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정 안에 웬 부처님이 계셔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소재한 한재초등학교. 이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수령 600년이 넘었다는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이 된 ‘대치리 느티나무’와, 그 옆에 서 있는 석불이다.
이 석불은 민간신앙의 산물로 여겼던 것으로, 제작 시기는 후백제 당시로 추정한다. 원래 이 석불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파내 한재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온 것이다. 이 석불이 이 자리에 옮겨진 것은 지역주민의 꿈에 나타나서라고 한다. 오래도록 땅 속에 묻혀있기가 답답했던가 보다.
현재도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힌 듯 보이는 이 석불은 그 남은 형태로 보아 입상인 듯하다. 머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크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둥글게 조각하였는데 전혀 알아볼 수거 없다. 팔은 떨어져 나간 듯 하나 흔적이 남아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있다.
오랜 풍화에 마모가 심하게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섬세하지가 않다. 아마도 후백제 당시 미륵신앙의 산물로 여겨진다.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석불입상. 그 서 있는 자리 하나만으로도 눈여겨 볼만하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6월 17일, 광주광역시에 있는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향했다. 일찍 연락을 받고 날짜를 정한 터라, 미리 장애우들에게 ‘사랑 실은 스님짜장’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날따라 꽤 많은 봉사자들이 참석을 하였다. 장애우들에게 봉사를 한다고 하면, 더 많은 봉사단이 참석을 하는 것이 선원사 봉사단의 특징이기도 하다.
광주시장애인복지관은 재활복지관이다. 복지관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재활을 위해 땀을 흘리는 장애우들과, 곁에서 그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 모두 열심이다. 수영장이며 체육시설 등이 고루 갖춰진 곳이다. 화장실도 장애우들이 사용하기 편하게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
봄날처럼 표정이 밝은 장애우들
짐을 내리자마자 운천스님을 비롯한 봉사단원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젊은 봉사자들도 열심히 반찬을 날라 테이블위에 올려놓는다. 11시 30분 정도가 되자 마음이 바쁜 사람들이 식당으로 먼저 찾아 왔다. 면을 뽑아 끓는 물에 집에 넣으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조차 닦을 여유가 없다. 날이 무더울 때는 불 옆에서 조리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중 반수 이상이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곳에는 많은 장애우들이 재활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270명분을 준비해 달라고 했지만, 혹 모른다며 그 이상을 준비를 했다. 먼저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부터 짜장면을 날라다 드리고 난 후, 병문안을 오신 분들과 재활을 돕는 분들이 줄을 선다.
그 줄이 도통 줄어들 줄을 모른다. 몸이 불편하지만 혼자 힘으로 짜장면을 힘겹게 드시는 분들도 있다. 그래도 연신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좀 도와달라고 하시죠.”
“아녜요. 혼자 할 수 있어요.”
힘이 든대도 불구하고 혼자서 젓가락질을 하시는 분. 그렇게 혼자 재활을 위한 노력을 하는 중이시다. 그런데도 그 얼굴 표정이 참으로 밝다. 그 분에게서 봄날 같은 미소를 본다. 사람이 사는 것이 별 것이 아니란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이분들이라고 몸이 아플 줄을 알았을까? 그저 살다보니 남들보다 조금 더 몸이 성치 않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한 없이 맑기만 하다. 그리고 그 표정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할 편안함이 있다.
“맛있어요. 또 한 번 해주세요.”
이구동성이란 말이 있다. 이분들이 그랬다. 어떤 분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 번이나 배식구를 찾았다. 그동안 짜장면이 꽤 드시고 싶었든가 보다.
“그런데 스님짜장이라 그런가? 고기가 없네”
“예, 고기 대신 콩 고기를 넣었어요. 맛이 없으세요?”
“아닙니다. 맛이 담백한 것이 좋아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할 줄 안다고 했던가? 혹 말 한 마디에 상처라도 받을까봐 말을 돌리시는 분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정말 아름다운 것일까? 이렇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 하나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처럼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비바람이 부는 날 선유폭포에는 누가 있을까?
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다. 이렇데 장맛비가 후줄근하게 내리는 날 지리산 선유폭포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 참을 수 없는 성격 탓에 아우녀석을 졸라 정령치로 향했다. 남원에서 춘향묘가 있는 육모정 앞을 지나면 구불거리는 지리산 산길을 넘어 운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운봉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접어들면 1,173m의 정령치로 오르는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어 해발 600m.가 넘는 곳에 선유폭포가 자리한다. 선유폭포는 지리산의 빼어난 절경 중 한 곳이다. 선유폭포는 칠월칠석이 되면 선녀들이 이곳에 내려와 주변의 경치를 관람하고, 목욕을 하고 즐기다가 올라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와 같은 분들 또 있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 누가 이 선유폭포를 보러 올 것인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비가오고 나면 아무래도 폭포의 물이 불어 장관일 듯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좋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빗방울에 화면이 얼룩이진다. 하지만 위에서 만이 아니라, 아래서도 보여주어야 할 것만 같아 밑으로 내려간다.
누군가 인기척이 나 돌아보니 연인인 듯한 두 남녀가 선유폭포를 찾아들었다. ‘어~ 나와 같이 정신줄 놓은 사람들이 또 있네’ 라는 생각을 하면 피식 웃는다. 이 비에 웬 선유폭포 촬영이라니. 그나저나 빗속에 내리막길은 정말 위험하다. 조금만 잘못 딛어도 바위가 미끄러워 나자빠질 판이다. 그래도 엉금거리며 밑으로 내려간다.
2단으로 된 선유폭포. 아래서 보니 더욱 장관이다. 사진 몇 장을 찍기 위해 빗길을 달렸다. 돌아오는 길에 혼자 중얼거린다.
‘역시 난 제 정신이 아닌가 보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당동 당산에 마음을 내려놓고
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장맛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뿌려댄다. 일기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꽤 많은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주에 볼일을 보아야하니, 후줄근하지만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은 했지만 이 빗길에 어찌해야 할지.
몇 곳을 들려 당동 당산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거창 가조면 소재지에서 가북면 방향 지방도 1099호 선을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사병리 당동마을이 나온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당산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인에게 그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몇 분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마을 뒤편에 자리한 당산을 찾았다.
당산은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거처
‘당산(堂山)’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당산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일제치하에서 문화말살정책을 편 것도, 그 한편에는 당산이 갖는 공동체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당산에 모여 정성을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끈끈한 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다산을 기원하던 곳인 당산. 그 당산에서 이루어지는 기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당산은 우리의 마음의 거처이기도 했다.
당동마을 당산을 찾아가다
비는 잠시 멈춘 듯하다. 그러나 논둑길에 자란 풀들이 다리를 휘감는다. 빗물에 젖은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니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돌담을 쌓은 안에 작은 집 한 칸이 바로 당동마을 당집이다. 옆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라도 되는 듯.
당동마을 당산제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숱한 세월을 당동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를 잡아 온 것이다. 이 당산은 철종 9년인 1858년과 고종 15년인 1878년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1858년에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동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하루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제관을 정한다고 한다. 보름이 되면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산, 금귀봉, 박유산, 장군봉의 산신께 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제를 올린다. 당동 당산은 경남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당산을 만나 마음을 내려놓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당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어본다, 한 칸 남짓 돌과 흙으로 지어진 당집 주변에는 금줄이 여러 겹 쳐져있다. 이 당동 당산제에서는 닭피를 뿌린다고 한다. 당집 안에는 간소하다. 벽에 걸린 선반에는 ‘당사중수기’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밑에는 촛불과 향을 피웠던 그릇들이 있다. 당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 주민들만 아니라 아마도 무속인들도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 것인지. 소나무 가지와 금줄에 오색천에 걸려있다. 당집을 찬찬히 돌아본 후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 한 자락 이곳에 내려놓고 가고 싶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는 당동마을 당산이다. 그 안에 마음 하나두고 빗길을 돌아선다.
벌을 품고 사는 천연기념물, 봉안리 은행나무
전남 담양군 무정면 면소재지에서 무정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안으로 들어가면 봉안리 슬지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높이가 33m 에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마을 가운데 서 있다. 봉안리 1043~3번지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82호이다.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로 명명된 이 은행나무는, 가슴 높이의 둘레는 8.5m 가 넘는 거대한 나무로, 마을 외곽 네 방위에 있는 느티나무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여겨진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밑 부분에서 2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는데, 작은 줄기는 근원부에서 발생해 생장한 것으로 보이며, 큰 줄기는 지상 2m 부위에서 11개의 줄기로 갈라져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겉모습만으로도 당당한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확장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단히 장엄하게 보인다. 당당한 풍채의 수형을 자랑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철이 되면 나무 밑에 떨어진 은행이 상당량이 쌓인다고 한다. 실제로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은행나무의 주위에는, 지난 해 떨어져 마른 은행열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은행나무 밑 그늘에는 마을 여자 분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사를 하고 은행나무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
“은행나무 밑에 금줄이 쳐져 있네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나요?”
“예,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냅니다.”
“제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당산제라고 하죠. 여긴 추석 때도 행사를 해요. 구경 와요”
“이 나무 죽으면 안된 당께”
나무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마을 분들은 묻는 대로 대답을 해주신다. 이중의 원형단을 쌓아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봉안리 은행나무. 한 분이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큰일이라고 하신다.
“이 나무 이제 죽은 나무에 제사 지내게 생겼어”
“왜요? 나무가 50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왜 죽어요?”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고 사람들이 그래요. 그래서 위에서 무슨 약을 뿌리더라고“
“약이 아니고 나무에 주는 영양제에요.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딴 나무에 비해 잎이 무성히 달리지는 않은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생육상태는 좋은 듯한데, 위편의 은행잎이 충실치 못한 듯도 하다. 아마도 나무가 오랜 고목이 되다보니, 위편 가지에 생육이 조금 부실한가 보다. 나무의 밑동은 뿌리가 땅 위로 솟아날 만큼 세월의 연륜을 느끼는 고목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벌들도 공생하는 신령한 나무
봉안리 은행나무는 신령한 나무로 소문이 나 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한일합병과 8,15 광복, 한국전쟁 등, 나라에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마을 주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상당히 신령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가 있어 마을에 지금까지 도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무를 한 바퀴 돌아가 보니 어디선가 벌들이 날아온다. 가만히 보니 나무줄기가 갈라진 틈에 벌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벌들이 그 틈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은행나무에 벌들이 집을 지었네요.”
“오래되었어요. 꿀이 많을 때는 밖으로 흘러내리기도 하는데”
“한봉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은행나무 당산님이 벌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발들에게 속을 내줄 만큼 속이 넓은 천연기념물. 그래서 오래 묵은 나무는 그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하시는가 보다. 듣는 소리마다 신기하다. 500년 넘는 세월을 봉안리 슬지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 온 은행나무. 부디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마도 마을 주민들의 간절함이 있어. 절대도 별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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