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북면 문곡리 산3번지 일대에는 천연기념물 제413영월 문곡리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있다. 영월군 문곡리 연덕천 가 절벽에 있는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약 45억 년 전에 생긴, 오르도비스기 하부고생대 지층에 형성되어 있다.

 

지구는 생성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멸종을 겪어왔다. 지구가 멸종할 때마다 생명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면, 자연은 놀라운 치유력으로 그 멸종을 막아냈다. 그 첫 번째의 대멸종이 바로 오르도비스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천 만 년 전에 고생대 대멸종인 오르도비스기가 있었는데, 오르도비스기는 48830만 년 전 캄브리아기 멸종으로 시작해 4460만년 동안 계속되었다.

 

 

오르도비스기는 지질 시대의 하나로, 고생대의 캄브리아기 이후 실루리아기 이전의 시대로 약 44천만 년 전부터 5억 년 전이다. ‘오르도비스(Ordovice)’의 음역어는 오도(奧陶)’이다.

 

희귀한 지질구조인 건열구조

 

영월군 문곡리 연덕천 변 절벽에 있는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는, 4~ 5억 년 전에 생긴 오르도비스기 하부고생대 지층에 형성되어 있는데, 당시의 퇴적환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학술적 보존가치가 매우 높아, 이를 보존하기 위해 이 일대 205,091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건열구조란 얕은 물 밑에 쌓인 퇴적물이 물 위로 나와 퇴적물이 마를 때, 퇴적물이 줄어들거나 오그라들면서 생긴 틈이 그대로 굳어져 형성된 지질구조이다. 이는 이 지역이 과거에 물 밑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학술자료가 된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는 이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생물 중 하나인 단세포 원시 미생물(남조류) 위에, 작은 퇴적물 입자들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퇴적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선캠브리아기(7억년~10억 년 전)와 중생대 백악기(1억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되고 있는 희귀한 지질자료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금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계속 생성되고 있는데, 특히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샤크베이에서 많이 자라고 있다. 이들 구조가 발견된 암석은 돌로마이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돌로마이트 내에는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형성된 증발암 광물인 석고 결정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퇴적층은 현재 서해안의 조간대와는 매우 다르다. 이 퇴적층의 형태는 저위도(적도근처) 지역에서 매우 건조한 기후의 영향을 받으며 퇴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연기념물은 과연 보존이 잘 되고 있을까? 천연기념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천연기념물은 「자연 가운데 학술적, 자연사적, 지리학적으로 중요하거나 그것이 가진 희귀성, 고유성, 심미성 때문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여 법률로 규정한 개체. 창조물이나 특이 현상 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 구역(다음 백과사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식물종류는 과연 잘 자라고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난 천연기념물들. 물론 대개의 천연기념물은 관리도 잘되고 생육상태도 좋았다.

 


 

하지만 그 중에는 관리소홀로 인해 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천연기념물 중에서 울안에 있거나 마을의 신목(神木) 등으로 위하는 나무, 그리고 거목 등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인가가 없는 곳에 외따로 서 있거나, 작은 나무 종류들은 손쉽게 해를 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의 관리, 보존에 문제점이 있지나 않은 것인지 의아스럽다. 
 

독극물에 의해 고사위기에 처했던 곰솔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 소재하는 천연기념물 제355호 곰솔. 이 곰솔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독극물 투여 등으로 고사위기에 처했었다. 2001년 여름 누군가가 나무 밑 부분에 독극물을 투입해, 전체 가지 16개 중 12개가 말라 죽었다. 관계당국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2005년 6월, 말라죽은 가지들을 모두 잘라내고 회생 가능성이 있는 4개만 남겨두는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했다.

 

2008년 5월 21일 곰솔을 찾았다. 보기에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전주 삼천동의 곰솔은 수령이 약 250년 정도로 추정한다. 높이 14m, 가슴높이의 둘레 3.92m의 크기이다. 이 곰솔은 인동 장씨의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전해진다. 답사 당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 곰솔이 자라는 땅이 개인 토지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자 재산 행사를 할 수 없어 이렇게 한 것 같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 땅을 매입해 관리를 하고 있다.

 

외과 수술로 잘라진 부분이 흉물스럽다. 천연기념물의 관리소홀이 빚은 산물이다.

 

잘라진 가지들이 애처롭게 보이는 삼천동 곰솔. 처음부터 땅을 매입한 후 지정을 했다면 아마 이런 아픔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 없이 고사했다는 강릉 삼산리의 소나무, 석연치 않아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50호 삼산리 소나무. 공식적으로 고사판정을 내린 후, 2008년 11월 29일에 유일하게 나무를 위한 천도제를 거행해 유명세를 탄 나무다. 수령 450여년으로 추정되는 삼산리 소나무는 키 21m에 가슴높이 둘레가 3.59m로 1988년 천연기념물 제350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 소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목으로 섬기며 나무 주변에 돌담을 쌓아 정성껏 모셔왔다. 그러나 2006년부터 나뭇잎이 누렇게 마르는 등 고사 위기를 맞아 백방으로 보호를 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고사를 하고 말았다.

 

  
수령 450년이던 이 소나무는 고사가 되었다

삼산리 소나무에 걸린 저 줄은 무엇일까? 그냥 오르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걸려있었다. 몇 가닥으로 늘어진 줄은 무슨 용도였을까?

 

 

2008년 9월 4일 삼산리 소나무는 이미 고사가 되어있었다. 강릉시 관계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수명이 다한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나무의 수령은 일반적으로 600년 정도이다. 삼산리 소나무의 수령은 450년 정도다. 그렇다면 수명이 다해 고사를 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나무를 조사하다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나뭇가지에 걸린 줄이다. 꽤 높은 가지에 줄이 걸려있는데, 그 줄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그 줄이 마음에 걸린다. 수명이 다해 고사한 것이 아닌, 또 다른 해는 없었던 것일까?

 

작은 나무들은 불법 채취해가기도

 

2008년 7월 4일,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7호 가침박달나무 군락지와, 제388호 산개나리 군락지를 찾아 나섰다. 아무리 설명을 따라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식견이 모자라 찾을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할 수 없이 임실군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가 나와 알려주었다. 그 자리에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붙여놓았으면 찾기가 수월했을 것이란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면 불법 채취가 심해 일부러 사진을 안내판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7호 가침박달나무

1914년 처음으로 발견이 되었으며 변종이 없다고 한다.

 

천연기념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아래쪽으로는 사선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란다. 그런데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나무들이 작다 보니, 불법으로 채취를 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에 관리자를 배치하기도 어렵고, 보호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다는 이야기다.

 

천연기념물 제388호 산개나리. 불법 채취가 있다고 한다.

 

세 곳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의 천연기념물은 과연 온전히 보존이 되고 있을까 의아스럽다. 오늘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검색하다가 보니, 국민광장 국민의 소리 게시판에 제주도에 사시는 분이 자신의 땅 등 주변을 천연기념물로 고지한 것에 대해 땅 주인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지를 했다고 항의성 글을 올렸다. 나중에 보니 관리자에 의해 삭제가 됐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좀 심한 말을 쓰기는 했지만 천연기념물 지정 고지에 문제는 없는 것인지. 그런 문제 하나하나가 보존에 문제가 된다면, 민원인의 글을 지울 것이 아니라 성실한 답변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중한 우리의 자산인 천연기념물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도록, 관계당국에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이 된 파장동 노송지대.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이곳이 요즈음 더럽혀진 주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전국 파워소셜러 팸투어 둘째 날에 지난 317일에 찾아간 노송지대에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효행기념관 부근 9, 삼풍가든 부근 21, 송정초등학교 부근 8)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이 자연경관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노송지대 주변 정비 아쉬워

 

이번 파워소셜러 팸투어에 찾아간 노송지대 주변은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주변이 어수선 해 이곳이 문화재 지역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문화재는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소나무 길 사이로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소나무의 생육에도 지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는 매연에는 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차량. 그리고 정리가 안 된 주변 환경. 정조대왕의 효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낯이 뜨겁다. 500주나 심었다는 소나무는, 당시에 심은 것들은 이제 겨우 40주 정도이다. 남은 소나무는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지금도 몇 그루의 나무는 생육이 좋은 편이 아니다. 파워소셜러들은 이구동성을 이야기들을 한다. 이곳의 차도를 변경하고 아스팔트를 걷어낸 후, 흙길로 조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소나무 주변에 모든 잡목을 옮겨, 소나무들을 온전히 괸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 가을 막걸리라도 부어 주어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에 소재한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훨씬 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처진소나무는 매년 봄, 가을에 운문사의 스님들이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리 주변에 뿌려준다. 그래서인가 항상 푸른빛을 띠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파장동 노송지대에 소재한 소나무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려줄 수 있는 귀한 나무들이다. 이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수원도 봄, 가을로 소나무에게 막걸리를 주는 날을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영양분을 빼앗겨버려, 제대로 생육하지 못하고 있는 노송지대의 소나무들.

 

 

더 이상 이 나무들이 주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5월과 10월 날을 정해, 믹걸리를 주는 날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런 행사 하나로도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이 더 잘 자라날 수 있으며, 이 행사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지대를 알릴 수도 있어, 모두에게 나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의녀 주논개가 심었다고도 하고, 남편인 최경희가 심었다고도 전하는 소나무. 수령은 약 500년 정도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397호인 징수 의암송(義岩松)’은 전북 장수군청 청사 입구 앞에 자리하고 있다. 42일 장수군을 답사하면서 가장 먼저 달려가 보고 싶은 곳은, 바로 의암송이 자리하고 있다는 장수군청이었다.

 

장수군청 청사 현관 앞에 서 있는 의암송. 15936, 임진왜란 때 남편인 최경희를 따라 진주로 간 논개. 왜군과의 전투에서 최경희와 7만 민관군이 모두 전사를 하자, 기녀로 신분을 속이고 왜장들의 승전연에 참석을 한다. 그곳에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장수의 상징인 의암송

 

이 때 논개가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진 곳을 의암(義岩)’이라 부르는데, 그 이름을 따서 의암송이라고 부른다. 이 의암송은 1,500년 후반쯤에 장수현감이던 최경희가 심었다고도 하고, 논개가 심었다고도 한다. 누가 심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 얽힌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이 나무를 장수군민들은 장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나무에는 논개의 의로운 정기가 깃들어 있다고 하며, 논개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기에 장수군민들은 이 나무를 신성시한다. 현재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옛날 장수현의 관아였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의암송을 논개가 심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주논개를 기리는 뜻에서 의암송이라고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무엇이라 할 수가 없다.

 

용트림을 하는 의암송

 

장수군청으로 마음 급하게 찾아갔다. 현관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천연기념물인 의암송. 아래서 한 줄기가 올라오면서 지상으로부터 2m 정도에서 두 갈래가 갈라진다. 줄기는 시계방향으로 뒤틀어져 나선형을 이루고 있다.

 

 

나무의 전체 높이는 그리 높지가 않다. 9m 정도의 높이에 가슴 높이의 둘레는 3.2m 정도이다. 두개의 큰 가지가 남북 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는데, 북쪽가지의 직경은 80이고 남쪽가지의 직경은 50정도이다. 그 위로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마치 우산형과 같은 수관을 이루고 있다.

 

장수군의 사람들은 이 나무를 굳이 주논개가 1592년에 심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이 나무로 논개의 의로움을 상징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이 의암송이 더욱 당당해 보인다.

 

 

의암송은 마치 승천하려는 용과 같은 형태이다. 연륜이 지나 껍질은 갈라지고, 한편에는 사람 머리만한 옹이도 보인다. 줄기는 뒤틀어진 모습이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자라났을까?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을 한다. 연신 속으로 멋지다라는 말만 해댄다. 정말로 그 안에 알지 못하는 기운이 가득한 것만 같다.

 

한 가지는 청사 쪽으로 바라고, 또 한 가지는 중간에서 방향을 바꾸어 구부러졌다. 곡예를 하듯 자라고 있는 장수 의암송. 아마도 저 두 가지에 주논개와 남편 최경희의 마음을 담아 낸 것은 아니었을까? 의암송 곁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소나무의 줄기가 흰색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백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한 나무가 아니다.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지정 해제된 백송들

 

흔치 않은 나무인 백송이 그나마 살아있는 곳도 많지가 않다. 예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던 나무들이 고사를 했거나, 지정 해제를 당했기 때문이다.

 

1990년 7월. 태풍으로 안해 쓰러진 통의동 백송.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었다(인터넷 검색)

 

천연기념물 제4호였던 서울 통의동 백송은 서울 통의동의 백송은 1993년 3월 24일 바람에 쓰러져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1990년 7월 17일 폭우를 동반한 돌풍에 쓰러져 줄기가 부러져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 7월 19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려 했지만, 청와대에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였으나,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해 5월 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갔다.

 

 

이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의 백송은 1965년 10월 15일 고사로 인해 지정 해제가 되었으며, 2003년 7월 4일 지정 해제가 된 원효로의 백송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었던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6호였다.

 

이 외에도 고사나 보존가치를 상실해 지정 해제가 된 천연기념물 재7호였던 서울 회현동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6호였던 경남밀양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04호였던 충북 보은의 백송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81호였던 개성리의 백송은 미수복 지역에 있어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90호이기도 하다.

 

 

조계사 대웅전 앞 백송

 

현재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하고 있는 조계사 대웅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수송동 백송이 자리하고 있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백송은 높이가 14m 정도이며,밑동부분의 둘레는 1.85m 정도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원줄기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한편으로 길게 위로 올라가면서 나 있다.

 

백송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송동의 백송은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가 나무 옆에는 차들이 주차를 하고 있어, 매연으로 인한 생육에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 밖에는 안된다는 백송. 수송동의 백송은 생육의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에 얼마나 더 오래 살아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 부터라도 백송 근처에 차량을 대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연기념물이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생물학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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