글 하나를 쓰고는 했다.

물론 문화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보다 월등히 전문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생명이 없는 글이란 생각이다. 말없이 버티고 있는 문화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내 일이란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그 때는 왜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두고두고 낯부끄러운 일인데. 오늘 이 글을 다시 올리면서 생각을 한다. 생명이 없는 글은 쓰지 않겠다고.


장고춤(杖鼓舞)은 타악기의 하나인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다 둘러메고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며 추는 춤이다. 원래는 풍물놀이 등 개인놀이로서, 혼자 또는 두 사람(때에 따라 많을 수도 있음)이 추는 것인데, 요즈음에는 새로운 형태로 안무하여, 농악이 아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 독특하고 장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위키백과사전)

위의 장고춤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에서 ‘장고춤’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장고춤을 ‘풍물에서 파생한 춤’, 혹은 ‘신무용’ 등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고춤의 역사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무용화한 장고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과 고분 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에 대한 모습으로 장고춤에 대한 변화를 추론해 본다.

전북 완주군 송광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비천장고무. 조선조에 그려진 것이다.

불교미술에 나타난 장고춤의 변화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그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국보인 구례 화엄사에 소재한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장고비천인

이 굴산사지 승탑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소,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소재한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에도 장고를 치고 있는 비천인상이 있다.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위층 기단에 새겨진 이 비천인상을 보면 앞서 열거한 비천인상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장고를 치는 비천인이 앉은 형태였는데 비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장고를 치는 비천인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때는 단순히 연주가 아닌, 일종의 변형된형태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굴산사지 승탑의 장고비천상과 승안사지 석탑의 장고비천인상


고려 고분 벽화에서 장고춤의 형태가 보여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있는 사적 제239호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고분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에는, 동서로 석실 두 개가 구분되어 있다. 이 고분 안에 동실의 벽면에는 천녀들이 구름위에서 연주하며 춤을 추는 ‘주악무도천녀도’가 그려져 있다. 당시의 현실적인 종교적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천녀도 중에는 장고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이 둔마리 고분의 주악인물상의 악기 등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악기들이며, 주악도상은 고대주악비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후대에 후불 및 무속화의 인물표현 등과 악기의 소재 등이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벽 남단에 그려진 주악무도천녀도의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장고춤을 추고 있다.

이 장고춤을 추는 인물을 설명하고 있는 형태를 보면, 지금의 장고춤을 추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인물은 빗어 올린 얹은머리에 둥근 테 모양의 관을 쓰고, 그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상의는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록하게 묶었다. 바지는 전반적으로는 헐렁하지만 발목도 묶었다.」


둔마리 고분의 벽화에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주악도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종성된 고분이다.

아마도 격한 장고춤을 추기에 편하도
록 하였을 것이다. 「허리에는 띠가 감겨있는데 그 한쪽 끝이 왼쪽 다리위로 드리워져 있다. 상반신은 가느다란 끈으로 장고를 목에 감아 앞으로 늘어뜨리고, 왼팔은 높이 올리고 오른팔은 장고를 치면서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형태를 하고 있다. 신발은 형태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끝이 뾰죽하다」

벽화에 나타난 장고춤

이렇게 석탑이나 부도탑, 혹은 고분의 벽화 등에서 보이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인상을 보면, 이미 장고춤은 고려시대에 완전한 춤의 형태로 전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다.

이런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장고비천인상에서 볼 때 장고춤은 농악놀이에서 파생한 춤이 아닌, 정형화된 장고를 이용해 추는 독자적으로 발생한 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무용이 아닌 고려 때부터 전해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제 뉴스를 보니 국보 제147호인 울주 ‘천전리각석’에 낙서가 발견되었다고 난리들이다. 낙서를 한 추정시기가 지난 3월에서 7월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는데, 벌써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관할 지자체에서 포상금 1,000만원을 걸고 낙서범을 찾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석 주변에 CCTV 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녹화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에 소재하는 ‘울주 천전리각석’은 태화강 줄기인 내곡천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위와 아래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사진출처 / 울산포커스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매번 말로만
 

국보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에 대한 낙서가 어디 어제 오늘 일이던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낙서와 훼손에 멍이 들고 있다. 그런데도 관계당국은 매번 가중처벌이니 무엇이니 해대면서, 이런 일이 왜 자꾸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문화재청에서는 숭례문 화재 후 재난 예방 및 대응체계강화를 위해 목조문화재 방재시설 구축 예산을 증액하였으며, 중요목조문화재 150건에 대한 안전경비인력을 558명으로 증원 배치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재보호법' 등을 개정하여 문화재 훼손범 가중처벌 규정과 문화재별 화재대응 지침서를 마련하였다고 하는데, 어째서 국보인 천전리각서에는 CCTV가 멀고, 녹화도 안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어른 가슴 높이에 돌멩이로 긁은 듯한 방법으로 ‘이상현’이라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범인을 잡기 위해 지난 8일에 수사에 착수를 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렇게 낙서를 하는 인간들을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백 년에서 천년 이상을 지켜온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인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적힌 낙서들. 파고 쓰고 별 짓을 다했다. 국부는 마음대로 보수를 할 수도 없다. 밑에 '문화재가 아파해요'라는 글이 속이 아리다.(2006, 5, 26 답사자료)


낙서나 훼손이 되면, 그것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다. 복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과거의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을 것인가? 단지 외형적인 모습만 흉내를 낼 뿐이란 생각이다. 진정한 복원이란 장인의 혼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수도 없이 문화재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쇠귀에 경 읽기일까?

어느 누구도 그런 심각한 문화재 훼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 무관심이 불러온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오래 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람들. 그들도 방관자라는 생각이다. 그 글의 일부를 다시 보자.

부끄러운 낙서 천국 대한민국

(전략)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그 벽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남녀 두 사람이 이름을 적어 놓고 영원히 사랑을 하자고 부언을 달았는가 하면 언제 자신이 다녀갔다고도 파 놓았다. 어느 것은 문화재를 일부러 훼손시키기 위한 문구도 있다. 종교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그저 파 놓고 간 것도 있다. 도대체 낙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면 저희 집으로 가서 벽에 대고 마구 그리거나 마룻바닥 혹은 거실에라도 파 놓던지 왜 꼭 문화재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다가 낙서를 하는 것일까?

(중략)전국 어디를 가나 여기저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낙서는 그 도를 넘고 있다. 문화재고 머고 가리지를 않는다. 이런 낙서의 버릇은 무속적 사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과거 사람들이 많은 질병으로 목숨을 잃거나, 재앙으로 인해 사고가 잦을 때는 커다란 암석이나 단단한 쇠붙이 등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그 바위나 쇠붙이처럼 오래 간다고 하여 명산의 바위에다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 후에는 많은 치성을 드렸겠지만 그런 곳에 이름을 적고 오래 살았는지, 아니면 출새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그 곳에 적고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사랑을 오래 지속하고 싶다거나 하는 발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한마디씩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지나간다면 오히려 좋아지라고 한 짓이 더 나빠질 것만 같다. 우리는 흔히 ‘입 살이 보살’이라는 속담에서 그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보물인 완주 화암사의 우화루 벽에 가득한 낙서. 어른의 팔을 뻗쳐도 닫지 않는 높이에도 낙서가 되어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높이까지 낙서를 한 것일까?(2008, 3, 27 자료)

사람들의 입에는 살이 있다는 소리다. 악담을 들으면 그만큼 자신에게 해롭다는 사실이다. 낙서를 한 것을 보고 한 마디씩 모두 악한 말을 하고 간다면 그 자신들에게 결코 좋은 일이 생길리가 없다. 욕을 많이 먹으면 명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그도 괜한 소리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명만 길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제발 어디를 가나 버릇처럼 하는 낙서에서 좀 벗어나자. 어느 아는 분이 이런 소리를 하셨다. 낙서를 아무 곳에나 하는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낙서판만큼이나 편하지가 않고 시끄러워진다고 말이다. 이젠 해외에까지 낙서를 하는 짓거리가 비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말로는 문화민족이니 어쩌니 운운하면서 속내는 비문화적인 일을 일삼는 몇몇의 사람들 때문에 정말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자숙하였으면 좋겠다.

내 나라의 문화를 내가 지키지 않으면 과연 누가 지켜낼 것인가? 아름다운 내 강산을 낙서투성이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면야 후에 무슨 지탄을 받을 것인가? 낯부끄러운 짓일랑 이제 그만하고 있는 그대로 자연과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자.(끝)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산195-1 번지에 소재한 쌍봉사. 쌍봉사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이 철감선사탑은 철감선사의 부도탑이다. 부도란 옛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을 말한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당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다. 경문왕대 때에 이 곳 화순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그의 호인 ‘쌍봉’을 따서 ‘쌍봉사’라고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인 868년에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각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뛰어난 조각술이 돋보이는 철감선사탑

8월 21일에 쌍봉사를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찾아간 쌍봉사. 쌍봉사는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들이 경내에 소재한다. 철감선사탑이 있다는 곳으로 오른다. 주변을 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탑 옆에는, 보물 제170호인 비문이 사라진 탑비도 함께 있다. 담이 터진 입구 쪽으로는 탑이 서 있고, 그 안쪽에 탑비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때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탑은 전체적으로 모두 남아있으나, 아쉬운 것은 꼭대기의 상륜부인 머리장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철감선사탑은 기단이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장식이 화려한데 그 중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화려하다.





하층기단인 밑돌은 2단으로 조성했는데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 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탑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의 아래는 조금 넓게 조성을 해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마치 사자들이 구름위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조각한 장인의 염원이 담긴 탑

상층의 윗돌 역시 2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앙화를 조각해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함께 비천상까지 돋을새감으로 조각하였다(위) 천상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조각은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철감선사탑은 비천상까지 함께 새겨져 더욱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탑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쯤으로 추정된다.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작품이다. 아마도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은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천인이나 가릉빈가들이 살고 있다는 극락을 염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8마리의 사자들은 각각 자세를 달리해 앞을 주시하고 있다. 탑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철감선사탑.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것은 언제 또 다시 이런 아름다운 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진전사지가 있다.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니 8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한 곳이다.

이 진전사에서는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이 되었으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체발득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진전사는 16세기경에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탑이 있다.

양양군 강현면에 소재한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

거대사찰이었을 진전사

국보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보물인 부도탑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둔전리를 나오다가 보면 절의 축대로 사용되었을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 진전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재 둔전리 야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현재의 진전사로 가는 길 우측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이번 답사가 4번째이다. 2004년과 2006년, 그리고 2008년 비가 오는 날과 이번 11월 14일이다. 다행히 갈 때마다 시기적으로 다르게 찾아갔는데, 가을에 찾아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가?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하층 기단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좌상

도대체 여래불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도, 지금 다시 찾아가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문화재를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창피스럽다. 지금처럼 문화재 한 점에 적게는 30장, 많게는 60장 정도의 사진을 담는 것이 아니고, 고작해야 5~6장의 사진만 달랑 담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지난 사진이라도 있으니 문화재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했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좌정한 비천상을 각 면에 2구씩 조성을 해, 총 8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일층 탑신에는 한 면에 한 구씩 여래좌상을 조각되어 있다. 진전사지 석탑의 특징은 모두가 좌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인이나 팔부중상의 경우에는 입상을 조각하는데, 이 석탑은 돋을새김한 모든 상이 좌상이다.


기단 상층에 조각되어 있는 팔부중상 좌상. 이 탑에는 모든 조각이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래좌상 중에 서편으로 앉은 여래좌상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사진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자료에도 여래좌상의 안면이 없다. 그저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여래좌상의 안면을 누가 떼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땅에 소재한 문화재부터 관심을 가져야.

딴 면은 다 괜찮은데 서쪽 편의 여래좌상과 그 아래 팔부중상 중 왼편의 얼굴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만일 일부러 훼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면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안면을 일부러 떼어낸 듯하다.

기단부와 몸돌 1층에 세련된 조각들이 있어 국보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안면이 사라지다니. 혹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적으로 마모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다면 딴 조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한 편의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얼굴이 사라진 것일까?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은 안면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마치 떼어낸 것처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 세월이 지나 자연적으로 변화가 되고, 풍우에 씻겨 그 아름다움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이렇게 누군가 일부러 훼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내 땅에 있는 문화재부터 간수를 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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