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만든 석불대좌. 그 위에는 석불좌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불러 올 수 있다면, 그 위에 좌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석조 예술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 그 고달사지 높지 않은 축대위에 자리한 석불대좌는, 그야말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사각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각 대좌뿐이 아니라, 그 어떤 대좌보다도 뛰어난 수작이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3중으로 겹쳐 놓았다. 이른바 방형대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3단으로 꾸며진 방형의 석불대좌

대좌의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가 시원하다. 뚜렷한 조각솜씨는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고달사지는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사찰이었던 점을 보아도, 이 석불대좌를 조각한 공인은 최고의 기능을 갖춘 석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대는 사면을 돌아가면서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음각으로 새긴 안상은 바라만 보아도 명쾌하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연꽃을 앙련으로 새겨 넣고, 그 아래에는 작은 안상을 한 면에 4개씩 새겨 넣었다. 상하의 조각을 앙련으로 마무리를 해, 방형의 사각형에 중첩과 안상, 연꽃을 교체하여 뛰어난 조화를 엿볼 수가 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설을 지내고 난 다음날인 2월 4일. 눈길을 걸어 찾아간 고달사지에는 인적이 없다. 정초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이곳을 정초부터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고달사지를 둘러본다. 저만큼 석조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낯선 석조각들이 보인다. 그 고달사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대좌. 낮은 축대 한편으로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 돌계단을 올라 석불대좌 주변을 돌아보면 잘 다듬은 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금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 석불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불은, 아마도 이 고달사의 주불이었을 것이다. 대좌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좌 위에 사라진 석불을 그려보다

석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그 장대석의 크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고달사지 안에서도 가장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중앙에 석불대좌가 놓여있는 것이다. 대좌를 앉힌 기단석은 원래는 커다란 바위를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 같다. 반이 금이 가 있으나, 동서가 갈라진 곳이 다르다. 그리고 그 위에 일석으로 하대를 조성했다. 네모나게 층을 만들고, 사방에는 네 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앙련이 부드러움을 느낄 만큼 정교하다.

중대는 상대와 하대에 비해 좁게 만들었다. 각 면에 하나씩의 커다란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그저 밋밋한 그 안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맨 위 상대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아래는 앙련을 위에는 꽃잎을 조각하였다. 상대의 위는 석불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도대체 이 방형의 거대 석불대좌 위에 올려 졌던 석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지만, 딱히 그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좁고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을 테고, 발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그 미소로 아픔을 가시게 해주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수작인 석불대좌 위에, 조악한 작품이 올라앉았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바람에 밀려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다본다. 석불대좌 위에 금방이라도 석불이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것만 같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