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구 화성 행궁을 비롯한 행궁동 일대는 수원의 중심지로 연간 많은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수원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죠. 이번에는 동시에 큰 행사가 수원행궁 인근에서 한꺼번에 세 가지나 열립니다. 그만큼 팔달구 주민자치위원들의 할 일이 많아졌다고 보아야죠

 

31일 오전, 팔달구 행궁동 행정복지센터 주민자치위원실에서 만난 팔달구 한창석 주민자치위원회장은 이번에 화성행궁 일대에서 동시에 큰 행사가 벌어지기 때문에 팔달구 주민자치위원들이 마음을 합해 행사를 원활히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96일부터 5일간 화성행궁 광장에서는 ‘2018수원한국지역도서전이 열린다. 그와 때를 맞춰 97일부터 3일간은 행궁동 일대에서 2013 생태교통 수원 5주년 기념행사인 생태교통 수원 2013 5주년 리마인드 축제도 열린다.

 

96일에는 팔달구청 청사(수원화성박물관 야외무대) 앞에서 팔달구민들의 축제인 ‘2018 팔달 어울림음악회가 열린다. 모두 화성행궁 일대에서 열리는 이 행사로 인해 화성행궁 광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들 것으로 보인다. 그런 큰 행사를 앞두고 있는 팔달구 한창석 주민자치위원회장을 만나보았다.

 

한창석 팔달구 주민자치위원회장은 올 7월 새롭게 팔달구 주민자치위원회를 맡았다. 주민자치위원회는 각 동 주민자치위원장과 사무국장 등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동을 순회하면서 각 동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벤치마킹하거나 성공리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한 수원시정 홍보와 팔달구정 홍보를 구민들에게 알려준다.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창석 팔달구 주민자치위원회장은 큰 행사를 앞두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연일 대책회의를 열어 모든 행사를 성공리에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올 ‘2018수원한국지역도서전은 인문학도시 수원답게 전국의 도서관련 업무를 보는 사람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다.

 

외지 사람들이 몰려오면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바로 숙소문제입니다. 화성행궁 광장 인근에는 게스트하우스를 포함해 숙박을 할 수 있는 업소가 30여 곳 정도입니다. 벌써 행사기간 중에 공실이 없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이번 행사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원에서 가장 많은 행사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앞으로 숙소문제는 반드시 해결 해야죠

 

한창석 주민자치위원회장은 큰 행사가 많은 행궁동 일원에 숙소가 늘 부족하다면서 앞으로는 가정집에서 민박 등을 할 수 있도록 협약을 체결해 숙소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또한 기존의 숙박업소도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변환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는 것이다.

 

 

불법주차 문제 등도 주민들에게 계도할 것

 

5일 동안 동시에 벌어지는 행사로 인해 행궁광장 및 행궁동 일대의 교통문제가 상당히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창석 회장은 외지에서 수원을 찾아오는 분들도 상당히 많은데 그분들이 차를 이용해 수원을 찾아올 경우 현재도 포화상채인 주차공간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면서 다양한 주차문제 해결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한다.

 

우선은 화성행궁 주차장도 공사 중이기 때문에 협소합니다. 행궁 인근에 주차장이 남문시장에 팔달주차타워와 화성 연무대 주차장, 팔달구청 주차장, 그리고 뒤편 공터 등을 이용할 수 있지만 턱 없이 부족하죠. 그런 부족한 주차 공간 확보를 위해 지역 내 종교시설의 주차공간과 학교운동장 등을 확보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주민들이나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의 상인들이 주차공간이 부족해 도로 양편이나 인도에 주차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면서 행정부서와 함께 계도를 통해 그런 불법주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주차문제로 인해 수원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2013 생태교통 수원리마인드 축제로 행궁동 알려야

 

수원은 2013년 행궁동 일원에서 차 없는 거리‘2013 생태교통 수원20139월 한 달 동안 개최했다. 행사기간 중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든 행궁동은 그 이후 생태교통마을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생태교통도시 행궁동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2013'생태교통 수원 2013'으로 명명된 생태교통 시범사업은 CLEI(자치단체 국제환경협의회) 및 유엔 HABITAT(인간주거계획) 등과 함께 20139월 한 달 동안 행궁동 일원에서 주민들이 자가용 이용을 자제하고, 자전거 등 무동력, 친환경 동력수단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생활하는 과정을 기록하기 위한 축제였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미래 생태교통도시 재현을 통해 기후변화와 연료의 고갈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한 새로운 교통부문의 대안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된 축제였다. 올해 생태교통 수원2013’5주년을 맞게 된 것이다. 이번 행사기간 중 행궁동은 차 없는 거리를 운영하면서 다시 한 번 각종 다양한 탈거리 등을 선보여, 앞으로 무동력 친환경 동력수단의 이용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9월 초 수원의 큰 행사를 앞두고 있는 팔달구 행궁동 일원. 한창석 팔달구 주민자치위원회장은 요즈음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성공리에 행사를 마칠 수 있을까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주민자치위원들과 수원시민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성공한다는 한 회장은 모든 행사를 성공리에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젊은 춤꾼 이아란

 

난 춤에 대한 문외한이다. 하지만 수많은 춤을 보고 춤꾼을 보아오면서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춤은 인간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다양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무대를 보면서 하나도 같지 않은 표정과 동작을 보면서 춤꾼들의 예술세계는 무한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춤을 보아오면서 가졌던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인간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예술종목은 바로 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같은 스승에게서 똑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똑같은 동작을 배웠는데 춤꾼들의 표현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장소, 환경, 날씨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받아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예술은 춤이란 생각이다. 지난 21, 수원미술전시관에서 열렸던 ‘2018수원화성을 가다개막식 때 숲속을 나서 전시공간까지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온 젊은 춤꾼 이아란(, 25). 당시 그 젊은 춤꾼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깊이 있는 춤을 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춤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춤과 깊이 있는 춤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우리 전통춤은 그렇다. 아름다운 춤은 열심히 춤을 배운 사람은 출 수 있다. 하지만 깊이 있는 춤은 나이에 관계없이 자기고뇌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은 표현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하기에 난 아름다운 춤보다 깊이 있는 춤을 좋아한다.

 

 

우리 춤을 출 수 있어야 하기에 선택한 진로

 

우리 춤을 추는 사람들은 자연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예전 선생님들의 춤을 보면서 참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선생님들의 춤을 보면서 춤과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깊이 있는 춤은 자연을 닮았고, 그 자연과 같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아란의 춤을 보면서 참 자연스럽다라고 내가 생각한 것은 아름다운 춤이 아니라 자연과 동화된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춤을 시작한 이아란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수원으로 건너와 수원의 춤꾼 장정희 선생에게서 춤을 배웠다고 한다. 한양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이아란은 그동안 많은 공연을 하면서 자기 나름의 실력을 키웠다. 그런 이아란이 고민을 시작한 것은 바로 진로 때문이다.

 

“2017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과를 들어갔어요. 춤을 추면서 생활을 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우리사회기 때문이죠. 앞으로 살아갈 길을 고민하다가 교원자격증을 따야하기 때문에 체육교육학과를 선택하게 됐어요. 우선은 안정적인 생활을 해야 내가 좋아하는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죠

 

듣고 보면 아픔이 있는 대답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생활의 안정이다. 몇몇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남들 앞에서 춤을 추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좋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이아란. 젊은 춤꾼이 넘어서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사회의 벽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런 고민을 했기 때문에 이아란의 춤에서 깊이가 보였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 춤을 추겠다는 이아란

 

전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것이 좋아요. 지금도 춤은 계속 추고 있어요. 선생님의 공연 때 춤을 추죠.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열리는 토요상설공연 등에서 춤을 추고 있어요

 

어찌 보면 춤을 추어야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번 ‘2018수원화성을 가다에서도 자신이 춤을 출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는데, 출연을 할 선생님이 팔을 다치는 바람에 대신 춤을 추게 되었다고 한다. 춤이 좋아 춤을 추고 남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아란의 염원이 그런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니었을까?

 

24일 대담을 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젊은 춤꾼 이아란. 자신이 하고 싶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아란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대한 정책이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문화는 우리가 지켜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다. 사람이 사후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다. 더구나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본인에게도 영광이지만 자손들에게 더욱 영광스런 일이다.

 

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광스런 인물로 추증될 수 있다는 것만큼 값진 것은 없다. 후대의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들의 생전에 살아간 삶을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되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삶이겠는가? 14, 그런 값진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는 행사가 수원시청 대강당 및 본관 입구에서 열렸다,

 

수원시는 수원시청 본관 로비에 명예의 전당을 설치하고 수원시의 명예를 높인 인물들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 헌액식14일 오후 열었다. 명예의 전당에는 모두 8명의 인물이 헌액되었으며, 이들은 2017717일 수원시 명예의 전당 설치 및 운영 조례를 제정하고 2017821일부터 1025일까지 헌정대상 후보자를 접수하였다.

 

2017121일부터 2018125일까지 헌정대상 후보자 자료 수집을 하였으며, 201839일부터 430일까지 선정위원회 구성 및 심의를 하였다. 2018430일에는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를 확정하여 총 8명의 인원을 헌정하였다. 이들 8명의 자랑스러운 수원의 인물들은 수원시청 본관 로비 벽면에 그 이름을 올렸다.

 

 

독립운동가 김세환,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등 헌액

 

14알 오후 수원시청 별관 2층 대강당에서 수원을 빛내다. 명예를 높이다라는 수원 명예의 전당 헌액식은 염태영 수원시장 맟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 경기도의회 의원 및 수원시의회 의원, 임면수 선생의 손자, 최종건 전 SK회장의 아들인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이종학 선생의 처와 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위안부 기림일인 14일은 조국의 광복절 하루 전날이다. 우리는 이날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은 우리 수원지역의 인물들을 기억하는 날로 훌륭한 족적을 남긴 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날이다. 수원시는 오늘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매년 한두 명이라도 수원을 빛낸 인물을 찾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 할 것이다리고 했다.

 

염태영 시장은 오늘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은 수원의 명예를 드높인, 공적으로 귀감이 되는 인물들이라며 명예의 전당은 우리 시민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후손들에게 조상들에 대한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들은 우리 수원의 모든 이들이 이분들을 기억해야 하고 앞으로도 우리 후손들이 이들의 행적을 살펴 본받아야 될 것이라고 했다.

 

 

수원시청 로비 벽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헌액식을 마친 후에는 일행은 로비 명예의 전당으로 자리를 옮겨 제막행사를 열었다, 벽면에 헌액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 중 한 사람은 수원 남수동 출신 독립운동가 김세환(1888~1945)으로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디. ‘수원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이선경(1902~1921)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8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석방된 지 9일 만에 순국했다.

 

임면수(1874~1930) 선생은 수원지역 대표적 근대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삼일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항일투쟁에 나섰다. 김향화(1897~?)는 수원 지역 기생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수원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선경은 얼굴조차 남기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갔으며, 기생으로 독립운동을 한 김향화는 그녀의 죽음을 알지도 못한 체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1927~2002)은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수원화성 및 독도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관련 자료를 수원시와 독도박물관에 기증했다. SK 그룹 창업주인 최종건(1926~1973) 전 회장과 그의 동생 최종현(1929~1998) 전 회장은 수원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선경도서관 등을 지여 수원의 동량을 키워내는데 최선을 다했다. 안점순(1928~2018) 할머니는 14살 되던 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3년여 동안 끔찍한 고통을 겪었으며, 수원평화나비와 함께하며 평화활동가로 활동했다.

 

 

비록 현재는 8명의 인물만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 외에도 수원을 빛낸 인물들은 부지기수이다. 이들을 찾아 내 앞으로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자랑스러운 수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이란 생각한다. 앞으로 수십, 수백 명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명예에 전당에 그 이름을 올리기를 기대한다.

 

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를 돌아보다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에서 열린 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 인간 나혜석 세상 밖으로 나오다’. 행궁동(동장 손화종) 주민자치회(회장 한창석)와 나혜석 생가터 문화에술제 운영위원회(위원장 조이화)76일부터 3일간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 일원에서 열렸다.

 

생가터 앞 도로에 무대를 설치하고 열린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는 그동안 10회를 맞이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날 생가터 예술제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 한상율 팔달구청장, 박흥식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및 경기도의회 의원과 수원시의회 의원 등 300여명의 관객들이 함께했다.

 

개막식 행사는 박경현 무용단의 식전공연 하늘소리를 시작으로 개막선언, 내빈소개, 감사패 전달, 나혜석 연보낭송, 개막사, 염태영 수원시장 및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의 축사, 유선 시인의 헌시 등으로 이어졌고, 본 공연에서는 수원재현배우학교의 정월 나혜석연극, 김승란의 빈센트 등 노래, 수원시인협회(회장 박명두)의 제3회 나혜석 문학상 시상식, 금빛 합창단의 합창 순으로 진행됐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에술제는 다양한 행사가 곳곳에서 열려 행궁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생가터와 화령전, 행궁동 일원에서 열리는 행사는 한 달 동안 상설운영 프로그램이 열린다. 나혜석 문화예술제 10년 아카이브 역사전, 나혜석 10년 미술전, 나혜석 골목전 등이 나혜석 자료관과 행궁동 거리에서 열려 나혜석 생가터를 찾아 온 관람객들과 만났다.

 

 

독립운동을 한 나혜석을 기리는 작업 이어가야

 

정월 나혜석은 198641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의 작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화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아명은 나아지, 나명순이며 아호는 정월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했다.

 

경성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1931, 3,1만세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 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여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1927년에는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유럽여행을 한 여성이 되었다.

 

19232월 동명지에 첫 딸을 출산한 나혜석은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행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기고한 바 있다. 그녀는 출산과 자녀양육을 감동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녀에 대한 맹목적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어미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여기서 나혜석은 스스로 나는 할 일이 많다. 이제야 예술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나는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라는 말을 통해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아들이나 딸이나 평등으로 사랑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건이 생기도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여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優者),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왠일인가. 이 사실을 보아서는 그들의 소위 솟는 정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1922429일 큰딸 김나열의 1년 생일에 나혜석이 쓴 감상기 중 일부이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표현을 하기도 했다.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 같이 말하나, 스스로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의 의식을 바꾼 선각자 나혜석

 

우리 조선여자를 위하여 일심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매주 3일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열성으로 지도하여 입학지원자가 날로 많다더라’ 19223월경 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이다.

 

1922년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전보되자 나혜석은 그를 따라갔다. 안동현으로 남편 김우영을 따라간 나혜석은 1922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泰誠醫院) 내에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는 한편,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또한 의열단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약 6년간 안동에 정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인사회를 보듬으면서 화가로서의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나혜석은 안동의 생활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사회상으로 사업을 해본데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와본대도 여기요. 인심에 대한 짠맛 단맛을 본대도 여기요.”라고. 나혜석은 6년여 동안 안동에 거주하면서 여성의 몸으로 신교육사업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다.

 

사람들은 나혜석을 불륜녀, 혹은 이혼녀등으로 치부한다. 나혜석이 한 말 중 "정조는 취미다""자식은 악마다." 혹은 "결혼은 지옥이다" 라는 등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완전히 소외된다. 그렇게 신여성으로 살아가던 나혜석은 말년에 들어 인간들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니혜석에 관한 각종 자료를 보면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했고 여성들의 의식변화를 위해 노력했는가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를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개심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예산 수덕여관과 나혜석

 

예산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기거하던 이응로 화백은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이 수덕여관은 수원출신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수덕사 경내가 아닌 이 수덕여관에서 묵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수덕여관이야말로 우리 미술사에 남녀 거장이 묵었던 곳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곳이다

 

정월 나혜석, 우리는 그녀를 흔히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나혜석의 생전 당시 그 어느 누구도 나혜석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여류화가요, 시인이다. 또한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창한 신여성이기도 하다. 19481210일 당시 나이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을 기리는 나혜석 생가 신축 필요하다

 

삶이 고단해지자 출가할 뜻을 가졌던 나헤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돌다가 반신불수로 양로원 등지를 떠돌았다. 나혜석은 194612월 눈보라치던 날, 거리에서 한 행인에게 발견되어 시립자제원(지금의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분류된 채 생을 마감한다. 관보에는 그의 사망 연월일이 19491210일로 되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나혜석이 사망시기가 1946, 1948년 등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의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라는 시이다. 하지만 나혜석은 꽃 한 송이 자녀들에게 받지 못한 체 그가 어디 묻혀있는지조차 알 길 없다. 행궁동 나혜석 문화예술제 개막식장에서 만난 행궁동 주민자치회 한창석 회장은 나혜석을 기릴 수 있는 생가가 복원돼야 합니다. 생가터 주변 건물을 매입해서라도 나혜석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해야죠. 그리고 나혜석 거리도 행궁동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현재 인계동에 소재한 나혜석 거리로 인해 나혜석에 관한 올바른 평가를 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저희는 늘 나혜석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나혜석 생가터 비가 있는 골목을 막고 행사를 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나혜석 생가터라고 소개를 해도 엉뚱한 인계동 나혜석 거리를 찾아가기도 해요. 그래서 주민들이 불편을 느끼지만 생가터 앞에서 행사를 갖는 것이죠.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재대로 알릴 수 있으니까요

 

장맛비가 연일 계속되다가 모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난 지난 3일 오전. 팔달구 행궁동 문학인의 집 2층에 자리하고 있는 나혜석 기념자료관에서 만난 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조이화 운영위원장은, “정월 나혜석이라는 인간에 대해 새삼 많은 것을 느낀다고 하면서 그동안 정월 나혜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일부에서는 이혼녀 등으로 폄하까지 하는 등 우리 수원을 대표하는 신여성이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헸다며 안타까워했다.

 

여성의 선구자라고 하는 정월 나혜석.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혜석은 이 시대에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8, 인간으로써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나혜석.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 니혜석을 만날 수 있는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를 찾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정월 나혜석을 만나보길 원한다.

특별취재.  수원복지신문 하주성, 한미연 기자

 

(대담)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조이화 운영위원장

 

저는 정월 나혜석을 단순히 선구자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화가요 시인인 나혜석에 대해 제7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하면서 좀 더 알게 된 것이죠. 그동안 제가 느낀 것은 정월 나혜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원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장맛비가 연일 계속되다가 모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난 3일 오전. 팔달구 행궁동 문학인의 집 2층에 자리하고 있는 나혜석 기념자료관에서 만난 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조이화 운영위원장은, 6일에 열리는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개막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일정을 소화시키면서도 나혜석에 대한 견해를 찬찬히 소개해 준다.

 

올해 10회 째 맞는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동안 처음으로 여성이 운영위원장을 맡게 된 조이화 위원장은 보수적인 행궁동에서 여성이 문화예술제 위원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동안 운영위원장은 남성들이 맡아왔으며 모두 1년으로 임기를 정해 매년 딴 사람이 운영위원장의 직임을 맡아 사업의 연관성이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보았던 조이와 운영위원장은 정월 나혜석이라는 인간에 대해 새삼 많은 것을 느낀다고 하면서 그동안 정월 나혜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일부에서는 이혼녀 등으로 폄하까지 하는 등 우리 수원을 대표하는 신여성이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헸다며 안타까워했다.

 

 

나혜석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돼야

 

7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인간 나혜석 세상 밖으로 나오다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는 그동안 신여성으로 여성 최초로 일본유학을 하고 불란서 등을 여행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던 정월 나혜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행궁동 지역주민들과 운영위원회가 하나가 되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저희는 늘 나혜석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나혜석 생가터 비가 있는 골목을 막고 행사를 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나혜석 생가터라고 소개를 해도 엉뚱한 인계동 나혜석 거리를 찾아가기도 해요. 그래서 주민들이 불편을 느끼지만 생가터 앞에서 행사를 갖는 것이죠.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재대로 알릴 수 있으니까요

 

정월 나혜석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 팔달구 신풍동 45번지)에서 출생했다. 나혜석이 태어난 자리에는 나혜석 생가터라는 비가 서 있고, 주변엔 꽃과 담을 조성했다. 이런 모든 나혜석에 관한 준비를 한 것도 기관이 아닌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조성해서 마련했다고 한다.

 

 

문화예술제 10년 째, 나혜석 세상 밖으로 나오려나?

 

그동안 저희 나혜석 기념자료관에는 나혜석 관련 그림 18점과 주민들이 만든 작품, 나혜석 관련 사진, 나혜석 관련 서적과 행사를 통해 얻은 결과물 등을 비축하고 있어요. 아직은 미비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주민들이 이제는 나혜석에 관한 의식이 바뀌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인 것 같아요

 

조이화 운영위윈장은 예전에 비해 주민들이 나혜석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하고 있다면서 이제는 직접 주민들이 나서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에 참여를 하고 있다고 한다. 10회를 맞이하면서 주민들의 의식이 바뀌고 정월 나혜석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나혜석에 대해 올바른 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조 위원장의 생각이다.

 

, 한 가지 지금도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나혜석 거리기 정작 나혜석과는 관계없는 인계동에 있기 때문에, 자칫 나혜석에 대한 오류를 심어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나혜석 거리는 당연히 나혜석이 태어난 행궁동 생가터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혜석의 삶을 이제는 제대로 평가받게 해야 한다는 조 위원장. 올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제는 나혜석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생가터 문화예술제 위원회의 사명이라고 한다. 앞으로 모든 행사는 따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나혜석이 태어난 날을 기해 골목미술전과 나혜석문학상 시상, 그리고 문화예술제를 함께 열어 나혜석 조명에 극대화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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