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하직하고 나면, ‘유택(幽宅)’이라고 하는 묘에 들어가 영면을 한다. 물론 요즈음은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을 해서 뿌리거나, 그런 것이 서운하면 수목장(樹木葬)이나 혹은 납골당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묘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봉분을 고집하는 분들이 꽤나 된다.

 

그런데 이 묘를 보면, 참으로 그 사람이 살아생전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궁금하게 만드는 묘들이 많다. 앞에는 석물이 있고, 봉분은 남산만하다. 거기다가 큼직한 돌에는 별 이상한 글도 적혀있기도 하다. 자손을 잘 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대단한 인물인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돈으로 도배를 한 묘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능하다. 그러나 그 묘에 가서 아무도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다. 그 자손들이야 찾겠지만.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에 소재한 태종 무열왕릉

 

묘역을 갖고 사람을 판단할 수 없어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묘가 아니다. 사람이 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다가 죽은 이도 있겠고, 그저 고생만 하다가 죽은 이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나라님이라고 하는 분들은 죽은 후에 그 묘를 보면, 대충 그 사람이 얼마나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묘 하나만 갖고 그 임금님의 일생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경주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왕의 묘를 보면 그 크기가 대단하다. 무열왕의 묘도 대단한데 그 앞에 있는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묘 또한 만만치가 않다. 무열왕릉의 뒤편에는 왕릉이 3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 진흥왕릉고』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 능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보물 제65호인 서악동 삼층석탑을 비껴서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 2기가 있다.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 비

 

사적에 묻힌 나라님들

 

사적 제178호로 지정이 된 신라 46대 문성왕릉(839~857 김경응)은 진흥, 헌안왕 능과 함께 선도산 남쪽 구릉 말단에 있다. 능의 지름은 20,6m에 높이는 5.5m이다. 문성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왕위에 올라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였으며 임해전(안압지)을 크게 보수하였다.

 

사적 제179호인 신라 제47대 헌안왕릉(재위 857~861/김의정)은 문성왕릉의 바로 곁에 있다. 지름은 15.3m에 높이는 4.3m이다. 이 능은 밑 둘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들어나 있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었다. 헌안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하지만 이 두 임금의 묘는 무열왕의 묘에 비길 바는 아니다. 신라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유택을 보면, 그 나름대로 나라님들이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왕릉을 보면 제대로 된 이정표 하나 없이 덩그러니 봉분만 남아 있다. 후백제를 세우고 한 때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갖기도 하였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아들 신검과의 내분으로 고려에 의해 멸망을 하고 말았다.

 

명장을 만드는 것은 휘하의 장졸이다

 

이런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라님의 유택만이 아니다.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경주 김유신의 묘나, 23전 23승이라는 놀라운 전승의 해전 기록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의 유택 역시, 수많은 시간이 지났으면서도 후대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삶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이라는 대단한 해전인 한산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것은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장만 있어서 그 험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가 않다. 그 밑에는 장군을 믿고 의심 없이 따르는 수많은 장수들과, 이름 없는 병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만큼 명장 밑에는 백성들을 생각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수하의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라님 주변 사람들이 과연 명장 밑에 있는 명 장수들일까? 그들이 과연 국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다가 보면 참담하다는 생각만 든다.

 

 

바로 이런 차이다. 훌륭한 명장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따르고 나라와 국민들을 생각하는 장졸들이 있어야만 한다. 요즈음 들어 많은 지자체장들을 보아도, 그 주변에 명장을 만들 수 있는 장졸들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후일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일이다. 곁에 명 장수가 없고, 자신의 버팀목이 될 수 없는 장졸이라면, 당당히 버릴 사람은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말없이 숱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역사는 준엄하게 그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이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소재한 월정사. 오대산 월정사에는 국보 제48호 고려시대의 석탑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석조보살좌상은 원작을 모사한 보살좌상으로 대체하였다. 구층석탑과 보살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이 되었으며, 월정사는 자장율사 창건한 사찰이다. 탑과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많은 불교문화재들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불교조형물 중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된다. 월정사의 구층석탑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팔각의 귀퉁이마다 달린 풍경, 그대로 장엄

 

국보인 팔각 구층석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뒤,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어 마무리를 한 모습이다. 기단의 중석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와 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팔각의 갑석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석탑의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의 모형은 고려 석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층 몸돌 4면에는 작은 규모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마련했으며,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다. 이는 목조건물의 모습을 본따서 조형을 한 것이다.

 

 

 

화려한 고려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추녀가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으며, 바람이라도 불면 풍경소리가 은은하여 절 경내에 가득하다고 한다. 이 팔각 구층석탑은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고려 초기에 조형한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려불교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공양보살좌상

 

석탑 앞으로는 공양을 올리고 있는 보살좌상을 두었다. 이는 강릉 신복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물 제13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보살좌상은 팔각 구층석탑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는 1.8m의 정도이며 밑에 받침돌을 두고 있다.

 

석탑을 향해서 공양을 올리는 이 석조보살상은 ‘약왕보살’이나 ‘문수보살’이라고 하지만, 있지만 어쨌든 머리에는 높다란 관보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보살상의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이 되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을 하였는데,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원형의 보살좌상은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오른쪽 팔꿈치를 동자상의 머리에 올려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모사품에는 동자상이 보이지 않는다.

 

당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는 월정사 구층석탑과 보살좌상. 5월 6일 찾아간 월정사에서 만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에 문화재로 지정된 동종 중에 국보는 4점뿐이다.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 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용주사 동종 또한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종을 들어 올리는 형태로 제직을 한 용뉴 등, 화려한 장식과 뛰어난 조형미가 아름답다.

 

또 하나의 동종은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으로 국보 제280호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상원사 동종

 

오대산 상원사에는 우리나라 동종 중 가장 오래된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이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5월 6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소재 고려암의 신도들이, 하루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삼사순례에 간다고 하여 길을 따라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그리고 여주 신륵사를 돌아보는 순례길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상원사로, 제일먼저 동종을 보려고 종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동안 다녀온 지가 꽤 오래서인가, 상원사의 입구서부터 옛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종각도 옛 자리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모조 종을 만들어 놓고, 국보인 종은 유리로 벽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그 옆에는 종각을 새로 짓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아마 이 순례길에 만난 국보 상원사 동종의 진본을, 밖에서 만나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비천상에 빠져들다

 

내가 상원사 동종을 처음 만난 것은 벌써 10여년이 훌쩍 지났는가 보다. 그 처음의 만남에서 난 종각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바로 종에 새겨진 비천인 때문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비천인들은 금방이라도 종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두 번인가 종을 만났다.

 

 

 

상원사 동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발톱을 고추 세운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새겼다. 이 비천상은 비파와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어, 당시의 음악을 연구하는데도 좋은 자료가 된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구슬과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현존하는 한국의 동종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답다는 상원사 동종. 신라 성덕왕 24년에 조성이 되어,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상원사로 옮겨졌다. 힘이 있게 표현한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아름다운 문양으로 조각된 상대와 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이 되었다.

 

이 상원사 동종은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 우리나라에서 주조되는 모든 종에 계승된다. 뛰어난 이름다움을 보이는 상원사 동종. 그리고 그 동종에 조각된 비천인상. 난 이번에도 그 비천인상에 빠져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어서가자’고 재촉하는 일행들을 뒤따라 내려가면서도, 내내 그 비천인이 어느새 내 머리 위를 날아오를 것만 같아서이다.

실상사 백장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에 소재한 백장암은, 남원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면 대나무 숲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의 암자로 예전에 경작지였다는 곳에, 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정리를 하고 사람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국보인 삼층석탑을 만나면서, 석등은 빛을 잃게 된다.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문화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존의 통일신라시대의 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가히 국보 중에 국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삼층탑의 정교한 조각 뛰어나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전체가 놀라운 조각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삼층석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교한 조각은 백장암 석탑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일층의 탑신에는 신장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하며 뛰어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신장상이나, 곱게 단장한 보살상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층과 삼층의 탑신은 줄어들지 않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층의 탑신에는 사방으로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8명의 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층의 탑신에는 천인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치유를 해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다양한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지붕돌의 삼존상. 삼층석탑의 색다른 멋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탑들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탑을 조성한 장인의 솜씨는 최고였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탑의 특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올려 진 삼층의 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돌에 조각을 한 지붕돌을 올렸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과 탑신의 고임돌에는 난간모양을 새겼다.

 

 

이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층 지붕돌이다. 일반적인 지붕돌은 연꽃이나 구름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이 탑의 삼층 지붕돌에는 각 면마다 삼존불상을 새겨 넣었다. 각 면마다 조각한 삼존불상이 있어 이 탑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의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조각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백장암 삼층석탑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석탑

 

'백장암 석탑을 보지 않았거든 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 말라'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는 중에 전주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다. 그만큼 백장암 삼층석탑의 조각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정교한 예술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어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통일신라시대 손으로만 빚어낸 걸작.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장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했을까? 그 앞에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문화재들.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그 누구라도 우리 예술품의 높은 경지를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복원을 위한 중장비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그 차가운 금속물질이 더욱 날씨를 차갑게 느끼게 한다. 법천사는 권람, 한명희, 서거정 등이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만큼 이 법천사가 한 때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곳을 황려현이라고 사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여주에 속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비 귀부의 머리. 신라말에서 고료 초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나타나는 용머리이다


수많은 석재들이 쌓여있는 법천사지. 그 하나하나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석재들 틈에는, 보기만 해도 상당히 귀한 석조물들이 보인다. 벌써 몇 년째 이렇게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고려초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받침돌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용머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목 부분에는 또 다른 버팀석을 만들어 놓아 머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몸체인 거북의 등에는 '王'자가 육각형의 무늬 안에 새겨져 있다. 왕사나 국사의 비에서 보일 수 있는 글자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국보 현묘탑. 제 자리를 떠나 더욱 안타깝다.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현묘탑비의 뒷면에는 1370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 4.55m의 현묘탑비는 거북이의 몸에 용머리를 붙인 받침돌. 그리고 양편에 비천하는 용을 새긴 탑비와, 왕관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탑비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이런 대단한 조각을 후대에 남겨줄 수 있는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