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마을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마을에 옛 민속자료 등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곳을 찾아서이다. 아직도 마을에서 지성으로 당제 등을 모시고 있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고 보면, 나로서는 그렇게 전해지는 우리 것이 고맙기 한이 없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는 그런 면에서는 정말 몇 개의 지정 문화재보다 더 값진 마을이란 생각이다.

무촌리는 조선시대 남상면의 서남쪽에 자리했던, 고천방에 있었던 ‘무촌역’을 중심으로 한 마을들이다. 그 인근을 ‘무촌역리’라 한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예전에는 역이 있는 곳에는 파발마를 두고, 원 등을 두어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꿔타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무촌리에 그런 역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상매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과 이야기를 들려준 마을주민들

네 곳의 당(堂)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현재 무촌리는 상매 · 하매 · 무촌 · 인평 · 성지 · 지하 등 여섯 개의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행정리이다. 길가에 있는 무촌마을에서 연수사 방향으로 내를 건어 들어가다가 보면 ‘하매’마을이 있고, 그 안으로 ‘상매’마을이 나온다. 매산이란 이름은 이곳이 ‘매화낙지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도로변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상매마을.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네그루의 소나무가 탑을 에워 쌓듯 길가에 서 있다. 누석탑으로 쌓은 이 탑에서 내를 건너면 바위 암벽 위에 또 하나의 돌탑이 있다. 소나무 밑에 있는 탑은 ‘아들탑’이고 내를 건너 바위 위에 올린 탑은 ‘며느리탑’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정자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아직도 마을에서 당제를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과 같지는 않아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네 곳에 있는 당을 돌면서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 윗쪽에 있는 윗당산인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오랜 세월 전해진 전통, 그대로 남은 풍습

경남 거창군에는 아직 마을에 옛 풍습인 당제를 지내는 곳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새마을운동,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많은 곳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풍습을 버렸는데도, 이곳은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분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본다. 혹 마을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상매마을에는 모두 네 곳에 당이 있다고 한다. 윗당산과 아랫당산으로 구분이 되는 네 곳의 당은, 마을 위편으로 올라가 암벽 밑으로 맑은 물이 마을로 흘러드는 곳에 할아버지 당이 있다. 그리고 마을이 끝나는 곳 산자락에 할머니당이 자리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큰 애기들이 키를 쓰고 뛰어다녔다는 내. 그러면 비가 왔다고...

당에는 모두 정월에 제를 지내면서 금줄을 처 놓아 쉽게 구분이 된다. 마을주민들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이 마을은 비가 안 오면 앞내에서 키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녔어”
“누가요?”
“마을 큰 애기들이”
“그러면 비가 왔나요?”
“하모. 오고말고.”

농사철에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집집마다 밀가루를 걷어 빵을 한다는 것이다. 그 빵을 마을에 사는 큰 애기들에게 나누어주고 키를 하나씩 뒤집어쓰게 한단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내로 나가,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비를 오라고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내를 바라보며 괜한 웃음을 짓는다. 그 광경이 떠올라서이다.


아랫당인 아들당과 내 건녀 암벽 위에 쌓은 며느리당

영험한 당산나무를 자르고 나더니...

무촌리의 무촌, 상매, 하매는 모두 정월보름날 자정을 기해서 당제를 올린다. 시간상으로는 열나흩날 밤이 되는 것이다. 상매마을에서는 먼저 할아버지당에서 제를 지낸 후, 할머니당을 거쳐 아랫당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자정에 시작한 당제가 아랫당으로 오는 시간은 아침 6시경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음식을 새로 장만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아들당 주변에는 원래 소나무가 다섯 그루가 서 있었지"
“지금은 네그루뿐이던데요.”
“한 그루는 더 컸는데 그 당 옆에 있는 논 주인이 나무그늘이 생겨 농사가 잘 안된다고 잘라버렸어. 그러고 나서 두 부부가 이유도 없이 죽고 말았지.”

뫼를 지어 제를 올리고 난 뒤 한지에 싸아 돌틈에 넣어 놓은 뫼

마을주민들은 신령한 당산의 나무를 잘라서 벌을 받았는가보다고 이야기를 한다. 마을 입구와 뒤편을 에워 쌓고 있는 네 곳의 당산. 아들당에서는 그 자리에서 뫼를 지어, 제를 마치고나면 한지에 쌓아 탑 안에 넣어 놓는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아들당산의 탑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탑돌 틈 사이에 한지에 쌓은 것이 보인다.

아주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있는 상매마을 당산제. 오늘도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마을에는 아직 한 번도 변고가 일어난 적이 없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교만이 지나치면 세상을 망치게 된다. 이런 말은 골백번이나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그런 것을 잊게 되고, 또 다시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도 한다. 참으로 우매한 것이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그런 인간이 부른 교만이 한 마을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 바로 현 순창군에 있는 적성현이라는 고을이다.

적성현은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에 폐현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현이 폐현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바로 교만한 한 인간의 바보 같은 행동에서였다. 남원에서 순창으로 가는 21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채계산’이라는 산이 있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 산의 중턱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최영이 화살을 따라 뛰던 산

체계산은 회문산,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이다. 이 산은 화산, 적성산, 책여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 봉우리는 험한 준령인데 최영장군이 이 산에서 활을 쏘고, 화살보다 먼저 말을 달리며 무술을 닦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활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이 떨어지는 곳으로 내달았으나, 화살이 보이지가 않았다.

최영은 말이 뒤늦어 화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최영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고, 그 뒤로는 직접 자신이 활을 쏘고 산에서 달려 내려와, 적성강에 먼저 도착하는 훈련을 수도 없이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영은 자신의 경솔함을 바로 후회하고, 그 뒤로는 자신이 직접 달렸다고 한다.



신비한 화산옹 바위의 전설

이 채계산이라는 이름은 귀부인이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은 형상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 채계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예전 이곳에 적성현이 있던 곳인가 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풍부한 물이 앞으로 흐르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시야 속에 많지 않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예전 이곳이 적성현이 있었다고 하면, 상당히 많은 집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만한 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이, 결국 한 현을 송두리째 망하게 만든 셈이다.



이 산에 있는 바위는 흡사 노인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화산옹 바위'라고 부른다. 늙은 노인이 서 있는 바위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로 이 바위를 보는 순간, 수염을 길에 느린 노인 한 분이 서 있는 듯하다. 이 바위는 장군바위, 미륵바위, 메뚜기바위라고도 부른다.

교만은 역사를 망치게 만든다는 교훈이

화산옹 바위는 높이가 30m 정도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면 이 바위의 우측이 떨어져 나간 듯 보인다. 좌측에는 팔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는데, 우측엔 그런 돌출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잘려나간 듯하다. 이 바위의 우측 팔 부분이 잘려나간 것은, 전라병사 김삼용의 교만심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이 화산옹 바위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바위였다고 전한다. 풍년이 드는 해는 이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지만, 흉년이 드는 해는 검은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성현 내에 큰불이 나거나 유행병이 번지면 바위가 푸른색을 띤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가 되면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화산옹 바위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가야 한단다. 만일 말에서 내리지를 않으면 말이 다리를 삐거나, 말에 탄 사람이 낙상을 하기도 했단다. 그런 변괴가 일어나는 신령한 바위이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이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아이를 못 낳으면 정한수를 떠놓고 빌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위 앞에는 누가 기원을 한 것인지 작은 돌무지가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인가 전라병사 김삼용이 금빛과 은빛이 나는 화려한 갑옷으로 차려입고, 이 화산옹 바위 앞을 지나게 되었다. 수행을 하던 아전이 다가와 김삼용에게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삼용은 그 이유를 듣고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탄 채로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분을 이기지 못한 김삼용은 ‘화산옹의 요망한 바위덩어리가 장부의 기개를 꺾는다’며, 칼을 빼 오른쪽 어깨를 치니 팔부분이 떨어져 적성강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화산옹 바위의 영험은 사라졌으며, 천재지변이 연이어 일어나 적성현은 폐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교만이 한 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매한 마을의 지도자가 마을을 망치 듯, 우매한 가장은 집안을 망치는 법이다.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화산옹 바위. 이 바위의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다면, 나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을. 두 손을 마주해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없는 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금산사는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인 776년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는 고려 935년에는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금산사 경내에는 보물 제22호로 지정이 된 ‘노주’가 있다.

이 금산사에 있는 석조물은 그 이름을 노주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처럼도 보인다. 이 석조물은 석등과 대좌, 불탑의 부분을 모아 놓은 듯하다.


석등롱일까? 노주일까? 아리송한 형태

이 노주라 명칭을 붙인 석조물은 대적광전 오른쪽 앞에 있는 석련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노주가 본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노주는 미륵전 정중에 있었는데, 1922년에 대장전의 이전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노주는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석등롱(石燈籠)’이라는 설명되어 있다.

이 서책을 보면 노주와 석등롱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노주는 불전의 정면 양우에 서 있는 2개의 번간(속칭 갯대)으로써 탑상찰간의 전명이다. 탑상찰간은 ‘구륜지간’이라 하여 줄여서 윤간이라고도 하고 ‘노반지주(露盤之柱)’라 하여 노주라고도 약칭하였다. 구륜이란 불탑 꼭대기의 수연 바로 밑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아홉 층의 원륜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석등롱은 노주의 상대물로써 미륵전의 불상에 공양하던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속칭 ‘광명대’라고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 노주라고 하는 석조물은 제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상과 복련의 조각이 일품

이 석조물은 땅 위에 지대석인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상, 중, 하로 나누어 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지대석은 4각형으로써 하나의 석재에 2단으로 조각되었는데, 아랫단의 1변의 길이는 121㎝이다. 각 단의 높이는 아랫단이 13㎝, 위단이 9㎝ 정도이다. 하대석은 위의 모서리 부분을 약간 둥글게 다듬어 16변의 복연을 조각하였고, 각 면의 수직 부분에는 2개의 안상을 선각해 놓았다.



이런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이 석조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나, 그 여러 가지 조각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 없이 다만 우주만을 양각해 놓았다. 1변의 길이는 50㎝이며, 높이는 55㎝이다. 상대석에는 16변의 커다란 앙연이 조각되어 있다. 1변의 길이는 94㎝이고, 높이는 37㎝이다.

제일 위에 얹혀 있는 석조물도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탑의 상륜부에 올리는 보륜과 흡사하다. 이 석조물은 한쪽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상륜부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방형의 대좌와 흡사한 형태의 금산사 노주. 과연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처음 그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는 그 형태가, 오늘 발길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남원시 산동면 식련리 221번지에 있는 승련사는 원래 ‘금강사지’라는 폐사지였다. 이 금강사지는 문수보살의 성지로 전해진다. 이곳의 삼성각 뒤편에는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10m 정도 되는 바위들이 있다. 여러 개의 조각으로 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이 바위에 희한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길게 늘어선 것이 기차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 바위의 넓적한 면에는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 2점과, 그 옆에 내려 쓴 ‘옴마니반메훔’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런 밀교의 문양이 왜 이곳 옛 사지 인근 바위에 새겨진 것일까?


우주의 이치를 상징한 유가심인도

유가심인도는 우주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높이가 70cm 정도로 음각한 유기심인은,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공으로 표시를 했으며, 그 위쪽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는 것이다.

승련사 주지인 경헌스님은 이곳 폐사지에 들어와 처음으로 절을 중창하고, 이 유가심인도를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와서 부적을 파 놓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저 바위에 있는 그림을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부적을 파 놓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대산 적멸보궁 뒤에도 같은 그림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니 밀교의 문양이라는 것이죠. 고려시대에 이곳이 밀교의 수행도량으로 유명했나 봅니다.”



그러면서 이 유가심인도를 찾아보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이 유가심인도에 대해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옛 스님들이 이곳 폐사가 된 금강사에 거처를 정하시고, 저 그림을 부처님의 고행상으로 알고 정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가심인은 얼핏 보면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팔과 몸 다리를 어느 지방의 장인이 조각을 하다가 완성을 하지 못한 듯하다.

“저 유가심인은 머리가 없어요. 아마도 부처님을 상징할 때 저기까지만 조각을 하고, 그 위는 우주를 머리로 삼았다고 볼 수 있죠”

마치 머리가 없는 마애불을 조성한 듯한 유가심인도. 그 위에 머리는 우주가 된다고 하니, 그 깊은 깨달음을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가심인

삼성각 뒤편으로 돌아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곳은 고려 때 절이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금강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무슨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 때의 절이라고만 전해질 뿐이다. 남원지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많은 절들이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혹 금강사도 그 당시에 소실이 된 것이나 아닌지.

바위에는 유가심인도 2점과 옴마니반메훔이란 글씨 말고도,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조성한 흔적들이 보인다. 잘못 본 것인지는 몰라도 안상과 같은 형태로 파 들어간 듯도 하다. 아마도 이 절이 고려시대의 절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밀교의 상징인 유가심인. ‘비밀불교’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 밀교가,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 들어와 수행을 한 흔적이다. 밀교는 중생에서 부처를 향해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의 세계를 말한다. 아마도 승련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유가심인도 그러한 깨달음의 성취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유가심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가 기다려진다.


장수군의 산서면은 태백정간 중 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에서 시작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고 있다.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 뒤, 줄곧 서쪽으로 뻗어내려 성적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 줄기가, 마치 암탉이 양 날개로 알을 품은 듯한 분지가 있어, 옛 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 산서면의 오산에서 임실군 성수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침재로 가다가 보면 마을이 나타난다. 초장마을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산서면 오산리의 안마을로 입구 길가 양편에 두 개의 돌탑이 서 있다. 마을을 바라보면서 우측에 있는 탑은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고, 좌측 소나무 아래에 장승 곁에 있는 탑은 할머니 탑인 여탑이다. 탑 위에 뾰족한 돌을 세워 놓은 것이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다. 맨 위에 돌은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권이종이 태어 난 초장마을

오산리 초장마을은 교육자학인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권이종 박사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독일에 파견한 광부 2기에 지원을 했다. 소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를 한 권이종 박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을 앞 석비에는 ‘초장마을’ 이란 글씨 밑에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써 놓았다. 권이종 박사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하여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2006년 정년퇴직했다.


권이종박사가 태어난 초장마을 석비(위). 위에 뾰족한 돌을 새긴 것이 바로 할아버지 탑이다.
   
길가 양편에 있는 누석탑은 오랜 흔적이

초장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초중반사형’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곳이다. 이는 풀숲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초장마을’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로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원주이씨와 상산이씨가 들어와 살다가 상산이씨는 모두 이주를 해버리고, 현재 원주이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안동권씨들이 마을에 이주를 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누석탑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인 ‘만취정’ 앞에서 만난 어르신은 “저 탑은 우리 어릴 적에도 있었는데 오래된 것인지만 알지,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는 몰라” 라는 대답이시다. 첫눈에 보기에도 남탑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탑은 아마 최근에 새롭게 쌓아 올린 듯하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하는 돌탑

돌로 탑을 쌓아 마을 어귀에 놓는 탑은 누석탑, 혹은 할아버지·할머니 탑이라고 부른다. 누석탑이란 돌을 쌓아올려 봉분처럼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 탑은 강원도 일대서부터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가면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돌탑 앞에서는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해 마을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리기도 한다. 대개는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을 뽑아 제를 올리게 한다. 이 돌탑은 원시형의 신앙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쌓을 때는 시멘트 등은 섞지 않으며, 단순히 돌만 갖고 위로 올라 갈수록 뾰족하게 쌓아올린다.

명당이기에 명사가 배출된다는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 산림청과 유한킴벌리가 주관한 녹색마을 찾기에서 선택이 된 것도 다 돌탑 덕분이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돌탑이 있는 한 마을에는 어떠한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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