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82에 소재한 지리산 내원사. 그 대웅전 옆에 서 있는 전각 안에는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보물 제1021호호로 지정된 이 석불은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놓은 돌로 만든 비로자나불상이다.

8월 13일,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섰다. 비가 정신없이 내리기 시작하다. 내원사를 들어가는 길 곳곳이 공사중이다. 지난 번 비로 인해 수해를 입은 곳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내원사 삼층석탑 뒤편 전각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우리나라 비로자나불 중 제일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의 흔적이 보여

현 대원사에 소재한 석남암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비바람에 의해 심하게 마멸이 되었기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외형만 보아도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이 되어있다.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는 얼굴은 부피감이 풍부하여, 그 형태가 균형이 잘 맞으며 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석조 비로자나불의 상체는 건장한 모습이다. 자연스러운 가슴과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균형미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옷주름 역시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의 옷주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제적으로 알맞은 체형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나 귀의 크기 등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가 되어있다. 수인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에서, 이 불상이 비로자나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앞에 수미단을 놓아 가려져 있는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졌는데, 8각의 하대에는 아래를 향한 큼직한 연꽃무늬를 새겼다.

중대는 8각의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두 겹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0 광배는 신체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광배는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져, 약 3분의 1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가장 오래된 석조 비로자나불

대좌 중앙의 구멍에 있었던 사리호 표면에 기록된 글에는, 신라 혜공왕 2년인 766년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신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아 이 불상은 1250년 정도가 지난 고불이다. 석남암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중에서 가장 빠른 조성 예로 기록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현재 이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보물 제10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소중한 문화재, 그것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을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깨지고 훼손되어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문화재, 그리고 온통 낙서가 된 낙서판인 벽과 명승지. 그것이 과연 우리가 후손들에게 떳떳이 줄 수 있는 것일까? 오늘 깊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남원으로 와서 생활을 한지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정작 남원 밖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주 하던 남원 답사를, 정작 남원으로 내려와서는 등한시 한 듯하다.

8월 2일. 일과를 마치고 6시가 넘어 답사에 나섰다. 두어 곳 돌아보려니 하고 나선 길이다. 남원에서 곡성으로 나가다 보면,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65번지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곡성으로 나가는 길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좁은 하천 곁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

마을 진입로를 들어서니 석불입상의 위부분이 보인다. 주변은 비닐하우스와 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는 거대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아마도 고려의 숙원인 북진정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불상이나 석탑, 그리고 절 등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古土)를 찾겠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지당리 석불입상을 처음 보는 순간에 느낀 점은, 장중하다는 생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그 당당한 모습은 사람을 압도한다. 지당리 석불입상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신, 대좌를 새긴 불상이다. 현재 높이는 3.63m 정도이지만, 땅 속에 뭍인 대좌를 감안하면 4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광만 조각을 한 특이한 형태

지당리 석불입상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다. 상투가 너무 커서 투박해 보이는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좌우대칭으로 곡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법의는 가슴부분을 깊게 파 뚜렷한 U자형의 표현을 굵게 하였다.

이 석불입상의 어깨는 1.15m로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양 팔에 걸쳐진 소맷자락은 발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 부분만 광배로 표현을 하였다. 두광의 지름이 1.82m 정도로 상당히 크다. 머리광배의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둘레에는 원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석불입상의 두 팔은 어디로 갔을까?

머리광배에 있는 연꽃무늬 등 세부표현은 상당히 간략화 되어 있어, 섬세함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볼 때 인근에 있는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불상의 체구가 거대하고, 조각기법이 대담하고 거침이 없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당당한 고려의 기개를 상징하듯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석불입상. 그 보호철책 밭으로는 석물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예전 절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한 가지 이 석불입상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두 팔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팔을 끼웠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팔이 있었다고 하면 좀 더 자세하게 이 석불입상의 존재를 알만한데, 팔이 사라졌음이 아쉽다.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렇게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는 날은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문화재 답사를 계속하는 한은.

여름철 답사는 평탄치가 않다. 특히 산에 문화재가 있는 경우에는 곤욕을 치르기가 일쑤이다. 비가 오고 난 후 부쩍 키가 자라버린 각종 풀이며, 넝쿨들이 길을 가로막기가 일쑤이며, 땀 냄새를 맡은 날파리며 산 모기들이 극성스럽게 달라붙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여름철의 문화재 답사이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담양 분향리 석불입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길을 지나다가 이정표가 보여 무작정 찾아들어간 곳이다. 그러나 마을 분들에게 물아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는 대답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지나시다가


“그 돌부처 저 산 위에 있어. 이리로 돌아 올라가“

라고 말씀을 하신다. 마침 알려주신 곳으로 가니 작은 토굴 하나가 있고, 그 앞에 안내판이 걸려있다.

가로막힌 풀을 헤치고 산을 올라

작은 암자처럼 생긴 산 밑 절로 들어갔다. 이곳에 석불입상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대답은 산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고 한다. 처음엔 그래도 길처럼 나 있더니, 조금 더 올라가니 대와 풀들로 인해 길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 곳 역시 남다를 바 없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대밭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나마 길의 흔적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날파리와 모기떼가 달라붙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여름철 문화재 답사의 가장 큰 고통이다.


대숲으로 들어가 대나무 잎을 헤쳐 가며 산길을 오르다보니 저만큼 석불입상의 윗부분이 보인다. 석불입상 주변은 모두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놓아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자연과 스스로 어우러진 모습을 기대했는데, 영 사각으로 발라놓은 시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랜 풍상에 훼손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연화좌대와 불상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낮아 거의 민머리 형태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한데 귀는 짧은 편인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고, 코는 누가 떼어내 시멘으로 발라놓았다. 전체적인 표정은 둔화된 모습이다. 양 눈썹 사이와 코, 입 등은 형식화 되어있으며, 마모가 심해 자세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석불은 2m가 넘는 비교적 큰 불상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이렇게 큰 석불입상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는데 간격이 넓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에서 굵은 곡선으로 물결모양을 그리다가, 양쪽 다리 밑으로 내려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외곽으로는 한 줄 띠를 돌려 마무리를 하였으며, 양쪽 팔에 걸친 옷자락은 직선으로 길게 늘어뜨려 다리 하단으로 내리뻗어 있다. 팔에 걸린 법의의 소매 끝자락은 약간 밖으로 외반되어 옷 주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발은 길게 늘어진 옷주름에 가린 채 발등만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발밑에 놓인 연화대좌는 8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16잎의 앙화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수인이다. 양쪽 손바닥을 안으로 구부려 서로 대치하게 하여 허리춤에 대고 있다. 특히 왼손에는 약병을 쥐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약사여래석불입상으로 볼 수 있다. 뒷면은 머리 부분에서 두발이 보이며 그 외에서는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옷주름 양식이나 수인 등은, 보기 힘든 특이한 기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이 조금은 편안하지 않은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석불입상의 형태가 뒤로 약간 젖혀져 있어 거만스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거만한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일까?


아마도 손에 든 약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쳤기 때문은 아닌지. 달라붙는 모기들을 쫓아내며 괜히 헛웃음을 날린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산으로 들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런 황당한 생각이 힘든 답사 길을 조금은 가시게 하는 것을.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소재한 한재초등학교. 이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수령 600년이 넘었다는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이 된 ‘대치리 느티나무’와, 그 옆에 서 있는 석불이다.

이 석불은 민간신앙의 산물로 여겼던 것으로, 제작 시기는 후백제 당시로 추정한다. 원래 이 석불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파내 한재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온 것이다. 이 석불이 이 자리에 옮겨진 것은 지역주민의 꿈에 나타나서라고 한다. 오래도록 땅 속에 묻혀있기가 답답했던가 보다.


현재도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힌 듯 보이는 이 석불은 그 남은 형태로 보아 입상인 듯하다. 머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크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둥글게 조각하였는데 전혀 알아볼 수거 없다. 팔은 떨어져 나간 듯 하나 흔적이 남아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있다.

오랜 풍화에 마모가 심하게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섬세하지가 않다. 아마도 후백제 당시 미륵신앙의 산물로 여겨진다.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석불입상. 그 서 있는 자리 하나만으로도 눈여겨 볼만하다.





머리위에는 상투와 같이 솟아있으며 귀는 목까지 내려져 있다. 얼굴은 둥근편이나 모모가 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있다. 팔은 훼손이 되었으며 손은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얼굴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 놓은 듯하다.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한재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받침돌의 중대석에 나한의 안면을 새긴 독특한 석불좌상. 그런데 이 받침돌의 석재가 제 짝들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만일 이 받침돌이 제 것들이라면 이런 독특한 석불좌상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만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경남 거창군 거창읍 김천리에 소재한 거창박물관 경내 야외에 자리하고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여래좌상은 마리면 말흘리 송림마을의 절터에서 발굴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가, 박물관을 개관할 당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조여래좌상은 민머리인 소발에 머리위에는 무엇인가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듯하며,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훼손이 심한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이 석불좌상은 얼굴도 심하게 훼손이 되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귀가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이 되었으며, 눈은 가늘고 옆으로 길게 표현을 해 눈초리가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코와 입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다. 법의는 양어깨에 통견으로 걸쳐 길게 늘어트렸으며, 여러 가닥의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소매 부분에는 여러 갈래의 좁은 주름을 만들었으나 훼손이 심하다. 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길게 늘어진 소매 끝으로 나온 팔의 모습이나 손의 형태는 심하게 훼손이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손을 가슴위로 끌어올려 손바닥을 마주한 것처럼 보인다.




중대석에 나한을 새긴 독특한 기법

이 석불좌상은 연꽃받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형태로 조형이 되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앞면이 떨어져 나가 제대로 된 형태를 알기보기가 힘들다. 다만 가슴에 모은 손 밑이나 무릎 위에 보이는 법의의 형태로 볼 때 속옷을 입고 매듭을 묶은 듯하다. 이런 형태의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면,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을 한 아름다운 석불좌상이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불상받침인 연화대는 송림마을에 있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짜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하기에 이 세 부분으로 나눠진 연화대가 제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현재 연화대는 상, 중, 하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하대석의 경우에는 훼손이 심하여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다.



상대석은 넓게 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위가 넓고 아래로 비스듬히 좁아지게 하였다. 위 받침돌에는 위를 향한 앙련을 큼지막하게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경우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재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제 짝이라고 한다면, 그 주변을 앙련의 꽃잎이 아래로 향하게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특징은 바로 가운데 돌인 중대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중대석에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이 안면상은 나한상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중대석에 나한상의 안면을 조각한 예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나한상을 조각한 중대석으로 인해, 이 석조여래좌상의 조형미가 한층 뛰어나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그 모습 하나하나에서 뛰어난 신라의 석조미술을 알아내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다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비바람에 씻긴 채 방치가 되어있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심하게 훼손이 된 모습으로 두 손을 마주하고 있는 석불좌상. 아마도 우리 후손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아니었을까? 6월 10일 거창군의 답사에서 만나본 많은 문화재 중, 가장 마음 아픈 사연을 지닌 석불좌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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