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이 된 마애종이 있다. 마애종이란 바위에 종을 치는 모습을 조각하여 놓은 것이다. 이 마애종은 쇠줄로 달아 매단 종을, 스님이 치는 모습을 묘사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애종이다. 이 종을 자세히 보면 유두와 유곽 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형태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작품으로 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안양 석수동 소재 마애종(2004, 2, 26 답사)

범종은 왜 울리는가?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보물 제11-3호인 사인비구가 제작한 안성 청룡사 동종(2008, 12, 31 답사)

아름다운 범종, 그 세계에 빠져들다.

전국의 사찰을 답사를 하면서 종에 빠져 든 것은, 그 종의 문양이나 조각 때문이기도 하다. 종이야 함부로 칠 수가 없으니, 그 소리야 많이는 듣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종에 새겨진 각종 문양 등은 가히 불교미술의 꽃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쇠에다가 그려 넣은 문양 하나하나가 어찌 그렇게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있을 수가 있을까?

누군가 상원사 종을 들여다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를 않았더니, 나에게 신이 왔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절마다 있는 흔한 범종을 들여다보다가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종에 새겨진 각종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그 종을 만든 장인의 예술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어찌 쇠붙이에 저런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가 있을까? 만든 장인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예술혼은 청동도 녹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니던가.


보물 제11-4호인 홍천 수타사의 사인비구가 제작한 범종과 용뉴(2009, 6, 12 답사)

불교금속미술의 꽃, 숨이 막히다

조선조 현종 11년인 1670년에 사인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3호인 수타사 동종은, 그 종을 붙들고 있는 용뉴가 힘이 있다. 그보다 4년 뒤인 1674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안성 쳥룡사 동종(보물 제11-4호)는 종 표면에 ‘파옥지진언’ 이라고 적어, 이 종으로 인해 지옥에 빠진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을 그려냈다.

같은 보물 제11호인 청계사 동종에는 보살상이 표면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살상의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표현을 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쇠붙이에 표정까지 그려낼 수가 있었을까? 국보로 지정된 범종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년에 제작된,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을 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표현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나올 것만 같다. 또 위에 달린 용뉴는 어떠한가?


보물 제11호 청계산 청계사의 동종(2004, 11, 6 답사)

어찌 쇠를 녹여 만드는 범종에 이렇게 세세한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공구를 갖고 하는 것도 아니다. 거푸집 하나를 갖고 만든 종들이다. 그 아름다움의 끝은 화성 용주사의 국보 제120호 범종에 새겨진 비천인이다. 복대를 하늘로 날리며 내려앉는 비천상. 이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범종. 지금이야 더 아름다운 범종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종들이 이렇듯 생명이 있을까?


국보 제36호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때 제작된 상원사 동종(2006, 5, 18 답사)

딱딱하고 찬 쇠붙이에서 받는 느낌이 이리도 따스할 줄이야. 이 어찌 마음의 수양이 없이 만들 수가 있을 것인가? 아마 이 종 하나를 만들면서 많은 중생을 번뇌에서 구하고자 하는 수행이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종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나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범종소리. 오늘 전국에서 일제히 울린다면, 이 답답함이 가시려나 모르겠다.

국보 제120호인 화성 용주사 동종의 비천상(2004, 5, 21 답사)

반구대,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납작 엎드린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대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국보 제285호 암각화가 있으며,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을 필요로 했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 물이 있는 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는 맑은 대곡천이 흐르고 있어, 이곳 주변에 터전을 마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큰 길에서 이정표가 여기저기 걸려있는 것이 오히려 길을 찾는데 방해가 되었다고 하면, 어쭙잖은 갈 찾기 실력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암각화는 큰 길에서 좁은 마을길로 들어가, 차 한 대가 겨우 지날만한 철도 위로 난 다리를 건너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2차선 도로로 정비를 잘 해놓았는데, 정작 입구는 찾기가 난해하다.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안내판사진 전사)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는 대곡천 변에 암벽을 찾아가는 길은, 600m 정도를 걸어야 한다. 처음 입구에서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간다면, 100m 정도를 줄일 수가 있다. 하지만 도로가 좁아 입구 정자가 있는 곳에 차를 대놓고, 천천히 풍광을 즐기기로 했다. 그 안까지 차를 몰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은 짜증스럽기도 하다.


습지에 놓인 목책다리를 건너면 대나무 숲이 나온다. 600m 정도를 걸으면 암각화를 만날 수가 있다.

습지 위로 놓은 목책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길. 다리를 건너니 대밭이다. 푸른빛을 띤 대나무들이 가을바람에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심호흡을 하며 흙길을 걷는다. 오랜만에 대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냄새를 맡아본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문화재 안내판이 서있다. 반가움에 달려가 보니,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된 대곡리 공룡발자국화석이다.

안으로 들어가 하천가를 보니 커다란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그곳에 움푹 파인 발자국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어떤 것이 공룡발자국인지 표시라도 해두었다면, 여행자의 좁은 안목을 탓하지는 않았을 것을. 이 일대에 난 발자국들은 약 1억 년 전쯤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발자국이라는 것이다.


울산시 문화재자료인 공룡발자국화석이 있는 바위
 
암각화를 그리며 바삐 걸어간 길

국보를 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꼭 국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들려보고 싶었던 곳이던가. 걸음을 재촉해 숲길을 따라 들어간다. 그 안쪽 대곡천이 폭 넓게 흐르는 곳에 안내판이 걸려있다. 대곡리 991번지에 해당한다는 이곳의 건너편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변의 절벽에 약 290여 점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으며, 이곳에는 바다와 육지동물, 사냥과 포경장면 등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다동물은 고래, 거북, 물고기, 가마우지 등을 그렸고, 육지동물은 사슴, 호랑이, 멧돼지, 여우, 늑대, 너구리 등을 그렸다고 한다.


반구대는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주변 경치가 절경이다. 건너편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 바위벽이 보인다(아래)

더구나 암각화에 표현된 배와 작살, 부구 등을 이용하여 고래를 잡는 포경장면은 울산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반구대 암각화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북태평양의 독특한 선사시대 해양문화를 담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보이지 않는 암각화, 사람 없는 안내소

암각화를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세 대가 설치가 되어있는데, 사람들이 많아 기다려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망원경이라도 준비를 해 올 것을.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망원경을 건너편 암벽에 대고 이리저리 맞추어 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암각화의 형태는 찾을 수가 없다. 겨우 그림 한 두 개가 수면에 걸려 있을 뿐이다.

도대체 290여 개나 된다는 암각화는 어디로 간 것일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날인데도 안내소는 사람의 기척조차 없다.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안내를 받을 수도 없다니 이래저래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와중에 꼬마 하나가 철책에 걸린 표지하나를 뒤집는다. ‘물이 차서 암각화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나. 차라리 들어오는 입구에 이런 안내판 하나를 걸어두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을 것을. 암각화를 찾는다고 뒤에서 재촉하는 것도 무시한 채, 이리저리 망원경을 돌리느라 마음만 탔던 것을. 내 건너 저 편 절벽에 그토록 대단한 국보를 두고 돌아서야 한다니.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두고 먼 길이라도 떠나가는 심정이다.


연곡사 동부도,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 조상님들의 예술혼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동부도를 보고 그 위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부도가 있다. 국보 제54호인 북부도는 또 다른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런 부도를 만든 조상님들께 정말로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북부도, 산길에 호젓하게 서 있는 북부도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북부도는, 동부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이 되었다. 아마 동부도를 따라 북부도를 조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부도 보다는 조금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나름 특징을 갖고 있는 북부도.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팔각형의 탑신, 그 아름다움

네모꼴의 지대석 위에 구름무늬가 조각된 탑신을 놓은 연곡사 북부도. 중대석은 연꽃의 결이 그대로 표현을 하였다. 거기다가 아름다운 귀꽃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팔각면에는 천상의 새라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그런데 이 가릉빈가는 동부도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동부도의 가릉빈가가 몸체에 비해 날개가 작은 것에 비해, 북부도의 가릉빈가는 큰 날개를 갖고 있어 체형의 균형이 잡혀 있다.

몸은 작고 날개가 크게 표현이 되어 있어 안정적이다. 그 위에 올린 팔각의 몸돌 문비에는 문짝, 향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집(화사석)은 창이 없으며 그 위에 옥개석인 지붕돌은 나무로 만든 지붕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한편이 약간 파손된 것을 빼고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지붕돌은, 기왓골 등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표현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부연과 처마 등이 우리가 흔히 보는 한옥의 모습을, 작은 소형의 모양으로 축소를 해 놓은 듯하다.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하나하나 표현을 하였는지, 그 모양에 넋을 잃을 정도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북부도, 국보는 남다른 점이 있다.

동부도가 섬세하고 여성적이라면 북부도는 조금은 거친 듯한 남성적이다. 그래서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는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동부도보다 조금 더 거친 듯한 북부도. 머리 위에 올린 노반과 복발, 보개와 보주는 동부도에 비해 조금은 단순하게 표현이 된 듯하다. 동부도에서 보이는 사방에 새를 북부도에도 그대로 만들었지만,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파손이 되어있다.




동부도와 북부도의 보개에 조각을 한 새들이 왜 모두 파손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새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사방에 조각이 된 새를 모두 파손을 했을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 새의 머리가 잘려진 것이 기자신앙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기자신앙에서는 새의 머리를 이렇게 잘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이 새의 머리를 잘라간 것이 기자신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아무리 기자신앙이라고 해도 우리의 정서에는 머리를 통째로 잘라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부도에 비해 더 깊이 잘려나간 북부도. 그 앞에 서서 부도를 떠나지 못함은, 이 새의 잘려나간 머리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시작한지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숱한 문화재를 보고 다녔지만, 연곡사 동부도와 북부도와 같은 아름다움을 본 적은 흔하지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파손된 이 부도의 상처가 더 마음이 아프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연곡사에서, 마음속의 눈물을 흘리고 뒤돌아서는 것을 저 부도는 알고 있을까?

부도란 예전 스님들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부도의 꾸밈은 석탑과 같이, 기단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와 탑신, 그리고 머릿돌로 조형이 된다. 머릿돌은 지붕을 얹고 그 위에 연꽃모양으로 만든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런 일반적인 부도와는 다른 아름다운 부도가 눈길을 끈다.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 돌 위에 세워진 국보 제53호 연곡사 동부도는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인 진평왕 6년인 54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연곡사는, 고려 초기까지도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인가 연곡사에는 이 외에도 보물 제154호인 서부도로 불리는 소요대사부도와 국보 제54호 북부도가 있다.


천상의 반인반조인 가릉빈가를 새겨

동부도의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그리고 위 받침돌을 차례로 올렸다. 이단으로 꾸며진 아래받침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드는 팔부중상을 새겨 넣었다.

위받침돌은 밑면을 둥글게 하여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둥근 테를 두른 안에 불교의 낙원인 극락에 산다는 전설 속의 새인 ‘가릉빈가’를 새겨 넣은 점이 독특하다. 가릉빈가는 전설속의 극락조로 하반신은 새이고, 상반신은 사람인 점이 특이한 모습이다.



자태가 아름답고 소리가 묘하다는 가릉빈가는 불가의 호법신장의 일종으로 볼 수가 있다. 일찍 고구려 안악고분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그림이 보인다. 가릉빈가는 결국 부도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법의 기능과, 부처님을 덕을 찬양하기 위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극락조로 불리는 가릉빈가는 반인반조의 몸으로 호법과 찬양의 기능을 갖고 있다.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인 동부도

탑신인 몸돌에는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수호신장인 사천왕상과 향로 등을 새겨 넣었다. 돋을새김을 한 사천왕상은 지금보아도 당장 호령을 하고 뛰쳐나올 듯한 기개를 보인다. 팔각으로 정교하게 마련한 지붕돌은 돌 위에 새겼다고는 볼 수 없게 화려함을 보이고 있다. 서까래와 기와의 골은 물론, 부연과 막새기와까지 표현을 할 정도로 뛰어나다.



머리장식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사방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을 두고, 연꽃무늬를 아래위로 새겨놓았다. 일설에는 도선국사의 부도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 부도의 아름다움에 반한 일제는 동부도를 동경대학으로 옮겨가려고 하였다는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머리장식에 새긴 네 마리 봉황의 머리가 다 잘려나갔다는 점이다.



사방에 날개를 펼친 봉황의 머리는 모두 잘려나갔다

느낌이 일부러 그렇게 잘라버린 듯 해 씁쓸하다. 한 마리도 아니고 어떻게 네 마리의 머리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봉황의 모습이 더욱 궁금하다. 아마 머리 위에는 또 다른 장식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 머리를 잘라낸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영원한 미궁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놓은 장대를 말한다. 이 당간을 세우기 위해서는 양편에 지주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당간지주하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조성 된 수많은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그러나 당간이 남아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그 중에서도 철로 만들어 진 당간은 공주 갑사와 안성 칠장사, 그리고 청주 등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번화가에는 철 당간이 한 기 서 있다. 국보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철 당간은 그 모양부터가 웅장하며, 아직도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철 당간이 서 있는 곳은 예전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에 창건된 용두사가 서 있던 자리라고 한다. 용두사는 고려 말의 잦은 전쟁으로 폐사가 되고, 남은 것은 이 당간 한 기뿐이다.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청주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나서 찾아간 철 당간. 앞으로는 젊은이들의 거리가 있다. 여기저기 젊은이들이 길을 메우고 있고, 예전 극장자리라는 곳에 철 당간이 서 있다. 철 당간은 길의 높이보다 조금 낮게 되어있으면 주변은 보호책을 쳐 놓았다. 아마 이렇게 깊게 서 있는 것은, 당시의 높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인 듯하다.

용두사지 철 당간은 밑을 받치고 받침돌이 있고, 양편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바깥 면에는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선으로 돋을새김 하였다. 지주의 윗부분에는 빗장과 같은 장치를 쇠로 둘러 당간을 고정시켰다. 현재 남아있는 철 당간은 원통모양의 철통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만들어 서로 맞물리게 20개를 쌓았다.



현재는 20개의 당간의 높이가 12.7m에 달하지만, 처음 이 철 당간을 제작했을 때는 30개를 연결하여 세웠다고 한다. 청주 용두사지 철 당간은 밑에서부터 셋째 번의 원형철통 표면에 <용두사철당기>라는 명문이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건립 년대가 준풍 3년, 곧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 3월 29일이라는 것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세운 당간이 용두사지 당간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예로부터 청주는 홍수가 잦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잦은 홍수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어느 점술가가 말하기를 ‘청주는 배의 형상이라 높은 돛대를 세워 놓아야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돛대 구실을 하는 이 철 당간을 세웠더니, 그 때부터 재난이 닥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간의 전체 높이 12.7m, 철제 원통당간의 높이는 63cm이며, 지주의 높이는 4.2m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원래 이 용두사지 철 당간의 높이는 19m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철 당간의 모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용두사지 당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가, 이 당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 옆에 앉아 침을 뱉고 담배를 피워대는 것을 보면.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모습은 정말로 짜증이 난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아니던가? 괜한 소리 한 마디를 해보지만, 미안한 기색도 없다. 가면 될 것 아니냐는 그런 표정이다. 그 잘 붙여놓는 금연문구 하나쯤 만들어 놓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꼭 그래야만 조심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지만. 철에 매연은 상극이라는데 말이다. 주변에서 뿜어나오는 각종 매연도 당간에 영향을 줄텐데, 그 주위에 둘러앉아 억세게 담배를 피워대니 국보의 안전이 온전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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