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의 문화재 답사기가 영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해리티지 채널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답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역시 취재를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섭니다.
밤 늦게 돌아올 듯 하네요^^





해리티지 채널에서 보기


 이 영상은 오래전에 제작됐고

블로그에 올렸던 것을 다시 한 번 발행합니다

히기에 지금은 막아놓은 댓글을 당시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다힌 한 번 답사의 열정을 기억하고 싶어지네요  

 

지동시장 옥상, 동남각루가 보이는 곳에서 이색 협약식

 

수원 화성 남수문 앞에 소재한 지동시장 옥상은 주변경치가 좋다. 옥상에 오르면 수원남문시장과 수원화성 팔달문, 팔달산과 서장대가 한 눈에 들어오고 수원화성도 볼 수 있다. 시장 옥상 한편으로 돌아가면 수원화성 구조물 중에 팔달문과 남수문을 지켜보던 동남각루가 자리한다.

 

6일 오후, 동남각루가 보이는 지동시장 옥상에서 이색 협약식이 열렸다. 지동시장(상인회장 최극렬)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경기발달장애인훈련센터(센터장 이성화)가 맺은 '1시장 1단체' 협약식으로, 최극렬 상인회장과 이성화 센터장이 서명을 했다.

 

이날 협약식을 지동시장 옥상에서 열게 된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자는 뜻도 있지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이성화 센터장이 시장 2층에 있는 회의실로 오는 것보다 차를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와 그곳에서 협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최극렬 회장의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다.

 

 

센터는 서울과 인천대구광주에 이어 전국에서 5번째로 문을 열었다. 이 센터는 발달장애학생에게 생애주기별 직업 욕구에 맞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직업교육과 훈련을 제공해, 직업생활과 자립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나아가 사회참여 기회까지 확대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KEAD)은 장애인이 직업을 통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완전한 사회참여를 실현하도록 마련한 단체로 기업이 장애인고용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43조에 의거하여 19909월에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다.

 

이날 협약식에는 지동시장 측에서 최극렬 회장표영섭 상근전무이사이태정 전무이사가, 센터 측에서 이성화 센터장장푸름 대리가 자리를 함께 했다. 최극렬 회장은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협약식을 맺어 상생하는 마음으로 지역경제를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날 협약에 따라 이들 두 기관은 지역경제 및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센터는 매월 둘째 주 금요일을 '전통시장 가는 날'로 지정·운영해 지동시장 물품을 적극 구매키로 했다. 특히 지동시장 상인회는 원산지와 가격 표시를 정착시켜 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기로 합의했다.

 

지동시장 최극렬 회장은 "오늘 협약식은 지동시장 옥상에서 수원화성 동남각루를 배경으로 가진 것도 의미가 있지만, 두 기관이 전통시장 활성화에 뜻한 같이 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찾아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UN(국제연합)WHO(세계보건기구) 발족일인 47일을 세계보건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는 1973년부터 건강 관련 기념일을 모두 합쳐 보건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여기에 2014년 국민건강증진법을 통해 이날부터 1주일을 건강주간으로 관련 행사와 사업을 펼치도록 했다.

 

보건의 날을 맞아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우리나라와 수원시민을 위해 최전선을 마다하지 않고 현장을 누비는 보건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건강과 보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수원시 팔달구보건소에서 감염병 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엄애리 부팀장(48)은 지난 1월 초 중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감염병의 존재를 알게 됐다.

 

관련 뉴스를 보며 감염병이 우리나라로 유입되지 않길 바라던 그의 바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수원시에 대책본부가 꾸려지면서 코로나19 대응 현장에 곧바로 투입됐기 때문이다. 이후 엄 부팀장을 비롯한 보건인들은 7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감염병이 지역사회로 확산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고 있다.

 

 

24년째 지방간호직 공무원으로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지역 주민들의 보건 증진을 위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이지만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보건인들은 감염병 대응과 극복에 한마음 한뜻을 모아 감염병 관리에 매진했다. 특히 수원시는 2월 말께부터 보건소의 일반 업무들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지역사회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대응 중이다.

 

엄 부팀장은 초기에는 각종 지침을 확인하고 조직을 갖춰 현장 대응 체계에 익숙하기까지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그때마다 동료들이 함께 힘을 모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보건인들의 단합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감염병은 업무량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환자가 발생하면 역학조사와 동선 관리 등의 환자 대응을 시작으로 접촉자를 조사해 관리하고 타 지역에 알리는 등 관련 보건 업무가 잇따른다.

 

또 방역물품 품귀현상 속에서 소독약과 마스크, 체온계, 현장 근무자들이 사용할 보호복 등 각종 물품관리도 중요한 역할이다. 여기에 지역 내 의료기관 관리와 선별진료소 운영, 민원 대응 및 사후관리 대비, 방역소독, 각종 행정 사항 등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업무는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수십 개가 넘는 단체채팅방과 각종 매뉴얼, 공문 등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엄 부팀장은 휴대폰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 결국, 코로나19 이후 자정을 넘어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고,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역할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근무자가 레벨 D 등급의 전신 보호복과 N95 마스크를 착용하고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하는 날이면 숨이 막히지만 물 한모금 마시지 않는다보호장비가 한 번 벗으면 재사용할 수 없어 부족한 상황에서는 화장실 가려고 벗는 것조차 아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빗발치는 민원은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확진자가 발생한 뒤 중앙방역대책본부의 기준에 따라 동선이 공개되면 환자의 이동 경로 등은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제외되는데, 불안한 주민들은 매우 상세한 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개월째 지치고 힘든 일상이지만 유치원생들이 고사리손으로 써서 보내준 편지와 이름 모를 주민이 보내준 꽃 등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보람과 고마움을 느낀다.

 

메르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달라진 우리나라의 감염병 관리 능력은 그에게 보건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 엄 부팀장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된다높아진 의식 수준과 기대치, 엄격한 잣대와 쓴소리가 결국 발전요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수원시의 한발 앞선 대응은 현장의 근무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자평했다.

 

접촉자 등의 자가격리를 위한 임시생활시설과 해외입국자들을 위한 임시생활시설 등 선제적인 조치들은 현장 대응에서도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코로나19 초기에 발열 증상이 있던 노숙인에 대한 검사를 의뢰한 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격리할 공간이 없어 난감한 경우가 있었는데, 임시생활시설이 생긴 이후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대응할 방법을 찾기가 수월해졌다고 부연했다.

 

보건인으로서는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건강과 보건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인식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엄 부팀장은 평소에 건강보다 중요한 게 없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건강을 위한 노력은 뒤처져 있다대부분이 흘려듣던 손 씻기, 기침 예절 등의 중요성이 이번에 부각된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19 종료 이후에도 건강과 보건을 위한 행동의 실천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감염병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된 만큼 향후 관련 조직이 더욱 확대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살아기가기가 참 힘들다고 한다. 딴 것이 아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문밖출입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저 집 안에 있는 것이 최고. 그러다보니 먹을 것이라도 잘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즐겨 먹는 것이 바로 산양삼 표고버섯 밥이다. 산양삼 표고버섯, , 대추를 세척해 잘 잘라 마련한다.

 

쌀을 붓고 밥솥에 안친 후 기다리면 맛있는 밥이 지어진다. 반찬은 많이 필요치 않다. 그저 표고버섯 된장국에 13찬으로 김치, 매운고추장아찌, 장어무침 정도면 충분하다. 소식을 하는 나로서는 많은 양이 필요치 않다. 그저 맛있게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먹어보면 절로 기운이 나는 것 같은 산양삼 표고버섯밥. 조리도 간단하다.

 

<조리방법>

 

 

산양삼 몇 뿌리, 표고버섯, 마, 대추를 준비한다.

 

 

산양삼을 잘 세척 후 대추, 마, 표고버섯을 세척해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쌀을 솥에 놓고 위에 삼, 마, 대추, 표고버섯을 올린다.

 

 

표고버섯 된장국을 끓인다. 버섯을 잘게 잘라 넣으면 식감이 대단하디

 

 

 

반찬은 많이 필요치 않다.  집에있는 그대로 .  준비하면 끝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선조를 둔 파평윤씨의 후손들이, 사랑채를 짓는데 재활용을 했다고 하면 이해가 가는 일일까? 물론 추증으로 영상이 되긴 했지만, 조선조에 양반들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시기에, 딴 곳에서 옮겨온 목재를 이용해 사랑채를 꾸몄다. 사랑채의 기둥에는 그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윤황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자형 사랑채와 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할 수 있는 윤황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재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정숙함

 

윤황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대 한편에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선생 고택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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