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정자야 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릴하고 있으니 아름다울 수밖에. 그러나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들어, 정자의 아름다움을 적은 게판들이 정자 안에 빼곡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남다르다. 그만큼 정자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웠던 주변 경치를 잃은 정자는 슬프다. 전라북도 임실군 운남면 입석리. 운암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 양요정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500년 세월을 뛰어넘은 정자

양요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양요 최응숙이 지은 정자이다. 이곳으로 난을 피해 낙향을 한 최응숙은, 강물이 산을 휘감아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곳에 양요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양요정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는지 정자 안에 걸린 게판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정자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들. 양요는 정자를 지은 최응숙의 호로, 당시 이 양요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수많은 편액 안에 잘 남아 있다.



원래 양요정의 원 위치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쪽으로 강가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섬진강 댐의 공사로 인해 양요정이 물속에 잠기게 되자, 1965년 이곳으로 이전을 하였다. 양요정은 지금도 주변 경치가 절경이다. 옮기기 전의 양요정은 산을 감돌아 흐르는 강과, 산 밑으로 낙수치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강과 산, 그리고 폭포와 정자. 한 마디로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대단한 절경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절경 잃은 정자, 이름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양요정은 운암호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을 휘감아 도는 강도, 산 밑으로 낙하를 하는 폭포도 사라졌다. 그런 인위적인 공사로 인해 멋진 절경을 잃어버리고만 양요정.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양요정은 여느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 가운데에 방을 두었다. 이런 형태의 정자는 남쪽 자방에서 많이 보이는 방들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경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정자는 처음 그대로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정자 가운데 들인 방의 벽면에는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홀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친구들과 바둑을 즐기는 모습. 그리고 가마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행렬. 아마 양요 최응숙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난을 피해 이곳으로 낙향을 했지만, 늘 임금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은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양요정에 올라 운암호를 내려다보면서 문득 걱정이 된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또 어떤 절경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전국의 수많은 정자들.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정자 들이, 이 양요정처럼 또 다른 슬픔을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괴강이 흐르는 곳에 바위 암벽이 솟아오른 곳이 있다. 조선 시대의 경승지인 제월대에는 조선조 선조 때의 유근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정자와 고산정사를 지었다. 선조 29년인 1596년에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광해군 때에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를 하였다는 것.

숙종조에 편찬된 <괴산군읍지>에는 '孤山精舍 在君東八里 乙亥年 位火燒盡'이라고 적고 있다. 즉 '괴산군의 동쪽 8리에 있는 고산정사가 을해 년에 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기록에 고산정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이나, 만송정이 불타 버렸다는 기록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송정을 '고산정(孤山亭)'이라 고쳐 부른 것으로 보인다.



괴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산정

고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괴산IC를 벗어나 괴산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제월리가 나온다. 그곳서 괴강을 굽어보고 있는 고산정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고산정을 오르는 산 길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한편에 제월대의 내력을 적은 석비가 서 있다. 눈이 덮인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눈이 쌓인 계단을 올라 괴산정 가까이 가니, 2월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정자에 오르면 많은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고산정은 사방을 개방하고 낮은 난간을 둘렀다. 기단위에 주추는 원형으로 다듬어 기둥을 받쳤는데, 툇돌 하나가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위에 오르니 이원이 썼다는 고산정이라는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선조 39년인 1606년에 쓴 '湖山勝集'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강과 산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명나라 사신 웅화가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쓴 '고산정사기'도 보인다.

400년 역사의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보다

고산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밑을 흐르는 괴강이 아름답다. 봄철이 되면 저 물속을 다니며 올갱이를 잡는 아낙네들을 그려본다. 그 또한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까? 양편으로는 괴강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편액의 글씨를 보아도 이 고산정의 역사는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많은 사람들. 편액과 기문을 쓴 사신 주지번과 웅화도, 그리고 이 정자를 지은 유근도 모두 이 경계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곳을 찾아 든 많은 시인묵객들도 모두 주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선 나 역시, 오늘은 이곳의 주인이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생각이 아닐는지. 오늘 난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 말없이 흐르는 괴강을 내려다본다.

'이 곳의 참나무들이 참 이상해요'

한참을 괴강을 굽어보며 혼자 상상 속으로 빠져 절경을 느끼고 있는데, 답사에 동행을 한 아우 녀석이 흥을 깬다. 주변에 선 참나무들이 아상하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고산정 주변에 있는 참나무들이 모두 구멍이 뚫려있단 이야기다. 그 말에 주변의 참나무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나무들이 한 곳씩 깊게 파인 홈이 있다. 이것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나 않을까?



아마 이 나무들이 여자들인가 보다. 이 제월대와 고산정의 뛰어난 경치에 반한 수많은 남정네들이 찾아왔으니, 그 남정네들을 사랑한 근동 여인들의 마음이 이리 되지나 않았을까? 괜한 말을 해놓고도 멋쩍어 키득거리고 웃는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괴강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럽다. 강 쪽으로 내려가 제월대를 바라보니, 위쪽 까마득하게 고산정이 보인다. 위에서 괴강을 내려다보아도 장관이요, 아래서 제월대를 바라보아도 장관이다. 그래서 이곳에 고산정을 짓고, 시심을 일깨운 것이 아닐까? 흰 눈이 쌓인 겨울 경치는 또 다른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만든다.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95-1번지에 소재한 종학당(宗學堂)은 충남 유형문화재 제152호이다. 윤순거가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들을 위하여 인조 21년인 1627년에 종학당을 짓고, 이듬해인 1628년에는 숙사인 백록당과, 시를 쓰고 난세를 논할 수 있는 정자인 정수루(淨水樓)를 지었다.

계단이 없는 누각 정수루

정수루는 이층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중층 누각의 경우 이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이층 마루 한편을 열어 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정수루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그 대신 정수루 뒤편에 있는 종학당의 숙사인 백록당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축대를 이용해, 직접 정수루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수루는 정면 6칸의 팔작집이다. 그 중 정수루를 보면서 우측 한 칸 뒤편은 꺾이어 ㄱ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꺾인 부분을 통해 누각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정수루의 앞에는 연못을 파고,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누정을 지었다. 기둥 밑을 받치는 주초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자연의 미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누마루를 받치는 기둥은 보수를 한 자국이 여기저기 있다. 오랜 세월 낡고 퇴락한 것을 보수를 한 것이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했으며, 전면에는 일곱 개의 기둥을 배치하였다.

누정에 오르면 가슴이 트여



ㄱ자 형으로 꺾인 입구를 통해 누정으로 오르면,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좌측 밑으로는 종학당의 뒤편이 보인다. 배롱나무가 꽃이 필 때쯤이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그 앞으로 펼쳐진 병사저수지 또한 정수루의 멋을 더하고 있다. 어찌 저 앞에 이런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안 것일까? 예전 조상님들의 땅 이름을 짓는 선견지명에는 그저 놀라움이 더할 뿐이다.

길게 여섯 칸으로 지어진 누정 정수루. 삼면은 모두 개방을 하고, 입구 맞은편에는 판자벽으로 마감을 하고 문을 내었다. 아마 바람이 저곳으로 들어오기 때문인가 보다. 다 열면 허전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방향을 보는 것이 조금은 탁해보였을까? 굳이 한곳만 판자벽으로 마감한 이유를 생각해 보지만, 쉽게 해답을 얻지 못한다.



윤순거 선생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시심을 불러 일깨운 것일까? 난간을 × 자형으로 둘러 멋을 더한 정수루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본다. 어디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주변의 바라다 보이는 곳 모두가 그대로 그림이 된다. 그렇게 보이는 주변 정경에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다. 그래서 이곳에 누정을 짓고, 그 누정에 올라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난세가 싫어지면 오르고 싶은 누정 정수루. 그 위에 올라 정자 이름 그대로, 맑은 물 같이 깨끗한 마음을 만들 수가 있을까? 정수루 위에 올라 멀리 병사저수지를 내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해본다. 초봄의 조금은 찬바람과 함께 아직 영글지 않은 봄내음이 함께 맡아진다.

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가 있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변 무릉리. 정자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 빼앗길 뻔하다

더욱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시골의 촌부들이 지켜낸 어제시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의 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숙종임금의 어제시 현판이 일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놓인 것을 많은 돈을 주고 돌려받은 무릉리 요선계원들. 그들이 진정한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요선정으로 오르는 숲길 입구에 있는 작은 암자에 차를 대놓고, 주천강 옆으로 난 숲길을 오른다. 강바람인지 바람 한 점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난다. 예전에는 요선계원들이 지켜 온 어제시를 이제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지키고 있는 것인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쯤은 암기를 한 기억들도 있을 남구만의 시 ‘동창이 밝았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후기(1629(인조 7)~1711(숙종 37))의 문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운로, 호는 약천 또는 미재로 불렀다.


유배지에서 지은 ‘동창이...’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1684년 남인의 기사환국으로 강원도 강릉(현재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심곡동으로 약천동이라고도 한다)에 서 1년 정도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약천마을의 농촌 정경을 보고 지은 시조라고하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라고도 한다.

남구만선생이 이 마을로 유배를 왔을 때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어 자신의 호를 약천이라 짓고, 마을에 심일서당을 개설하여 마을사람들에게 1년 정도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바로 이 심일서당에서 지은 시조라고 한다. 심일서당은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다가, 1900년대 들어 이 고장의 학자 김남용과 여운형 등이 운영을 하였으며, 1927년 명진소년회사건(明進少年會事件)으로 일제에 의하여 폐쇄 당하였다.



‘약천팔경’에 마음이 설레이다.

동해 망상해수욕장으로 가다가보면 망상역 못 미쳐 우측에 <약천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길에서 조금 들어가긴 하지만 그 마을에 ‘약천정(藥泉亭)’이란 정자가 있다고 하니 들어갈 수밖에. 안으로 들어가니 마을어구에 마을 유래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바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이 마을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약천마을에는 팔경이 있다. 죽전의 맑은 바람, 약천 샘물가의 버드나무, 초구의 목동이 부는 피리소리, 마평 들에서 들리는 농악소리, 노봉에서 보이는 고깃배 불, 한나루에 들어오는 어선의 풍경, 향로봉에 뜨는 아침 해, 승지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등 약천팔경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마을 안에는 이곳저곳 이정표와 안내문이 있어 여기저기 찾기가 쉽다. 정자에 오르기 전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나름대로 약천팔경의 한부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러나 어디 팔경이라는 것이 잠시 돌아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을 괜히 조바심을 낸 것 같아 오히려 송구스럽다. 마을 한복판에는 누각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진입로 우측에 자리한 송림 안에 위치한 약천정을 찾는다.



솔바람소리의 풍취가 좋은 약천정

‘약천정(藥泉亭)’.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노송 사이에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는지, 인적 없는 약천정은 그렇게 졸듯 고요함 속에 있다가 나그네를 반기는듯하다. 약천정 뒤로 몇 그루 오죽(烏竹)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정자 안에는 떨어진 솔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오히려 정겹다.

돌길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오르는 계단만큼이나 약천정도 그렇게 다소곳이 마을 동산 노송 숲속에 자리를 하고 있다. 노송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솔잎과 ‘툭’하고 소리를 내는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이 모든 것이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아마 옛 선인들이 정자와 누각을 짓고 그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세상을 산 것도 이런 풍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약천정을 뒤로하고 마을길로 내려오면 마을안쪽에 그 유명한 약천(藥泉)이 있다. 샘이라고 하여서 조금씩 솟아나는 물을 생각하다가 정작 물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내뿜는 약천을 보니 조금은 의아스럽다. 대리석으로 잘 정돈이 된 약천은 옛날 남쪽의 어느 선비가 몸에 병을 얻어 각처에 돌아다니며 물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몸이 다 나았으며, 후일 조정에 나아가 큰 벼슬을 하였다하여 약천이라고 했단다.

약천사 앞에는 커다란 돌에 동창이 밝았느냐를 적은 시조비가 서 있다. 이 약천사는 남구만 선생이 귀향생활을 하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오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떠난 후 약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약천정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한쪽만 터놓고 돌담을 쌓은 곳이 있다. 앞에 금줄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약천정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제장이란다. 매년 음력 11월에 길일을 택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때 다시 한 번 이 마을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약천마을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 약천 남구만선생의 시조 한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송림 사이에서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말없이 나그네를 맞는 약천정도 오늘 그 모습 그대로 긴 세월 또 다른 발길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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