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풀신이다.신라말기의 고승으로 827년에 태어나 898년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마다 모두 풍수에 기인하여 창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대다수가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원의 풍수를 보아 적당한 곳에 절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도선국사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에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안내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에 소재하고 있는 석불입상에 관해서는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문화재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안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용담사가 언제적에 지어진 절인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황당한 긇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증없이 적어 놓은 글이 문화를 잘못 알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써 천년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젏을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아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떄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 어깨부근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자연석 위를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번지에 소재한 각연사.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각연사에는 보물 제433호로 지정 된 석조비로나좌불상이 있다. 우선 이 불상에 대한 표현부터 먼저 하고 가자. 각연사를 찾아 비로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는 조각. 사람의 솜씨는 아닌 듯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었다는 신라 장인들의 솜씨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의 담당자를 찾아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종무실에 가서 비로자나불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시방세계를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

스님이 따듯하게 끓여 타 주신 차 한 잔을 마시고, 비로전 안으로 들어가 촬영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연신 감탄이 그치지를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이며,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섬세한 조각은 처음인 듯하다.

비로자나불은 시방제불을 포괄하는 법신불로 알려져 있으며, 노사나불이라고도 부른다. 각연사의 바로나자불 좌상은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좌대의 조각도 훌륭하지만, 광배의 조각은 그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이리도 정교하게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 완벽하게 보전됐을까?

까맣게 칠을 한 작은 소라 모양으로 머리칼을 표현한 소발.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눈과 코, 입의 표현은 완벽할 정도이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은 앞에 마주 한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었는데, 옷 주름은 간략하게 표현을 하여 전체적인 모습을 무겁지 않게 하였다.



뛰어난 광배의 조각,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석불좌상의 뒤편에 놓인 광배는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다. 흡사 오뚝이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일석으로 조성한 광배를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물방울처럼 생긴 광배에는 몸에서 뿜어 나오는 불을 형상화 한 듯, 불꽃을 조각하여 놓았다. 그리고 머리와 불상의 양편으로 각각 3구씩의 작은 부처인 화불이 조각돼 있다.




머리 위에도 3구의 화불이 좌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광배에 아홉 분의 화불을 새겨 넣었다. 광배의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를 찬찬히 살펴본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 그리고 뛰어난 조화로움. 도대체 인간의 조각품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단지 망치와 정 하나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가능하다니. 광배와 잘 어울리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선조들의 예술세계가 그저 놀랍다는 것뿐이다.


연화대좌에서도 뛰어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연꽃으로 둘러싼 대좌는 세부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조각품인 각연사 석조비로나자불 좌상. 사진을 찍고 난 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삼배를 한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서원하는 것은, 이 석불좌상에 기원을 하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이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다시는 훼손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북지장사는 신라 소지왕 7년인 485년에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팔공산 자락의 절 중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깊다고 하는 북지장사의 임시 대웅전에는, 삼존불 곁에 석불좌상 한 기가 있다. 이 불상은 북지장사 대웅전 뒤쪽 땅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이 불상은 발견될 당시에 광배와 연화좌는 없었으며, 화강암으로 조성한 좌불상 한 기만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좌불상은 현재 북지장사의 대웅전은 복원 공사로 인해, 임시 대웅전에 모셔두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은, 지장보살 좌상으로 보인다.

온화한 얼굴의 통일신라 말기의 좌상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의 얼굴은 온화한 인상이다. 그저 옛 석불답지 않게 말끔하게 조각이 되어, 언뜻 보면 요즈음의 석조미술품으로 볼 수도 있는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단정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한 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옷은 주름의 조각선이 가늘고 약하게 형식화되어 시대가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며, 단정한 자태와 온화한 인상 등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미소를 띤 듯 노한 듯, 마음가짐이려니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얼핏 보아서는 그리 오래된 석불 같지가 않다. 문화재에 깊이가 없는 사람들은 그저 요즈음에 조성한 것으로 착각할 듯. 그렇게 고풍스럽지 않고 너무 말끔하단 생각이다. 그러나 그 연대가 신라 말이라고 하면, 이미 천년을 훌쩍 지났다는 것에 놀라고 만다.

아마도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을 만든 장인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 표면을 닦고 또 갈아낸 것일까? 이런 정도로 곱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 세월 또한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안내판의 설명을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도 그냥 지나쳤을 판이니 말이다.




곱게 표면을 갈아놓은 석불의 얼굴에는 미소를 띤 듯도 하고, 노여움을 가진 듯도 하다.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미소로도, 아니면 노한 듯도 보이는 대구 팔공산 자락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 그것 하나가 바로 옛 석불에서 만나는 신비로움이 아닐는지. 마음을 열고 석불을 바라다본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미소를 찾아낸다.



부처님 앞에 마음 한 자락 내려놓고

삼배를 하고 난 후, 고개를 든다. 한 낮의 햇볕을 받은 석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은 이 사바세계에서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악몽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한다.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아야 하는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전한다. 지장보살은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석가모니에게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악한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 지장보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 역시 이곳에서 서원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기운이 자라는 데 까지, 내 나라에 있는 문화재를 돌아보다가 명을 걷을 수 있기를. 그것이 10월 7일 팔공산 기슭 옛 고찰 북지장사에서 나의 서원이다.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띤 지장보살 앞에 내 마음 한 자락을 내려놓는다. 그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44번지에 자리한 약사여래불. 속칭 ‘팔공산 갓바위’ 라고 부르는 해발 850m의 험준한 팔공산 남쪽 관봉의 정상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좌불상이다. 관봉을 ‘갓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불상의 머리에 마치 갓을 쓴 듯한 넓적한 돌이 올려져 있어서 유래한 것이다.

7일 아침 일찍 남원을 출발했다. 예정으로는 갓바위를 거쳐, 동화사와 또 한 곳을 둘러보리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일인가? 88도로 좁은 길에서 버스가 그만 고장이 나, 오도 가도 못하고 1시간 이상을 지체했다. 대체된 버스를 갈아타고 출발을 했으나. 예정보다 근 1시간 이상을 지체한 것이다.


9세기에 조성된 당시 최고의 걸작품

10여일이 가깝게 몸살감기로 진이 다 빠져버렸다. 갓바위 주차장에 버스를 대고 걸어 올라가는 길이 그리 험할 줄이야. 벌써 7차례나 갓바위를 올랐다. 여느 때 같으면 한 걸음에 오르던 갓바위다. 그러나 기운이 쇠할 대로 쇠한 뒤라, 조금만 계단을 올라도 숨이 차다. 몇 번을 쉬면서 겨우 갓바위에 올랐다.

보물 제431호 갓바위 부처님은 약사여래불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뚜렷하다. 머리 위에 커다란 돌을 이고 있어, 갓바위라 부른다고도 한다. 언제보아도 갓바위 부처님은 근엄하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탄력이 있고,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귀는 어깨에 닿을 듯 늘어지고, 굵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어깨는 일반적인 석불에 비해 위로 약간 올라간 듯하다. 넓은 어깨는 반듯해서 당당하고 건장하다. 그러나 신체의 부위는 가슴이 평판적이라 조금은 둔한 느낌을 준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렸는데, 조금은 투박한 듯하다.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과 유사한 손모양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닮았다. 그러나 불상의 왼손바닥 안에 조그만 약함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약사여래불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수능이 시작되면 바빠지는 갓바위 부처님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대좌는 4각형인데, 앞면과 옆면으로 법의 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이 광배의 구실을 하고 있으나, 뒷면의 바위하고는 떨어져 따로 존재하고 있다.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 도식화된 옷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8세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칠 데로 지쳤지만 우선 손을 모으고 참배를 한다. 앞에 놓인 자리에 앉아 겨우 고개를 숙인다. 많은 사람들의 서원을 비는 소리가 조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든다. 자리들을 차지하느라 일행을 불러대는 사람들도 있다. 수능 100일전부터 갓바위 부처님은 몹시 바빠지신다.

자녀들의 좋은 성적을 기원하기 위한 부모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자신의 아이가 좀 더 나은 점수를 받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 것이다. 바위에 손과 이마를 대고 비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곳에서는 어떤 형태로 기원을 하든지,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는다. 비는 사람들마다 각자 자신의 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갓바위 부처님은 늘 바쁘시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서원을 일일이 귀담아 들으시고, 그것을 들어 주시려면 아마 쉴 틈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갓바위 부처님은 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들의 원을 들어주시나 보다. 오늘도 사람들은 갓바위 부처님께 서원을 한다. 그 많은 중생들을 일일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갓바위 부처님.

“얘야, 나 요즘 엄청 바쁘거든. 네 서원은 네가 알아서 이루어라”


전북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110 - 6번지에는 보물 제914호로 지정이 된 석불입상 2기가 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야산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고목이 서 있는 뒤편에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모셨는데,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확인되었다.

두 불상은 모두 비슷한 형식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불상이 왼쪽 불상보다 약간 커서 원래는 삼존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른쪽의 큰 불상은 뒤편의 광배가 깨지고 대좌의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완전한 모습이다.


눈이 파여진 2기의 석불입상

보화리는 정읍시 소성면사무소 가까이 있다. 보화리 석불입상을 찾아가니 야산에 한 폭의 그림같이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돌계단을 오르니 보물인 석불입상의 안내판이 있고, 곁에는 전각 안에 석불 2기가 가지런히 서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2기의 석불입상의 두 눈이 파여져 있다. 움푹 파여진 눈이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입부분도 파여져 있는 이 2기의 석불입상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기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큼직한 소발이 솟아 있는데, 얼굴 역시 길고 풍만하며 부드러워 백제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법의인데, 좌편견단으로 처리를 하였으며, 속에는 속옷과 아래엔 치마를 받쳐 입었다. 옷 주름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한 편으로 어깨나 손, 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팔이 없어진 작은 불상도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의 각 부분은 마모가 심하나 입가로부터 양쪽 볼에까지 미소를 짓고 있어 어린 아이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소경에게 눈을 주셨을까?

석불을 이리저리 돌아보고 뒤돌아 나오면서도, 두 눈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누가 저 부처님들의 눈을 가져간 것일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인지라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정자에 마을 어르신들 몇 분이 담소를 하고 계시다. 보화리 석불의 눈은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으나 모르시겠단다. 언제부터 저렇게 눈이 파여져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모습으로 서 계셨단다.



팔이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흠집이 생긴 것이야 세월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두 눈을 저리도 움푹 파일 정도로 훼손을 시켰다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일부러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차를 돌려 마을을 떠나다가 우연히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그저 궁금하던 것이라 재차 물었다. 석불의 눈이 왜 없어졌느냐고.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부처님께서 마을에 눈을 못 뜬 사람들이 있어서 주셨나 보지’. 그랬을까? 부처님께서 두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두 눈을 시주를 하셨을까? 그렇게라도 대답을 들으니, 속이 좀 시원하다.



두 분 부처님의 눈은 도대체 누구에게 시주를 하셨을까? 아니면 세상이 하도 추악한 모습들이 많아 스스로 눈을 멀게 하셨을까? 그도 아니면 부처님의 두 눈을 누가 훔쳐갔나? 대답 없는 석불의 얼굴에는 자비가 가득하다. 그저 그렇게 온 세상을 다 보겠다는 듯. 아마도 눈이 있으면 한부분만 보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온 세상을 어루만지기 위해 눈을 없앤 것은 아닌지. 그 큰 뜻을 감히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대답 없는 두 분 석불입상 쪽을 바라보니, 저녁 해가 설핏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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