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80에, 70년을 못골에서 살았지” 못골 경로당 신현구 회장

 

“내 나이 올해 80이야. 지금 생각하면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꿈만 같지. 그래도 아이들 잘 키워서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해서 실림을 났으니, 이제는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야”

 

11월 16일(금) 지동 못골경로당에서 만난 신현구 옹은 못골노인회의 회장님이시다. 마침 못골경로당을 찾았을 때는 방안에 어르신들이 30여명이나 계셨다. 일주일에 4번 정도 점심을 노인장에서 함께 드시는데, 이날이 점심에 국수를 드시는 날이라고 한다. 신문사에서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서, 신현구 회장님께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신이 아니라도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화성 태안에서 지동으로 이사를 오신 것은 벌써 70년이나 되셨단다. 지동의 한 맺힌 역사를 세월과 함께 지켜보신 분이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화성과 못골

 

“아버님이 경찰관이셨지. 그래서 아버님이 전근을 갈 때마다 이사를 하고는 했는데, 화성태안에서 수원으로 발령이 나시는 바람에 못골로 이사를 왔지. 70년 전에는 이 동네 아이들도 모두 신풍초등학교에 다녔어. 나도 그 학교를 38회로 졸업을 했거든. 그 때는 아이들과 어울려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작대기를 들고 하는 병정놀이였어. 지금 제일교회 자리와 화성이 우리 놀이터였지. 그리고 저편에 연못도 그대로였고. 당시는 이곳이 다 논이었던 곳이야. 드문드문 논을 매워 지은 초가집이 한 채씩 있었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신현구 회장은 잠시 눈을 감는다. 아마도 그 당시를 회상하시는 듯하다. 신풍초등학교를 나와 수원중학교를 들어갔지만, 3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경찰관이던 부친은 한국동란 때 그만 적에게 학살을 당하셨단다.

 

“아버님이 빨갱이들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신 후, 집이 풍비박산이 난거여. 갑자기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니겠어. 할 수 없이 태안으로가 농사를 짓다가 다시 돌아왔지. 그리고 나서 지금 살고 있는 지동 366-3번지에 국수공장을 차렸어”

 

당시는 배급이 밀가루로 나와, 처음에는 그 포대를 가져다가 검게 염색을 해서 옷의 안감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수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고. 처음 국수공장을 차렸을 때는 손으로 일일이 기계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면서 분식 장려를 했잖아. 새벽 3시부터 집사람과 함께 일어나 하루 종일 국수를 만들어야 했어. 회사에 국수며 칼국수를 생산해 납품을 하면서 생활이 조금 나아졌지. 국수공장을 하면서 번 돈으로 아이들 대학까지 다 졸업을 시켰으니까, 꽤 질 번 것이지.”

 

그렇게 직원도 없이 두 내외분이 새벽 3시부터 일어나 국수를 생산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험하게 살아오신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잠시 말씀을 멈추신다. 지금 사람들이야 어찌 당시를 가늠이나 할 것인가? 80년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그래도 자녀들을 잘 가르친 것이 큰 재산이라고.

 

모범경로당을 만들고 싶어

 

지난해에 못골경로당 회장으로 피선이 되시고 난 뒤, 못골 경로당 십계명을 만드셨다. 1. 모범 못골 경로당이 되자. 2.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3. 즐겁게 기쁘게 살자. 4. 회원끼리 미워하지 말자. 5. 회원끼리 욕하지 말자. 6. 항상 웃음으로 지내자. 7. 회원끼리 단결하고 뭉치자. 8. 회원끼리 다트지 말자. 9. 건강검진을 2년에 한 번씩 하자. 10. 99, 88, 2, 3, 4 용어가 있다.

 

그런데 10번은 그냥 십계명이라고 하기 보다는, 어르신들의 인생을 마감할 때를 숫자로 표시를 해 놓으셨다. 그것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 ~ 3일 아프다가, 4일 후에 영원한 고향으로 가자’라고 적어 놓으셨다.

 

신현구 옹이 경로당의 회장 소임을 맡은 뒤로, 못골경로당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심심하면 다투고는 하시던 어르신들이 다투는 것이 없어졌다고. 또 매달 1일에는 전 회원이 경로당 주변 청소를 해서,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도 한단다. 경로당 운영도 민주적이라고 한다. 매달 27일에는 정기월례회를 가져 50명 회원들의 의사를 반영시키기도 한다는 것.

 

“우리 못골경로당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에 꼭 모범경로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 처음에는 회원이 30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회원이 50명이 넘어. 그리고 회비도 한 달에 3,000원씩 걷어서 필요한 곳에 사용을 하고 있지. 이젠 모범경로당 지정을 받아도 될 만큼 많이 변했어.”

 

점심을 먹고 가라고 굳이 손을 잡아 이끄시는 것을 마다하고 경로당을 떠났다. 다음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시는 어르신들. 십계명의 10번처럼 그렇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T-station 수원 지동점 윤선희 대표를 만나다

 

“지동으로 이사를 온지 만 2년이 지났어요. 처음에 지동주민센터에 전입을 하러갔는데, 어르신들이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주는 쌀을 받아 가시는 거예요.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생소했다고 느꼈어요. 아직도 저렇게 사시는 분들이 있나 해서요. 저에게는 그런 풍경이 낯도 설었지만 가슴이 많이 아팠거든요”

 

그래서 사업을 열심히 해서 이익이 생기면, 구제와 선교에 사용을 하겠다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478 - 5에 소재한 T-station의 윤선희(여, 46세) 대표의 말이다. 2010년에 수원이란 곳을 처음으로 찾았고, 지금까지 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을 보아왔다고 한다.

 

 

얼떨결에 시작한 사업

 

T-Station은 최고의 장비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타이어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이다. 이곳에서는 기존에 경험하지 못하셨던 무선 휠 얼라이언먼트와, 진동 밸런스 서비스를 비롯한 차량 기본점검 등의 토탈 경정비 서비스를 받을 수가 있다. 이런 자동차 정비 등을 하는 사업체에서, 여성이 대표를 맡아본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결국 이 사업으로 꼭 성공을 하고 싶다는 것이 윤선희 대표의 마음가짐이다.

 

“남들은 이런 정비업체에 사무실에 여자가 있으니까 경리인 줄로만 알아요.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이니 이 사업으로 꼭 성공을 하고 싶어요. 여자라서 안 된다는 관념을 깨고 싶은 것이죠.”

 

전주에서 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윤대표는, 경희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딸 둘과 아들을 두었다. 남편(오문경, 50세. 의왕에서 정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단다)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그저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큰 애가 대학생이고 둘째가 고등학생, 그리고 막내가 초등학생에요. 이제는 다 자랐죠. 그런데 아이들을 키워놓고 보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하데요. 그래서 나도 무엇인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던 중에, 아이들 아빠가 이 사업체를 차리고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뛰어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차량을 정비하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가 보니, 조금은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는 것. 자신이 직접 했으면 더 많은 것을 고객들에게 돌려줄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조금은 불만이라고 한다. 고객중심의 영업을 하고 싶다는 것.

 

지동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

 

“지동으로 옮긴 뒤 화성과 지동 여기저기를 다녀보았어요. 그런데 이 지동이 정말로 정감이 가요. 아마도 어릴 적 전주 한옥마을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곳 지동이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인 듯해요. 화성도 너무 아름답고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영업장 3층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있어서, 출퇴근에 신경을 쓰지 않아 좋다고 하는 윤 대표. 아이들을 키울 때는 ‘이것을 해라’라는 말 보다는, 두 부부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항상 우애 있게 잘 자라고 있어 고맙다고 한다.

 

“저희 시부모님께서 없는 사람들을 늘 도와주고는 하셨어요. 아마 어린 시절 부터 그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저희 남편도 남을 돕는 것을 즐거워하죠. 아이들이 그런 좋은 행동을 보고 자라났기 때문에 착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저 아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죠. 최선을 다하라고요”

 

 

늘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꼭 여성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하는 윤선희 대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아직은 사업이 어렵지만 이익이 창출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남을 위해 베풀고 싶다는 것이다.

 

“이곳 분들은 정말 아파트하고는 달라요. 이웃과 소통이 잘 되고, 담이 없는 듯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서 지동이 더 정감이 가는 듯해요.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사업도 성공하고, 어려운 이웃도 돕고 싶은 것이 제 각오입니다.”

 

이제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2년. 아직은 모르는 것이 더 많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들이 하기 힘들다는 이 사업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올곧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윤선희 대표에게,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참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가 보면 힘들 때도 있고, 가끔은 실패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무슨 이야기꺼리가 있겠느냐고도 묻는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행복이라는 것이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의외로 허름한 집에서 호식(好食)을 할 경우가 생긴다. 생각지도 않고 들어간 집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 날은 괜히 횡재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아직은 세상을 많이 살아보지 못해서라고 늘 위안을 삼는다. 그런 것 하나가 세상살이를 조금은 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화요리 신흥원의 사장님은 바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97 - 21에 소재한 중화요리 신흥원.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촌에 있는 중국집의 외형과 흡사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놀랍다. 벽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다. 이 소리는 곧 메뉴판이 없다는 소리이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훙원의 박기수(남, 50세) 사장은 지동 31통의 통장님이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마을 일도 보아야 한다. 이곳에서 가깝지 않은 시장사람들이 주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낮에 가면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다. 11월 15일 오후 7시가 넘은 시간에 신훙원을 찾았다. 마침 가족들이 모여 있는 시간이다.

 

잠시 대담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30분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배달을 하느라, 겉에 입고 있던 작업복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만큼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타면만 만들기 벌써 30년

 

“중학교를 마치고 집을 나왔어요. 그 때는 무조건 서울이라는 곳을 가야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살기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큰일을 좀 해보고 싶었거든요. 1969년에 집에서 가져 온 얼마 되지 않은 돈을 갖고, 동대문시장에서 가방 장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회 경험도 없는데다가 자금도 부족해 결국 손을 놓고 말았죠.”

 

그길로 군에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대를 한 후 서울의 중국집에 종업원으로 들어가 중화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을 고생을 한 후 30년 전에 수원 지동으로 내려와 중화요리집을 차렸다.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30살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을 했는데,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참 이런 것을 보면 세월이 참 빠른 듯합니다.”

 

잠시 옛 일을 생각하는 듯 사색에 잠긴다. 이 집은 테이블이라고 해야 세 개인가 밖에 없다. 그저 시골의 어느 중국집과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도 단골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도 이집의 수타 자장면 맛이 일품이기 때문인가 보다.

 

“저희 집은 주로 주민들보다 시장상인들이 더 많이 찾습니다. 배달도 시장으로 더 많이 가고요. 지동 벽화를 보러 오셨던 분들이 들렸다가 가시면, 다음에 딴 분들을 모시고 오기도 합니다.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요. 그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죠.”

 

 

통장 일도 자영업이라 할 수 있어

 

영업하랴 마을 일 보랴 바쁘다. 그렇게 쉴 틈도 없이 바쁘다가 보면, 아무래도 건강에도 문제가 있을 것만 같다. 일찍 영업장으로 나와 준비를 하고, 점심시간 전인 11시부터는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시장 상인들은 아무래도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주문을 하면 빠르게 음식배달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타로 자장을 뽑다보니 그도 만만찮다.

 

“자영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체력이 받쳐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하는데 탈이라도 나면 안되죠. 그래서 많이 피곤하면 쉬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은 오후 7시가 되면 마감을 합니다.”

 

박기수 사장은 현재 지동 31통의 통장님이시기도 하다. 31통은 원래 지동 10통이었는데, 인구가 늘어나자 분통을 해 31통이 생겼다. 그리고 벌써 14년 째 통장을 맡아보고 있다.

 

“손님들이 찾아오셔서 옛날 짜장 맛이 난다고 하시죠. 그리고는 또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마다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아들만 둘인데 이제 다 자랐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지동으로 와서 정착을 한지 30년 세월. 그리고 그 숱한 사연을 간직한 체 지동 한 편에 오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신훙원. 그곳에 불이 꺼졌다. 내일 또 신흥원에는 면을 뽑느라 들리는 소리가 정겨울 듯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은 참 재미있는 곳이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이곳은 재미를 쏠쏠하게 느낄 수가 있다. 매일 달라지고 있는 벽화 길도 재미지만. 그것보다 여기저기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선은 골목에 놓인 나무로 만든 화단이 있는가 하면, 담벼락에 붙은 평상이 골목 길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런 지동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지동 292-17번지에, 핑퐁음악다방 1호점이란 간판을 붙인 집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핑퐁’은 ‘탁구’를 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탁구를 치고,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방이라는 곳이다. 옛 기억에 다방이라고 하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담이, 테이블 사이를 날렵하게 돌아다니고는 했던 기억이 먼저이다.

 

 

낮에는 탁구를 즐길 수 있는 다방

 

핑퐁음악다방은 지난 3월 16일에 문을 열었다. 대표인 송주희(여, 32세)가 마을만들기와 사회적기업의 일환으로 문을 연 것이다. 이곳은 저녁에는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시니어바리스타 양성교육을 수료한 어르신들이 직접 내려주시는 핸드드립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처음에 지동과 만나게 된 것은 지동에 있는 화성의 성벽 밑으로 난 굴이 있어요. 그곳을 빠져 나왔는데 정말 옛 기억을 해낼 듯한 동네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빈 집도 많고요. 이란 곳이라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마침 도배를 하는 집을 보고 계약을 해버렸죠. 아마 그게 인연이 된 것 같아요.”

 

 

11월 15일 오후 5시에 찾아간 핑퐁음악다방에는 마침 서울 강동구에서 내려 왔다는 사람들이 송주희대표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들도 사회적기업의 협동 등을 배우러 왔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어르신들도 계셨다. 시니어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주변의 도움으로 낸 핑퐁음악다방

 

“이곳을 들어올 때는 제가 가진 돈 500만원과, 주변에서 도움을 주신 돈 500만원을 합해 문을 열었어요. 이곳은 지동 주민들이 언제나 찾아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죠. 어르신들이 지나가다 들여다보시면 모시고 들어와 차를 대접하고는 합니다. 돈이 없다고 하시면 나중에 달라고 하고요. 그렇게 시작을 한 것이 요즈음엔 어르신들이 여러분을 모시고 오기도 하고요”

 

다방 안은 협소하다. 한 편에 주방을 마련하고 그곳엔 커피를 내리기 위한 도구가 있고, 그 뒤편 작은 책장 안에는 탁구 라켓과 LP판, 그리고 그 옆에는 접이식 탁구대가 자리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기분 좋게 커피향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벽에는 도움을 주신 분들의 이름이 나무명판에 새겨져 걸려있다.

 

 

“저희도 다방이잖아요. 가끔은 벽화 길을 걷던 분들이 들어와 차를 마시고는 하죠. 저희는 커피 한 잔에 3,000원을 받는데, 마을 어르신들과 학생들에게는 50% 할인을 해서 1,500원을 받아요.”

 

주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이고 싶어

 

장사는 잘 되느냐는 질문에 ‘망하지만 않고 오래도록 주민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면서 크게 웃는다. 아직은 주민들도 낯설어 하기 때문이다. 송주희 대표는 대학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광고홍보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늘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는 한다.

 

“한 번은 지동에 노인정 회장님들이 함께 저희 다방엘 오셨어요. 그분들이 봉투를 내어놓는 거예요. 이러시면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고마워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런 것을 보면 이젠 지동 주민들도, 저희들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아 행복하죠.”

 

지동에 사는 주민들은 부지런하다고 한다. 물론 가진 것이 많지 않다보니,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송주희 대표는 그런 지동주민들에게 문화혜택을 드리고 싶다고 한다. 척박한 삶에 향기로운 커피의 향과 같은 삶을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한 사람의 노력은 큰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노력이라면, 주변의 사람들이 동참을 하게 된다. 핑퐁음악다방의 송주희 대표는 그것을 믿는다고 한다.

 

“지나시는 길이 있으면 들리세요. 맛있는 커피 대접할게요. 동네 안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해요. 그 행복을 나누어 드릴게요.”

지동의 순 우리말 이름은 ‘못골’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큰 연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동새마을 금고에서 못골어린이 놀이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좌측으로 이발소 하나가 보인다. ‘조원이발관’이라는 이 이발관은 이순재씨(남, 65세)가 운영을 하고 있는 이발관이다.

 

탤런트 이순재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농을 해대고는 한다. 한국동란 때 부모님과 함께 월남을 하여, 못골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관을 시작한지가 벌써 40년이 지났다. 숱한 세월을 못골 사람들과 함께 애환을 달래면서 살아온 이순재 사장이다.

 

 

“그 땐 제일교회가 판자집이었지”

 

이순재 사장이 운영하는 이발관은 마을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꼭 이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소일을 하기 위해서 들려가고는 한다. 찾아오신 어르신들이 머리가 단정치 않으면 그냥 머리 손질을 하기도 한다.

 

“처음 이발관을 열었을 때는 마을에 어르신들이 한 150여 명 정도였는데, 40년 세월동안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젠 한 열 분이나 남았나 봐요. 그 땐 이발소에서 위편으로 제일교회 있는 곳까지 집이 없었어요. 모두 밭이고 지금 앞으로 난 길 건너편은 논이었으니까요. 그 때는 제일교회도 판자였었어요. 그러다가 이렇게 지금처럼 큰 대형교회가 되었지만.”

 

사람이 좋아 그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 이발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지만 안을 들어가면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40년 세월의 손때가 묻어있다.

 

 

40년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조원이발관

 

“예전에는 손님들도 참 많았어요. 많을 때는 혼자서 하루에 20명을 이발을 한 적도 있었고요. 그 때는 정말 젊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일을 하고는 했는데. 이런 적도 있었어요. 제가 낚시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낮에는 이발을 하고 밤에는 낚시를 다니고는 했죠. 그러다가 보니 낮에 이발을 하러 손님이 오셨는데, 그만 졸고 있었나 봐요. 어르신이 피곤하면 잠시 들어가 눈을 붙이고 나오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 잠시 눈을 부친 것이 두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발을 하러 오신 어르신은 그 자리에 앉아 계시더라는 것. 그만큼 못골의 옛 어르신들은 정이 넘쳤다고 이야기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동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지동에는 어르신들 중에 남자가 별로 없어요. 모두 다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마나님들만 남아 계시죠.”

 

 

40년 세월을 많은 사람들과 접하다가 보니, 마을의 집집마다 그 속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조원이발관은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속내를 풀어내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발을 하러 오거나,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을 찾았거나 아무래도 좋았다는 것.

 

“어르신들이 오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시기 때문에, 마을 사정을 잘 알고는 했죠. 어느 날부터인가 어르신들이 한 분씩 보이지 않는 거예요. 세상을 떠나신 것이죠.”

 

한 자리에서 40년 세월을 남의 머리를 만지며 살았다. 그리고 어르신들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아직 못골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발소 안에는 나무로 열을 내는 난로가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40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 있는 셈이다.

 

“저희 집에는 아직도 220V 전기를 쓰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선풍기고 무엇이고 다. 40년 동안 함께 이 이발관을 지켜 온 것들이죠. 그래서 쉽게 바꿀 수도 없고요”

 

그랬나보다. 곁에서 대담을 듣고 있던 마을분이 한 마디 거든다. 그 말에서 40년 세월을 못골 사람들의 머리를 만지며 그 애환을 함께 한 것이 아닐까?

 

“참 오래되었죠. 저 의자도 아마 처음 문을 열 때 그대로인 것 같아요. 타일을 붙인 저 세면대도 그 때 그대로이고”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