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8호인 부안 서문안 당산이 자리하고 있다. 당산이란 민간신앙에서 신이라고 섬기는 신앙의 대상물이다. 서문 안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는 도로변에 자리한다. 당산이라고 부르는 돌기둥은 마을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안과태평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이다.

이 서문 안 당산은 부안군청 서쪽 약 40m 지점에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던 것을, 할머니 당의 자리에 모아 놓았다. 이 두 쌍의 솟대와 장승은 부안읍성의 서문 안을 보호하는 것으로 조선조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사문으로 통하는 길 양편에 서 있던 것을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은 돌기둥

이 두 개의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이라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 안 당산의 주신으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아버지 당의 받침돌에는 '알받이 구멍'이라는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파여져 있다. 이 알받이 구멍은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는 곳이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또한 할머니 당산의 윗부분에 새는 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해,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할머니 당산을 보면 당산의 허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위에 있는 오리를 확인할 수가 없다.



길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할아버지 당이 서 있고, 그 옆에 위가 유실된 할머니 당이 서 있다. 그리고 돌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서 있다. 할아버지라고 하는 남장승은 복판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 음각했으며, 머리에는 탕건을 쓰고 수염이 있다. 눈썹은 굵게 표현을 했으며 눈은 앞으로 튀어나온 왕방울 눈이다. 코는 주먹코에 볼은 불거져 있어, 흡사 입 안에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형상이다. 상원주장군은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도 부른다.

우측에 있는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복판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다. 할머니 석장승은 할아버지 석장승보다 많이 마모가 된 상태이며 복판에 글씨도 알아보기가 힘들다.


알받이 구멍, 그런 것이었구먼

이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인 솟대 2기를 묶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당산제를 시작해 다음날까지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부안 동문 안과 남문의 당산을 함께 모시는데, 이는 서문 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마다 지내던 마을제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해 지내던 마을제는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공동체를 창출하고, 그 공동체가 서로를 위하는 상부상조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사라져버리고 약식화 되어가는 마을제가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안에 공동체의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곳은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리 사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으로는 지릅재를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절터. 미륵대원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절터에는 현재 미륵리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있고,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미륵리 사지. 현재는 세계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중창 중에 있는데, 본존불인 석불입상으로 올라가는 입구 좌측에 커다란 귀부가 하나 놓여있다. 그 귀부의 크기로 보아, 이곳으로 운반을 하는 데만도 대단한 역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미륵리 사지에 소재한 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로 밝혀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이 귀부는 길이가 605cm, 높이가 180cm나 된다. 그 모습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과연 귀부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귀부는 머리가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귀부의 형태는 거북이 등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부의 경우는 거북이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우선 등에는 거북등에 있는 육각의 문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쪽 왼편 등에 작은 거북이 두 마리가, 어미의 등을 타고 오르듯 양각되어 있다. 그것도 주변을 파내고 양각을 한 형태이다. 등을 보면 중앙부분이 뾰족하게 올라있다. 이 형태도 일반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다. 머리는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길게 - 자형으로 판 입과 그 위에 작은 콧구멍, 그리고 양 옆에 동그랗게 표시한 눈 등이 사실적 표현을 했다. 앞발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을 했다.


거북이 등에 파 놓은 비좌는 거북 모양에 비해 크지가 않다. 1970년대부터 발굴을 시작한 미륵리 사지에서, 수차례 발굴을 했으나 비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귀부 위에 올려 질 비의 몸돌은 조성되지가 않았다는 것인지. 이 미륵리 사지에 이러한 귀부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미완성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미륵리 사지에 있는 귀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의구심이 생긴다. 그 첫째는 바로 이 귀부를 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더구나 이렇게 본존불,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있는 그 앞에 자리한 귀부. 등에 내 놓은 비좌로 보아서는 귀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등에 파 놓은 홈이 과연 비좌일까 하는 점이다.



비좌로 보기에는 형평에 맞지가 않는다. 적어도 이만한 귀부에 올릴 비문이라면 그 비의 몸돌 역시 상당히 클 것이다. 그런 큰 비문의 몸돌을 올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를 올리는 비의 받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일 이것이 비를 받치는 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시대에 따른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등에 새기는 문양이나, 거북이 몸에 용머리 등,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미륵리 사지의 귀부는 단순한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 거북이 형태로 다듬어 놓은 귀부의 뒤편 우측 꼬리 부분이다. 꼬리 부분에는 돌을 쪼아 내려는 듯 여러 개 구멍이 나 있다. 이렇게 일렬로 나 있는 구멍으로 보아, 이 귀부는 미완성작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귀부라면 이해가 간다. 귀부를 조성하기 위해서 조각을 하는 도중에, 중단이 되어 그대로 방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석굴식으로 만든 석불입상이나 오층석탑 등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된 절에서, 왜 유독 이 귀부만 완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미륵리 귀부가 주는 의문점

미륵리 사지에는 현재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첫째는 하늘재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 탑이다. 그리고 본존불인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충청도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굴식 법당의 주존불이다.

석불입상과 오층석탑의 사이에는 석등이 서 있고, 그 앞으로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 역시 고려 초기 탑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경내에는 당간지주와 불좌대 등 많은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이 미륵리 사지의 창건 당시의 사격이 어느 정도였는가 가늠이 간다.



이 몇 기의 문화재의 연대가 모두 고려 초기의 것으로 밝혀져, 미륵리 사지는 고려 초기에 있던 미륵대원이라는 절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미륵대원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을 짓고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석불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북녘을 호령하던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부는 언제 조성이 된 것이며, 무슨 연유로 이렇게 거대한 돌 거북을 조각한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 이 거북의 머리가 왜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본존불인 석불입상과 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에서 조성이 되었다면, 이것을 귀부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고려 초기 인근의 사지인 원주 부론의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와,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도 같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이곳에도 비가 서 있으며 이 비의 귀부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용머리에 거북의 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변의 정황을 살펴볼 때 미륵리 사지의 귀부가 과연 귀부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등에 새겨지는 문양이 없다는 점. 필요이상으로 크기가 크다는 점,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다는 점 등을 볼 때, 귀부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석조물은 아니었을까?

거북이 등에 새겨진 두 마리 작은 거북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귀부 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 쌓인 미륵리 사지를 오랜 시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귀부가 눈에서 떠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진천 농다리. 많은 사람들이 농다리를 찾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농다리에 대한 글은 많다. 그런데도 농다리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함이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농다리는 과학이요. 우리의 사상을 지난 다리'라는 점이다. 

중부고속도로 청주에서 안성쪽으로 오르는 상행선을 가다가 보면,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그 유명한 진천 농다리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놓여진 이 농다리는 고려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농다리를 축조했다는 임장군은 누구인가?

1932년도에 발행된 <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으로 농다리를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바로 임연 장군이다. 고려 때의 임연 장군은 고려 말의 무신이다. 임연은 고려 원종 때의 무신으로(? ~ 1270(원종 11년)) 몽고군을 물리친 장수이다.

임장군이 전성기에 농다리를 고향마을에 축조했다고 한다. 임연 장군이 전성기라고 하면,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인 공로로 위사공신의 칭호를 받았을 때일 것이다. 당시는 고종 45년인 1258년이니 750년 전이다.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려 초기의 임 장군과 고려 말의 무신인 임연이 동일인물 인가가 정확지가 않다. 상산지에는 고려 초기에 축조한 다리라고 하면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고, 고려 말의 무장 임연 장군이 쌓았다고 하면 750년이 지났다.



결국 그 차이가 300년 정도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진천 농다리를 축조한 '임장군'은, 고려 말의 무장인 임연 장군과는 별개의 인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농다리의 실제 길이는 108m였을까?

농다리는 원래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중 세칸이 유실되고,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6m에 이르고 있다. 교각의 폭은 4m 내지 6m 정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있다. 이 농다리의 처음 길이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현재 남아있는 93.6m를 남은 25칸으로 나누면 3.75m 정도가 된다. 이것을 원래 28수로 곱하면 약 105m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이 농다리의 교각의 폭이 일정치가 않고 4m에서 6m 정도였다면, 혹 이 농다리의 원래 길이는 108m 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하였다. 아마도 이런 종교적인 사고를 지닌 다리는 아니었을까 하는도 든다.  


농다리는 과학이다.

농다리는 똑 바로 축조가 되지 않았다. 마치 지네발처럼 구불구불하다. 이런 농다리는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들었다. 상판석은 특이하게  중앙에만 쌓아, 좌우로 날개를 단 듯 축조된 돌로 쌓은 기둥의 힘을 배분했다. 교각의 축조방법은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흙 등으로 채우지 않고,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 농다리를 돌만으로 축조한 것도 알고보면 이유가 있다. 그 쌓아 올린 교각의 돌틈으로 물이 빠져나가게 한 것이다. 그만큼 흐르는 물로 인해 받는 저항을 약화시켰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놓여진 다리라는 것이다. 장마철에 물에 잠기는 농다리. 물속에서도 어떻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농다리의 앞을 보면 교각보다 넓게 조성이 되었다. 석축의 끝은 좁고 상판을 올린 부분은 넓게 만들었다. 이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교각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살은 갑자기 유속이 빨라진다. 마치 무엇이 잡아 끌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렇게 물살이 빠르게 교각 사이를 빠져 나가면,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고 유속만 빨라지게 된다.


돌과 돌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은 흐름이 늦어진다. 교각 사이를 좁게 한 대신 깊이를 조절해 물이 흐름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인 것 같다. 


좁은 통로를 지나는 물은 갑자기 빠르게 빠져나간다. 교각의 후미를 경사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급의 조절을 한 것은 물이 교각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농다리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지네발 모양의 축조방식이다. 교각을 일렬로 쌓지 않고 구불거리게 놓아, 물의 흐름을 적당히 배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축조된 농다리.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이 결토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0월 20일, 남원시 덕과면에 있는 호암서원을 찾아가다 보니, 길가에 커다란 석비가 하나 보인다. 호암시비공원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시비공원은 남원문화원, 전라북도와 남원시, 그리고 호암시비공원 건립추진위원회의 후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호암서원은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55호로 지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근처를 돌아다녀도 이정표 하나가 없어 결국 찾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앞에 조성이 되었다는 시비공원. 호암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조성된, ‘궁포조대(弓浦釣臺)’ 하천부지 낚시터 옆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시비가 줄지어 선 공원

도로 변 넓지 않은 곳에 마련한 시비공원에는 받침 위에 흑색이 나는 석물로 세운 시비 20여기가 줄지어 있다. 길가를 향해 3줄로 서 있는 시비들은 멀리서도 쉽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치다가 한 번 쯤은 들려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길이 워낙 차량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고 보면, 원래의 취지에는 많이 부족하단 생각이다.

2007년 6월 28일자로 비를 세운 것인 듯, 시비표지석 밑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백두대간 만행산하 유서깊은 호암서원 앞 뜰 궁포조대에 고매한 선인들의 시혼을 모신다. 선인들은 애국의 명신이거나 학자인 동시에 시인이었으니, 그 생애가 일월처럼 빛났다. 우리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인간을 사랑하고 바른길을 따라 참되게 살아 온 인, 의, 예, 지 정신을 표상으로 삼고자 남원관련 선인들의 시를 모아 돌에 새겨 이곳에 세웁니다.」

뜻대로라면 정말 좋은 시비공원이다. 그런데 이 시비공원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기 이를 데가 없다.



글씨는 지워지고 조경수는 말라죽고

시비는 ‘용성지’와 ‘매헌집’ 등 남원 관련의 시인과 서책 등에 실린 글을 모아 돌에 새겼다. 그런데 몇 개의 시비는 아예 판독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경수로 심은 듯한 나무는 고사를 했는지, 말라 죽어있다. 선인들의 얼을 기리고자 조성을 했다는 호암시비공원. 이런 것을 바라보면서 후손들은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불과 이 공원을 조성을 한지 이제 고작 5년이다. 그런데 조성을 해놓고 단 한번이라도 이곳에 신경을 쓰기는 했는지 묻고 싶다. 어떻게 시비에 글자의 판독도 어려울 정도로 지어진 것을 그대로 방치를 한 것인지.




많은 예산을 들여 조성을 해놓고, 나몰라라식의 방치라면 그 안에 새긴 뜻도 함께 버려진 것 같지 않을까? 선인들의 글에 녹아진 그 뜻을 후손에게 일깨우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면, 하루 빨리 제 모습을 갖추기를 바란다. 또한 이렇게 외진 곳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이전도 생각해 봄직하다.

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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