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성기석 문화가 발달이 되어있다. 성기석은 일종의 주술적인 기원을 띠고 있다. 대개는 성기석을 마을에 조성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마을의 지기를 누르기 위한 방법으로 조성을 한다. 마을에 화가 미치거나, 재앙이 잦으면 성기석을 조성한다. 그러면 ‘음(陰)’한 기운을 눌러 마을이 평안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마을에 남자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여자아이가 많으면 성기석을 조성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럴 경우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성기석을 갉아서 물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등이다.

마을에 조성하는 성기석은 대개는 길고 위가 뾰죽하게 조성을 하기 때문에, 쇠침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마을에 음한 기운이 감도는 지맥을 차단하여, 마을에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한 방법이라고 예전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했다.


김제 귀신사에는 석수가 있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번지에 소재한 귀신사(歸信寺). 귀신사에 대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에 각주에서 언급한 화엄십찰의 하나인 국신사(귀신사의 옛 이름) 때문에, 귀신사의 창건연대를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으로 짐작할 뿐이다.

귀신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연대적으로 의상이 창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귀신사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이 귀신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석수가 경내에 자리한다. 2월 17일 오후, 눈이 내린 길을 따라 김제에 자리한 귀신사를 향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찾아간 귀신사였지만, 설경이 보고 싶어서다. 고찰은 눈이 내렸을 때, 그 모습 또한 색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라, 절 안에 있는 문화재 답사만 겨우 마칠 수가 있었다. 귀신사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대적광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수’이다.

석수 위에 세운 돌기둥은 무엇일까?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짐승이란 뜻이다. 귀신사에 전하는 석수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은 남서쪽 솔개봉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다보고 있는 사자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자상은, 평평한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성기석을 닮은 석수 위의 석주. 한편이 닳아있다(아래)

눈이 내려 사자상의 얼굴이며 등에 눈이 쌓였다. 그런 모습도 운치가 있으나, 좀 더 정확한 모습을 보기위해 얼굴 위에 덮인 눈을 치운다. 앞다리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사자상. 그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돌기둥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위에는 또 하나의 돌을 얹어놓았다. 등 위에 올린 돌기둥은 그렇다 치고, 돌기둥 위에 올린 또 하나의 돌은 영락없는 남자의 성기모습이다.

득남을 기원하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이었을까?

도대체 왜 이런 성기석 모양의 돌을 절에 세운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이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우리 풍속에는 화재 등을 막기 위해 해태를 조각하여, 화기를 막는 등 금수를 이용한 재액의 방액을 한 경우가 많다. 이곳의 지기가 좋지 않아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석수를 조각해 세웠다는 것은 납득이 가는 해석이다.



문제는 그 석수 위에 올린 성기석이다. 주름진 원통의 돌기둥 위에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성기석을 조각한 듯하다. 그 한쪽 면이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 필요에 의해 그 면을 갉아갔다는 생각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꽤 오래 전인가 보다. 귀신사를 처음으로 방문할 때 마을에 전하는 말로는, 귀신사 석수의 위에 올린 성기석을 갉아다가 물에 타 마시면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처럼 들린 귀산사에서 만난 석수. 흰 눈을 맞은 석수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훼손된 부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요즈음은 돌을 갈아 마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석수 위에 성기석을 바라보다가 괜한 웃음만 웃어본다. 글쎄다, 저렇게 사자 등에 남자의 성기석을 올렸다는 것은, 그렇게 용맹스런 남자아이를 얻기 위한 기자속은 아니었을까?


내가 석수를 보고 웃은 까닭은, 저 석수위의 돌을 갉아다가 물에 타 마시고, 정말 장대 같은 아들을 낳기는 했을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서이다


돌로 만든 석불대좌. 그 위에는 석불좌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불러 올 수 있다면, 그 위에 좌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석조 예술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 그 고달사지 높지 않은 축대위에 자리한 석불대좌는, 그야말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사각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각 대좌뿐이 아니라, 그 어떤 대좌보다도 뛰어난 수작이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3중으로 겹쳐 놓았다. 이른바 방형대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3단으로 꾸며진 방형의 석불대좌

대좌의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가 시원하다. 뚜렷한 조각솜씨는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고달사지는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사찰이었던 점을 보아도, 이 석불대좌를 조각한 공인은 최고의 기능을 갖춘 석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대는 사면을 돌아가면서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음각으로 새긴 안상은 바라만 보아도 명쾌하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연꽃을 앙련으로 새겨 넣고, 그 아래에는 작은 안상을 한 면에 4개씩 새겨 넣었다. 상하의 조각을 앙련으로 마무리를 해, 방형의 사각형에 중첩과 안상, 연꽃을 교체하여 뛰어난 조화를 엿볼 수가 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설을 지내고 난 다음날인 2월 4일. 눈길을 걸어 찾아간 고달사지에는 인적이 없다. 정초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이곳을 정초부터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고달사지를 둘러본다. 저만큼 석조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낯선 석조각들이 보인다. 그 고달사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대좌. 낮은 축대 한편으로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 돌계단을 올라 석불대좌 주변을 돌아보면 잘 다듬은 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금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 석불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불은, 아마도 이 고달사의 주불이었을 것이다. 대좌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좌 위에 사라진 석불을 그려보다

석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그 장대석의 크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고달사지 안에서도 가장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중앙에 석불대좌가 놓여있는 것이다. 대좌를 앉힌 기단석은 원래는 커다란 바위를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 같다. 반이 금이 가 있으나, 동서가 갈라진 곳이 다르다. 그리고 그 위에 일석으로 하대를 조성했다. 네모나게 층을 만들고, 사방에는 네 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앙련이 부드러움을 느낄 만큼 정교하다.

중대는 상대와 하대에 비해 좁게 만들었다. 각 면에 하나씩의 커다란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그저 밋밋한 그 안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맨 위 상대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아래는 앙련을 위에는 꽃잎을 조각하였다. 상대의 위는 석불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도대체 이 방형의 거대 석불대좌 위에 올려 졌던 석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지만, 딱히 그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좁고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을 테고, 발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그 미소로 아픔을 가시게 해주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수작인 석불대좌 위에, 조악한 작품이 올라앉았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바람에 밀려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다본다. 석불대좌 위에 금방이라도 석불이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것만 같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백제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병법사를 찾아 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신라의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황룡사로 대표되는 화엄사상에 대비되는, 백제의 미륵사상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가람이다. 미륵사는 31가람의 형태로, 금당, , 회랑의 세 곳에 마련한 절이다. 못을 메워 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 등이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미륵사는 건축, 공예 등 모든 백제의 문화가 집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백공이 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와 신라의 복합적인 예술세계가 이 미륵사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에 진열된 초석을 돌아보다,

미륵사지 경내를 돌아보면 수많은 석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석물들은 모두 미륵사에 서 있는 건물의 초석이나, 탑에 쓰였던 우주와 탱주, 지대석 등 다양하다. 그렇게 많은 석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미륵사지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 많은 석물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국보 9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하는 임시건물 앞에 진열된 석조물 중에 진열이 된 초석이다. 초석이란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주춧돌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초석이 여기저기 있다는 것은, 미륵사지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초석의 종류만 해도 상당하다. 어지간한 건물 수십 채를 짓고도 남을만한 초석이 미륵사지 경내에 보인다. 금당 터를 비롯해 회랑 등의 초석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초석들이 또 보인다면, 얼마나 거대하고 많은 전각들이 있었던 것인지. 그 초석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다양한 초석의 형태

초석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우선 가장 많이 사용이 되는 것은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초석으로 사용하는 덤벙주초가 있다. 그리고 평초석에 해당하는 낮은 초석들이 있는데, 이는 방형초석이나, 원형초석, 네모난 초석 등이 있다. 초석은 땅을 지주를 삼아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그렇기에 그 사용하는 곳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기둥에 따른 초석의 종류에는 외진주초석과 내진주초석이 있다. 내진주초석에는 고추초석과 단주초석이 있다. 외진주초석에는 우주초석, 평주초석, 퇴주초석 등과 귀기둥초석 등 다양하다. 초석이 낮은 것은 평초석이라 하고, 높이가 높게 마련한 장초석을 활주초석이라고 부른다. 활주초석에는 사다리꼴 형태의 방형초석인 주좌가 있고, 연못이나 누각 등에 사용을 하는 활주초석이 있다. 이 외에도 일각문 등에 사용하는 신방석등도 초석의 한 종류이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허야 혀

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한 장씩 촬영을 하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그런 모습이 조금은 이상했는가 보다.




그건 머하려고 그리 찍는 건가?”
, 필요한 데가 있어서요

주추는 여기 주추가 참 좋지주추종류도 많은가보네요

그럼 많지. 집을 지을 때는 그저 주추가 건실허야 혀.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해야지

이 주추들은 좋은 석재인가요?”, 전국에서 가장 단단하지. 천년이 지났어도 그대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미륵사가 창건된 지가 1,40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초석들이 형태를 지키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면 어르신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건실해야 한다는. 그 건실함이 폐허가 된 미륵사지만, 역사 속에 흔적을 남겨놓았다는 생각이다.


석굴법당, 그리고 산의 정상부에 늘어선 자연암석에 조각한 수많은 불상과 군상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소재한 벽송사를 오르다가, 맨 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서암정사가 나온다. 이 서암정사는 지리산의 한 줄기 정상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삼대명산이라는 지리산. 삼신산의 한 산인 지리산은 산세가 험해, 6.25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원혼이 떠도는 곳으로 많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응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수많은 원혼의 울부짖음을 듣고 난 뒤, 이곳에 극락정토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자연석벽에 지장보살과 아미타불 등, 무수한 불보살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벽송사를 들려 나오는 길에 찾아간 서암정사.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암벽에 조성한 절이라는 뜻인가 보다.



자연암벽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석문

자연암벽에 새긴 사천왕상에 압도당하다.

서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가파르다. 다행히 벽송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려,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차가 서암정사의 입구까지 들어갈 수가 있지만, 답사는 역시 조금은 걸어야 제 맛이 난다. 천천히 길을 잡아 서암정사 쪽으로 걷다가 보니, 불사를 하는 중인지 주변에 많은 목재가 쌓여있다.

조금 안쪽으로 걸어가니 양편에 커다란 석주가 서 있다. 그 안으로 정사를 들어가는 석굴 입구가 보인다. 그런데 벽에 무엇인가 새겨진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 자연 암벽을 이용해 그대로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그 조각 솜씨가 일품이다. 도대체 몇 년이나 걸려 이 많은 작품들을 완성한 것일까?



바위마다 새겨진 불상과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대방광문, 그리고 문의 안편

암벽의 크기 때문인가, 사천왕상은 조금씩 높낮이를 다르게 조상하였다. 힘찬 동작이 금방이라도 바위를 박차고 호령을 하며 뛰쳐나올 듯하다. 석굴로 들어가니 안으로 넓은 공지가 나온다. 종각이며 극락전 등, 전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에서는 석굴법당 공사를 하느라 부산하다.

모든 것이 자연암석을 이용해서 조성하다

경내에는 모든 조각들이 모두 자연암석을 이용해 조성을 하였다. 관계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리를 옮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있는 자리에 그대로 적당한 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작은 암반에 용을 조각하였는데, 머리는 거북이다. 그 입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저 속을 파내었을까?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경내에 마련한 연못과 용을 새긴 수각

종각도 마찬가지이다. 암석 위에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 이런 형태는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많이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산꼭대기에 이렇게 많은 석조물을 조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한 것일까? 서암정사 여기저기를 돌아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억울하게 쓰러져 간 영혼들을 위해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이용한 것이라는 데는 할 말을 잃었다. 극락전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숙이고 나도 이런 불사에 작은 마음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저쪽 한편 바위벼랑 끝에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아마 수행이라도 하는 분의 숙소인 듯. 길을 따라 눈길을 돌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바위를 파서 법당을 만든극락전과 벼랑 위에 걸친 토굴

언제 이 거대한 불사가 다 마무리가 되려는지. 아마 또 오랜 시간 또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직 조형물이 들어차지 않은 바위를 보며, 내 마음속으로 추측을 해본다. 저곳에는 무엇을 조각할 것인가를.


통일신라 때인 신문왕 11년(691년)에 남원에 지어진 용성관. 용성관이 당시에는 어떻게 사용이 되었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조에 들어서는 이곳을 객사와 같은 형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본다. 이 용성관을 객사로 보는 이유는 조선 태조를 상징하는 패를 모셨다는 점에서이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양편은 숙소로 사용하고, 중앙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용성관도 객사와 같은 형태로 보는 것이다. 용성관의 딴 이름은 백성을 돌보는 곳이란 명칭의 ‘홀민관(惚民館)’이라고도 했다. 용성관은 남원 광한루원과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모신 ‘관왕묘’와 더불어, 남원을 상징하는 3대 건물로 일컬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용성초등학교 입구 계단이 용성관의 흔적이다.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용성관

용성관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일본이 141,500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몰아, 조선의 하삼도를 공격한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 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하였다. 그만큼 남원은 일본에 있어서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복남을 위시한 조선군은 죽기로 각오를 하고 일본군과 격젼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인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이 때 용성관도 불에 타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광해군과 조선조 숙종 때 다시 축조를 하였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소실이 되었다. 용성관의 지표조사 때는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이 되었는데, 1995년 용성관지 지표조사 때 출토된 유물들로 귀목문 암막새, 전돌, 철못, 다수의 와편 등 모두 50여점이 발견이 되었다.




용성관이 당시 얼마나 장중한 객사의 형태로 지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의 받침부의 길이가 70m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이 5만의 군사를 동원해 남원을 공격한 것도, 알고 보면 당시 남원의 위상이 대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성초등학교 계단에 흔적이 남아

용성관지에는 1906년 6월 객사인 용성관을 용성공립보통학교로 바꾸어 개교를 하였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소기 되었으며, 그 뒤 현대식 건물로 고쳐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성초등학교 본관 건물을 보면, 층계 두 계단이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양편에는 석물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용성관이 남긴 석물이다.

계단 양편에 놓인 석물에는 꽃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석조물이 언제 적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리고 학교 건물 앞 기단부도 옛 장대석을 사용하였다. 건물에서 차도 쪽으로 돌아 나오다가 보면 철책으로 둘러친 곳에 많은 석물들이 보인다. 이 석물이 바로 용성관에 사용되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석물의 크기에 압도당해

남원시 동충둥 용성초등학교 교단으로 되어 있는 석물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계단 맞은편 교정에 있는 석물들은 그 모양만 보아도, 옛 용성관의 위용을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앙에 있는 석물은 크기가 엄청나다. 사각형인 이 석물은 한편이 2m가 넘을 듯하다. 그런 사각형의 돌에 한쪽으로 치우쳐 둥그런 구멍이 있다. 아마 무엇인가 기둥을 새웠던 자리인 듯하다.



그 외에도 잘 다듬은 석주하며 주춧돌이 있다. 이런 석물들의 모양으로 볼 때, 용성관의 화려함이 상상이 간다. 지금은 석물 몇 점만 남기고 있는 용성관. 복원을 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석물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그래서 슬픈 역사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는 그래서 인간과 같이 희로애락을 반복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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