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허야 혀’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백제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병법사를 찾아 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신라의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황룡사로 대표되는 화엄사상에 대비되는, 백제의 미륵사상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가람이다. 미륵사는 3원 1가람의 형태로, 금당, 탑, 회랑의 세 곳에 마련한 절이다. 못을 메워 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 등이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미륵사는 건축, 공예 등 모든 백제의 문화가 집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백공이 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와 신라의 복합적인 예술세계가 이 미륵사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에 진열된 초석을 돌아보다,
미륵사지 경내를 돌아보면 수많은 석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석물들은 모두 미륵사에 서 있는 건물의 초석이나, 탑에 쓰였던 우주와 탱주, 지대석 등 다양하다. 그렇게 많은 석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미륵사지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 많은 석물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국보 9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하는 임시건물 앞에 진열된 석조물 중에 진열이 된 초석이다. 초석이란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주춧돌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초석이 여기저기 있다는 것은, 미륵사지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초석의 종류만 해도 상당하다. 어지간한 건물 수십 채를 짓고도 남을만한 초석이 미륵사지 경내에 보인다. 금당 터를 비롯해 회랑 등의 초석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초석들이 또 보인다면, 얼마나 거대하고 많은 전각들이 있었던 것인지. 그 초석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다양한 초석의 형태
초석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우선 가장 많이 사용이 되는 것은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초석으로 사용하는 ‘덤벙주초’가 있다. 그리고 평초석에 해당하는 낮은 초석들이 있는데, 이는 방형초석이나, 원형초석, 네모난 초석 등이 있다. 초석은 땅을 지주를 삼아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그렇기에 그 사용하는 곳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기둥에 따른 초석의 종류에는 외진주초석과 내진주초석이 있다. 내진주초석에는 고추초석과 단주초석이 있다. 외진주초석에는 우주초석, 평주초석, 퇴주초석 등과 귀기둥초석 등 다양하다. 초석이 낮은 것은 평초석이라 하고, 높이가 높게 마련한 장초석을 활주초석이라고 부른다. 활주초석에는 사다리꼴 형태의 방형초석인 주좌가 있고, 연못이나 누각 등에 사용을 하는 활주초석이 있다. 이 외에도 일각문 등에 사용하는 ‘신방석’ 등도 초석의 한 종류이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허야 혀’
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한 장씩 촬영을 하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그런 모습이 조금은 이상했는가 보다.
“그건 머하려고 그리 찍는 건가?”
“예, 필요한 데가 있어서요”
“주추는 여기 주추가 참 좋지”“주추종류도 많은가보네요”
“그럼 많지. 집을 지을 때는 그저 주추가 건실허야 혀.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해야지”
“이 주추들은 좋은 석재인가요?”“암, 전국에서 가장 단단하지. 천년이 지났어도 그대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미륵사가 창건된 지가 1,40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초석들이 형태를 지키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면 어르신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건실해야 한다는. 그 건실함이 폐허가 된 미륵사지만, 역사 속에 흔적을 남겨놓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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