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고산성에 가면 정몽주의 암각서가 있다. 푯말에는 ‘만경대 암각서’라고 이정표가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남고산성 안에 있는 남고사 조금 못 미처 길 가에 서 있다. 50여m 정도 바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남고산성이 늘어서 있고, 상벽 바로 안 바위에 적혀져 있는 글이다. 이 근처는 지형으로 보아 남고산성의 두 곳의 장대 중 한 곳인 남장대 인근으로 보인다. 이곳에 왜 정몽주의 시가 암각서로 남아 있는 것일까?

 

이성계의 잔치에 화가나 말을 달린 정몽주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9월.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1337 ~ 1392)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오른다. 남고산성에는 남인문지 근처에 천경대가 있고, 남고사 인근에 만경대가 있다. 그리고 남고사 뒤편 산 정상부근에는 억경대가 자리하고 있다.

 

말을 달려 이곳까지 온 정몽주. 선죽교에서 방원의 철퇴에 맞아 숨이 지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이 변하지 않았던 충신답게, 스스로 고려를 생각하면서 근심을 이어간다.

 

 

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登臨使我不勝情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근심이여

靑山隱約夫餘國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서하던 부여국은

黃葉檳紛百濟城 누른 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九月高風愁客子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짙은데

百年豪氣誤書生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矯首無由望玉京 하염없이 고개들아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시구이다. 이곳 만경대에서 송도를 근심하던 정몽주. 이렇게 글을 남겨놓고 개선장군이 되어 당당하게 송도로 돌아가는 이성계와 함께 이곳을 떠났다.

 

 

 

김의수가 각자한 정몽주의 글

 

당시 시를 지은 정몽주가 이곳 만경대 바위에 각자를 한 것은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영조 22년인 1742년 진장인 김의수가 각자를 한 것이다. 예전에는 바위 앞에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많아 암각서를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을 정리하고 철책을 둘러놓았다.

 

바위를 어렵게 내려가 만경대라고 음각을 한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만경대라는 글씨는 알아볼 수가 있는데, 그 내용은 마모가 되어 글씨조차 판독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다만 글 말미에 보니 각자가 된 글씨보다 조금 크게 병인년에 진장 김의수가 각자를 했다는 글이 보인다. 진장 김의수는 왜 정몽주의 이 길을 이곳 만경대 바위에 새겨 넣었을까? 진장이란 조선 인조 때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진영의 장관을 말한다.

 

아마 진장 김의수는 정몽주의 불사이군의 충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시대를 뛰어넘어 3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이지만, 김의수는 그러한 글을 이곳에 각자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충심을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수많은 세월이 지난 각자마저 흐릿하지만 정몽주의 충심과, 그 충심을 아는 진장 김외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영웅의 교감은 세월을 뛰어넘는 것인지.

전북 완주군은 일개 지자체로서는 전통사찰이 가장 많은 곳이다.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대둔산 서남쪽 자락에 자리한 안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7년인 서기 638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이 될 사찰이다. 6·25 동란 이전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를 가진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6·25 때 불에 타버리고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부도와, 안심사 비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년고찰 대둔산 안심사

 

 

토요일이라 그런지 나들이객으로 인해 길이 막힌다. 안심사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답답하게 막히던 길이 전주 시내를 벗어나면서 시원하게 뚫렸다. 완주군 운주면은 충남 금산과 논산과 접해 있다. 운주면소재지를 지나 논산 양촌면으로 가는 지방도로에서, 좁은 마을길로 3km 이상을 대둔산을 향해 들어가다가 만나게 되는 안심사. 현재 안심사에는 대광전과 산신각, 삼성각, 요사가 있고,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나 부도 등이 있을 경우,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유리 등으로 벽을 내어 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전각이다. 안심사 계단 옆에는 대웅전을 세우기 위해 많은 돌들을 나열해 놓았다. 아마 이곳에 묻혀 있던 주초 등을 찾아낸 것인가 보다. 커다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보니, 과거 안심사의 규모를 대충은 짐작할 만하다.

 

 

 

뛰어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안심사 석조계단

 

보물 제1434호 안심사 석조계단은 부처님의 치아사리 1과와, 의습 10벌을 봉안하기 위해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반 이후 1759년 이전에 조성하였다. 안심사 석조계단은 1613년 조성된 대구 용연사의 석조계단과 친연성을 갖고 있으나, 조각수법 등은 용연사의 석조계단보다 월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심사 석조계단은 앞면과 옆면에 장대석 돌을 놓아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비슷한 크기의 돌 판을 한 줄로 얹었으며 계단 면석에는 연화문과 격자 문양을 조각하였다. 계단의 중앙에는 석종형 부도가 서 있고, 네 귀퉁이에는 장군모양의 차림새를 한 신장상을 사방에 놓았다. 이 신장상들은 신체 부위와 갑옷의 조각기술이 뛰어나다. 앞쪽으로 서 있는 양편의 신장상은 조금 크며, 뒤편의 신장상은 조금 작다.

 

 

 

석종형 부도는 높이가 176cm 정도로 아래는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부도를 올렸다. 아래편의 받침돌에도 조형을 하였다. 위편 봉우리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엷게 조각을 했다. 석조 조형물들은 그 조형 수법이 탁월하고 연화문과 격자문양의 조각수법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뛰어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신장상들의 표정이나 갑옷 무늬 등의 수법은 능에 세워놓은 문인상이나 무인상들보다 더 세련되며,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였다.

 

눈 부라린 신장상에 반하다

 

석조계단의 네 귀퉁이에서 사로 마주하고 있는 무인모습의 신장상. 아마도 사방을 둘러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는 석종형 부도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보다. 신장상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투구를 쓰고 칼을 양손으로 잡고 있다. 칼끝은 아래로 했는데, 금방이라도 무엇을 벨 수 있을 듯하다. 툭 불거진 눈에 주먹코, 굳게 다문 입에 어깨까지 내려온 귀. 얼핏 보아도 석장승과 석불을 혼합시킨 듯한 모습이다. 그러한 신장상들의 모습은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이 앞선다.

 

 

 

갑옷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표현을 한 안심사 석조계단의 신장상. 어느 곳을 가보아도 이렇게 세밀한 조각수법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안심사 석조계단의 가치를 더 높이는가 보다. 토요일 바쁜 걸음으로 달려간 대둔산 자락 안심사에서, 또 하나의 희열을 맛본다. 불거진 눈으로 사방을 지켜내고 있는 신장상들로 인해서.

나이가 어리다고 그래도 한 나라의 임금이었는데, 군으로 강등이 되어 길을 나섰다. 나이어린 단종은 부인과 헤어져 먼먼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결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길을 나선 것이지만, 아마 단종은 언젠가는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길에서 마셨다는 샘물 하나.

 

여주군 북내면 상구리에 있는 골프장에는, 단종임금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로 귀향을 가면서 마신 샘이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현재 이 샘은 여주군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블루헤런이라는 골프장 경내에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낮지 않은 언덕길을 걸어올라, 블루헤런 골프장으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려 어수정을 취재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친절하게 골프장 전동차인 카트로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직원의 안내로 카트를 타고가면서, 몇 번이나 멈춰야했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꽤 먼 거리를 돌아 어수정에 도착을 했다.

 

단종은 샘물을 마시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수정을 찾아 나선 것은 여주군 상교리에 거주하는, 그림을 그리는 아우가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예전에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는 것이다. 상교리는 지금도 몇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예전에 이 마을을 '주막거리'라고 했으며, 지금도 집터가 있고 그릇, 기와 등의 파편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우재라는 아우의 도자기 전시실 앞을 지난 단종임금이, 고개를 넘어 여주로 향하면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다. 걸어보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금도 꽤 시간이 걸리는 고개다. 고개를 넘어 여주로 가면서 만난 옹달샘. 당시에는 그저 산중에 있는 작은 샘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어수정. 남한강을 따라 이포나루를 지난 단종은, 파사성을 거친 후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이곳 상구리 어수정에서 타는 목을 축인 후에, 여주를 거쳐 원주로 길을 잡았다.

 

물론 세조 3년인 1457년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기는 했지만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라도 타고 길을 나섰겠지만, 한양을 떠나는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아마 정이 많은 단종은 이 샘에서 자신이 물을 마시기보다는, 걷는 사람들을 위해 행렬을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넘느라 목이 탔을 텐데 산 속 호젓한 곳에서 만난 샘물이, 행렬의 누군인들 반갑지 않았겠는가?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종에게 먼저 물을 떠다 올렸을 테고, 그 때부터 이 샘은 '단종 어수정(御水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수정은 한 맺힌 역사를 알고 있을까?

 

이 물을 마시면서 어린 단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귀향에서 돌아오는 날, 다시 이 샘에서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샘물을 마시고 떠난 단종은, 다시는 이 길을 돌아오지 못했다. 영월 땅에서 어린 단종은 이 호젓한 산길에 있는 샘물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이 샘물을 다시 마실 수만 있다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테니까.

 

 

 

15분 정도 카트를 타고 구불구불 골프장 길을 돌아 도착한 어수정. 현재의 샘물은 골프장 내에 석축으로 주변을 둘러 조형이 되었다. 아마 그 옛날이야 조그마한 산골짝의 옹달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은 2단 석축으로 둘러쌓아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어수정 앞에 세운 안내판이 없었다면, 아무도 이 샘이 한이 서린 샘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샘의 너비는 약 3.3m 정도이고, 둘레는 10여 m가 된다. 샘의 폭은 2.8~2.11m 정도에 수심이 2.25m 정도이다.

 

어수정에서 어린 단종을 그려내다

 

한때 이 어수정은 사철 내내 수량이 풍부하고 가뭄에도 마르지가 않아서, 일대의 식용수는 물론 농업용수로도 사용이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샘 안을 들여다보니 낙엽이 떠 있는 샘은 물이 한없이 맑다. 가끔 바닥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 물방울이 생기고 여울이 지기도 한다. 아직도 물이 쉬지 않고 솟아나오고 있는 어수정. 이 샘에 얽힌 한 맺힌 사연들을 지나는 사람들은 알고나 있을까?

 

다음 스카이뷰로 본 어수정. 붉은 선 안이 골프장 내에 있는 '어수정'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래도 말끔하게 보존이 된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어 고맙기만 하다. 비록 단종이 귀향을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목을 축인 샘이요 물이 깊어 떠먹을 수는 없었지만, 샘 앞에 서서 타는 목을 축였을 단종을 그린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앞으로 흐르는 조종천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조종암(朝宗巖).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조종암은, 어찌 보면 나라가 약한 탓에 느끼는 울분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조종암에는 바위에 글씨를 새긴 암각문과 비석, 그리고 단지 등의 유적을 합해 이르는 장소이다. 앞으로는 얼어붙은 조종천이 흐르는데, 찬바람이 옷깃으로 파고 들어온다. 조종암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조종암에 스며든 슬픈 역사

 

효종임금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 해 강화도로 있던 효종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에 항복을 하자, 형인 소현세자와 오달제 등과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8년간이나 선양에 머물던 효종은,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한 형 소현세자가 4월에 세상을 떠나자, 5월에 돌아왔다. 효종은 그 때부터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입각해 '숭명배청(崇明排靑)'의 의식이 높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효종임금과 송시열이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효종으로서는, 그 치욕을 씻을 길이 오직 북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위에는 朝宗巖(조종암), 思無邪(사무사),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 등의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그리고 솟은 바위 위에는 앞으로 흐르는 조종천을 굽어보는 비석이 1기 서있고, 그 밑으로는 제사를 지내던 단지가 보인다.

 

 

 

효종의 슬픔 마음이 새겨진 바위

 

조종암은 조선 숙종 10년인 1684년에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내용인 사무사를 새겨 넣었다. 또한 효종이 대신에게 내려준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라는 글인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를 당시 가평군수인 이제두에게 보내어, 깨끗한 장소를 정해 새기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8년간이나 청에 잡혀가 있으면서, 약한 나라에 태어났음을 슬퍼했을 효종. 얼마나 그 아픔이 마음속에 깊게 자리했을까? 그러한 효종의 명에 따라 이제두, 허격, 백해명 등 여러 선비가 힘을 합하여 위 글귀와, 임진왜란 때 몽진을 해야 하는 고통을 당한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이란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선조의 후손인 낭선군 이우의 글로 임금을 뵙는다는 뜻인 '조종암'을 바위에 새기고 제사를 지냈다.

 

이런 북벌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담고 있는 조종암이지만, 그 내면에는 약한 나라의 슬픔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효종은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새기라 했고. 선조의 글에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 '조종'이라는 뜻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 할 조종암

 

조종암은 단지 바위에 암각문을 새긴 곳이 아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통해 아픔을 당한 사연이 깃든 곳이다. 효종과 선조는 외침에 의한 고통을 당한 임금들이다. 이러한 마음을 함께 적어 놓은 조종암은, 약한 나라가 당해야하는 슬픔을 보여주고 있다. 약한 나라는 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 할 곳이다.

 

 

얼어붙은 조종천에서 부는 바람이 차다. 바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마음이 아프다. 지금이야 그저 '암각문이겠지, 역사를 기록한 한 장소이겠지'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시는 외침에 의해서 나라가 겪는 수모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조종암을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봉화법전에서 울진으로 가다가 보면 삼거리에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울진금강소나무 군락지라는 이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10km 정도를 들어 가다가 보면 포장이 안 된 곳도 나오고, 좁은 길이라 차가 마주치면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그렇게 찾아들어간 곳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소광리황장봉계표석'이 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262에 속하는 이곳을 가다가 보면 우측에 MBC대하드라마 <영웅시대>의 야외 세트장이 있다. 퇴락한 이 세트장을 둘러보고 길을 재촉해 찾아 간 황장봉계표석. 자연암석에 글을 새겨 놓은 경계표시다. 그리고 보니 벌써 다녀온지가 꽤 오래되었다.

처음만난 봉계표석, 기대를 하고 찾아가

솔직히 이 황장봉계표석을 찾아갈 때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처음으로 이런 표석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반문화재와 같은 멋진 부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도, 정작 이런 부분에는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기대가 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앞에 도착해보니 계곡을 흐르는 하천가에 커다란 자연암반이 있고, 그 주위에 철책을 둘러놓았다.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황장봉계표석이란다.

황장봉계표석이라는 말에 난 ‘금표비(禁標碑)’ 같은 것으로 생각을 했다. '모르면 물어보라, 그리고 찾아보라'는 나름대로의 문화재 답사에 대한 나만의 방법이 있었지만, 집 한 채 없는 곳으로 들어갔으니 물어 볼 곳도 없다. 그저 안내판을 참고하는 수밖에.

그동안 황장표석은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 입구, 영월 황장골, 인제 한계리 등에서 발견이 되었지만, 울진소광리 황장금표는 이보다 시기가 앞선다고 한다. 황장금표가 있는 바위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울진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있으니, 이곳에 금표석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무지한 답사, 그래도 계속하면 눈을 떠

안내판을 몇 번이고 읽어본 다음에 바위를 찬찬히 돌아본다. 자세히는 볼 수 없는 음각을 한 글자들이 보인다. 설명에는 "황장봉계 계지명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 산직명길"이라고 쓰여 있다고 하나, 글이 마모가 되어 쉽게 판독이 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오른쪽 5행 19자, 왼쪽 1행 4자로 되어 있으며, 황장목을 벌채할 수 없는 지역이 생달현(生達峴), 안일왕산(安一王山), 대리(大里), 당성(堂城)의 네 지역이며 관리 책임자는 명길(命吉)이라는 산지기라는 것이다

자연암반에다가 글을 새겨 넣은 봉계표석. 지금은 냇물이 흐르는 쪽에 글이 있고 그 위에 길이 있지만, 예전에는 이 냇가에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장봉산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 제도는 숙종 6년인 1680년 처음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지역으로 확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소광리황장봉계표석을 시작으로 원주, 인제, 영월 등에도 봉계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관곽으로 사용하기 위한 황장목을 확보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한 조치였다. 아마 당시에는 나무가 유일한 땔감이었으니 벌채가 심했을 테고, 그런 벌채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금강송 베면 다쳐', 그때나 지금이나 벌목은


이 자연암반에 새겨 넣은 19자의 봉계금표석이 참 고맙다고 느낀 것은 바로 울진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이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봉계표석으로 인해 이곳의 소나무 군락지가 보호를 받았으니 말이다. 조선조 때는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서 사람들이 소나무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소나무 보호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수차 거론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현종 9년인 1668년에는 백성들이 큰 소나무를 마구 베어가므로 엄단할 것을 공포하였다. 사복이 범법을 하였을 때에는, 그 주인까지 논죄 를 따진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송금사목, 송금절목, 송계절목, 금산, 송전, 봉산 등 소나무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지함으로 인해 실망을 하고, 그 뜻을 알고 난 후에는 또 한 가지를 배웠다는 뿌듯함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답사의 묘미다. 황장봉계표석의 답사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날이 저물어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못 들어 간 것이 내내 서운하지만, 다음번 답사 때는 군락지까지 꼭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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