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소재한다. 원증국사는 사나사를 중창했던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우(13011382)를 말한다. 보우의 호는 태고이며, 시호는 원증이고, 탑의 이름은 보월승공이다.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사나사를 다녀온 지가 오늘로 꼭 한 달이 되었다. 915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바람도 쏘일 겸 다녀온 사나사이다.

 

 

특이한 형태의 원증국사 석종비

 

원증국사 석종비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대석인 받침돌 윗면에 비를 꽂아둘 네모난 홈을 파서 비몸을 세웠는데, 그 양 옆에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비를 받치고 있다.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몸체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비와 흡사하나 형식이 그보다 간결하다.

 

이 석종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 보우의 제자 달심이 세운 비로, 비문은 정도전이 짓고 재림사의 주지인 선사훤문이 글씨를 썼다.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울 때 도움을 준 신도들의 명단을 적었다. 비는 머릿돌인 옥개석과 몸돌인 비신, 그리고 받침돌인 비좌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1.67m이며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비는 여기저기 수난을 당한 흔적이 보인다. 비 몸돌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기에도 안타깝다. 머릿돌 위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원하면서 던졌는지, 동전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석종비의 내용만 제대로 판독을 했어도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 문화재 하나를 소중하게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암에서 입적한 원증국사의 부도탑

 

원증국사 석종비 옆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사나사원증국사탑이 자리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태고화상 보우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원증국사는 13세에 회암사 광지선사에 의해 출가를 하였고, 고려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원으로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받았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귀국하여 소설암이라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고,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이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부도는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석종형태를 띠고 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의 기록에, 고려 우왕 9년인 1383년에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잠시 틈을 내어 다녀온 사나사. 그리고 사나사에서 만난 원증국사의 부도탑과 탑비. 간결하고 화려한 장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서 원증국사의 품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즈음 잘 나가는 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에 소재한 보물 제611호인 태고사원증국사탑비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무자년 봄 귀국하여 미원현의 소설산에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시양하였다. 임진년 여름 현릉께서 스님을 왕도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병신년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의 선사와 강사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