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어머니의 정성에 감복을 하였으면, 직접 탑을 조성하고 스스로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조성하였을까?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사자 삼충석탑은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화엄사 서북쪽의 제일 높은 대지에 조성을 했으며 이 석탑이 있는 효대에는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형상이라는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신라 최고의 걸작품 3층 석탑

2단으로 꾸며진 기단의 아래층에는 각 면에는 천인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천인상이 새겨져 있으며,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물을 들고 있다. 이 기단석만으로도 뛰어난 걸작품이다. 그 위에는 사방에 암수 사자가 입을 벌리고 밖을 향해 앉아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자들에 둘러싸인 스님의 입상이 서 있다. 이 스님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형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 석등을 머리에 이고 한 무릎을 세워 앉아있는 공양상은, 손이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연기조사 스스로가 어머니를 위한 공양을 올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하며, 공양물은 차로 어머니에게 향한 연기조사의 효심을 알아볼 수 있는 조각상이다. 이 두 가지의 조각품을 합해 사사자 삼층석탐이라 하며,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룬다고 한다.





조각예술의 극치라는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

3층의 몸돌에도 뛰어난 조각이

3층으로 구성된 몸돌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조각했다. 사면에 각각 조각을 한 상들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5단씩의 받침으로 평평하게 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만 살짝 치켜올려 여유로움을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과 같은 복발만이 남아있다.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몸돌의 위에 올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엄사를 찾아갈 때마다 오르는 효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지난 날 어머니께 효도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 효대를 찾아 무릎을 꿇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이 잎 석등 안에 쪼그리고 앉은 연기조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층석탑의 석탑부와(위) 석탑 앞 석등의 공양상(가운데) 공양상은 연기조사 본인이라고 전한다(아래)
 
전국을 다니면서 수 없이 많은 석조물들을 보아왔지만, 이 효대에서 만나는 사사자 삼층석탑은 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 공양상인 석등 뒤편에 마련한 자리에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대단한 조각품을 조성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옛날 손으로 일일이 돌을 다듬어 만든 사사자 삼충석탑. 기단부에 돋을 새김한 비천상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고, 1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들은 바로 문을 열고 박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넋을 뺐기고 보고 있는데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동행한 일행의 재촉하는 소리에 석탑을 뒤로하고 떠나면서도, 마음은 그곳에 두었나보다.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더 보려는 안타까움에.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1번지는 사적 제408호는 왕궁리 유적이다. 이곳은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혹은 별도설 등이 이곳이라는 학설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안승의 보덕국설과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기도 하다.

한창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왕궁리 유적지를 찾았다. 마침 공사를 쉬는 날이라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유적지를 한창 발굴하고 있는 중인데, 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표시를 한 곳은 아마 건물터인 듯하다. 유적지 앞쪽에 우뚝 서 있는 국보 2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백제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안정감 있는 형태의 왕궁리 석탑

오층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탑 주변에서 「관궁사」,「대궁」등의 명문기와가 발견이 된 점으로 미루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왕궁리 석탑은 발굴, 복원 전까지만 해도 기단부가 땅속에 파묻혀, 토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밑에 석물로 된 가단부가 발견이 되어 원형을 복원되었다.


발굴중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

멀리서 보아도 왕궁리 오층석탑은 균형이 잘 잡혀있다. 돌 하나하나를 맞추어 쌓아올린 것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 주춧돌이 놓고, 우주석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다. 탑은 옥신과·옥개석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1층 몸돌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우주석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은 작아지고, 옥개석도 그에 따라 넓이가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5층까지 올라가면서 매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며, 등분을 하지는 않았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개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4층과·5층은 4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추녀는 얇고 추녀 밑은 수평이며, 끝부분에는 종을 매달았던 풍령공이 뚫려있다.





발굴 중이기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줄을 쳐놓아 가까이는 갈 수가 없다. 뒷면과 탑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금지를 시킨 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줄을 스스로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탑이 높아 상륜부가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륜부에는 노반과 부발, 앙화, 그리고 부서진 보륜 1개가 남아 있다.

왕궁리 석탑 국보라서 다르다. 그 아름다움이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탑을 보아왔지만,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하다. 어떻게 저렇게 안정감이 있게 조형물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마치 거대한 틀에 부어 만든 것만 같은 정교함이 놀랍다. 국보로 지정이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국보로 지정된 여느 석탑처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마치 후원 한편에 꼭꼭 숨겨졌다가, 발을 걷고 버선코를 살며시 들고 나타나는 여인네와 같은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단아한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한참이나 바라다보다가 ‘가자’는 일행의 목소리에 놀란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끌며 돌아서지만, 그 단아한 아름다움은 한참이나 남아있을 것만 같다.



여주 고달사지의 동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돌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이번까지 3번을 이 부도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천년 세월을 제 모습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이 부도가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각으로 된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중대석의 용과 구름은 아직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다. 중대석의 용은 힘차게 부도를 감고 있다. 용의 무늬 중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두발로 감싸고 있는 조각은 가히 압권이다.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많은 부도를 보았지만 이런 멋진 조각을 해놓은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에 새긴 용머리에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보인다

  
▲ 부도 부도에 새겨진 용의 조각. 발로 불꽃이 이는 여의주를 잡고 있다

  
▲ 용꼬리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용의 조각 중 꼬리 부분. 두 마리의 용꼬리가 힘차게 감고 있다

부도의 전면에 돌출이 된 용의 머리 역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대석으로 올라가면 연촉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영창이 서로 반대편에 조각이 되어 있다. 자물쇠 문양과 영창 사이에는 사천왕상이 힘있게 조각되어 있다.        

 

머릿돌은 상대적으로 몸돌보다 크게 만들었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머릿돌의 밑면에 조각이 된 비천상이다.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 같은 이 비천상에서 부도는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부도를 조각한 공인도, 이 부도의 주인이 하늘로 오르기를 바랐나보다. 또한 스스로도 하늘로 올라 비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자물쇠 문양 상대석에 조각된 자물쇠 문양인 문비.

  
▲ 영창 부도의 상대석은 상징적으로 사리가 있는 곳이다.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그 반대편에 조각된 영창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 사천왕상 상대석 8면 중 사면에는 사천왕들이 부도를 지키고 있다

너무도 생생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의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광종 대에 전성기를 누리던 고달사가 폐사가 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인가 보다. 고달사에 남아있는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혜진탑과 비교를 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 비천상 고달사지 부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은 역시 비천인상이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다

  
▲ 비천인상 머릿돌의 밑면에 새겨진 비천인상.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완성시킨 아름다움의 결정체다


천년 세월 한 자리에 서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며 제 모습을 지켜 낸 고달사지 부도. 그래서 고달사지를 찾을 때마다 일부러 계단을 오르는 것도, 그러한 아름다운 탑을 보기 위해서다. 더욱 이 부도를 눈여겨보는 것은, 앞으로 또 천년을 그렇게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10)


탈도 많고 말도 많은 4대강 정비.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이 되는 4대강 정비는, 연일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한다고 한다.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가운데 4대강의 정비로 인한 문화유적지의 훼손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유역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고달사지 정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여주 해목산 기슭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고려 초기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 왕실 비호를 받는 대가람이었다. 광종 1년인 950년 원감국사가 중건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1260년(원종 1)에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나, 그 후 기록이 없어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 고달사지 발굴 위에서 내려다본 고달사지 발굴현장. 7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6차발굴까지 이루어졌다.

  
▲ 정비된 고달사지 2009년 10월 18일 찾은 고달사지. 이렇게 정비를 하는데 꼭 10년이 걸렸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의 명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달사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조 중기까지도 고달사가 번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가 절터에 남아 있으며, 보물 제282호 쌍사자석등 및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몸체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달사를 찾았을 때는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2004년 8월 12일이었다.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드러난 석물들을 한 곳에 모아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물은 보호철책을 둘렀고, 발굴 작업을 한 곳이 비에 훼손이 될 것을 우려해 천막으로 덮어놓았다.

 

  
▲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8호 석불좌. 주변은 다 파헤쳐지고 보호철책이 둘러쳐 있다

  
▲ 정비된 고달사지석불좌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 석불좌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탐방로를 만들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

  
▲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 석불좌가 있던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다. 주추돌이 남아있고 오르던 계단이 복원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4대강 유역 지표조사를 마치겠다고?

 

고달사지는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처음 발굴을 시작한 것이 2000년이었으니 고달사지 한 곳을 발굴, 정리하는데 6차 작업을 마친 2006년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4대강 정비라는 명목 하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날림으로 조사될 확률이 높다. 강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사람들은 물이 많은 강 주변을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형성한다. 하기에 4대강 정비를 하기 전에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돼 있는 문화재 보호절차 등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4대강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도 유적지일 가능성이 큰 지역이기 때문에, 먼저 지표조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 우너종대사혜진탑비 및 이수. 탑비의 몸통부분(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여 누구나 다가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헸다

2009년 10월 18일, 다시 찾은 고달사지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있었다. 보호철책으로 둘러  쌓았던 보물들은 철책 대신 주변 정리가 되어 있었고, 탐방로가 마련되어 있어 문화재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이렇게 정비를 마칠 때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회마을에 보를 설치하겠다고 발표를 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취소를 하는 등 개발계획을 남발하는 관계당국이다. 이런 관계당국이 올바른 지표조사를 하리라고 믿음이 가질 않는다. 4대강 유역의 문화재지표조사는 한 두 해에 마쳐질 것이 아니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아야 한다. 여주 고달사지 발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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