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계단 아래에 보면, 다리가 없는 석조미륵보살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60년경 봉산동에 있던 옛 활터인 학봉정의 과녁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 후 보현사 앞뜰로 옮겨졌다가 춘천 소재 강원도 향토박물관에서 보관을 하다가, 2001년 원주시립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천왕사지 미륵보살입상




이 미륵보살입상은 천왕사 터에 있던 것이라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천왕사는 봉산동의 옛 활터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천왕사지가 어디인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산동 당간지주가 천왕사에 서 있던 것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 이 미륵보살입상도 인근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천왕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한 절이라는 것 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미륵보살입상도 당간지주가 서 있는 천왕사지에 있던 것을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어, 옛 활터에 버려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미륵보살입상은 허벅지 아래의 다리가 훼손이 되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윗부분의 크기로 보아 성인들의 키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 지역의 장인에 의해 조성한 것으로 보여

이 천왕사지석조미륵입상은 두발을 높게 감아 올려 망건을 쓴 것처럼 보인다. 옆에서 보면 관의 모양새가 확실한 것이, 미륵입상이기보다는 문인석에 가까운 머리의 제관 모양이다. 또한 가운데가 솟아있고, 옆으로 둥근 모양을 한 것을 보아도 확실하다.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가 있어 이 석조물이 석조미륵입상임을 알 수 있다.



미륵보살입상의 얼굴은 통통한 편이며 적당히 살이 붙어 있다. 눈과 코 입도 중앙으로 모여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태와는 다르다. 그저 편안하고 풍요로운 모습으로 조각이 되었다. 귀는 석불의 귀들이 크게 표현한 데 비해, 일반적인 사람의 얼굴에서 보이는 형태로 표현을 하였다. 전체적인 얼굴의 모습을 보면 석불의 특징적인 형태를 벗어나 있다.

수인은 가슴께로 손을 올렸는데, 오른손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있다. 남은 손가락은 법의를 묶은 끈을 잡고 있는 듯하다. 왼손은 허리께에 대고 있는데, 손목을 꺾어 손바닥을 앞으로 펴 보이고 있다. 이 미륵보살입상의 특징은 양팔이 몸에서 떨어져 팔과 몸 사이에 맞닿는 부분이 뚫어져 있다는 점이다.



문인석에 가까운 조각수법이 특이해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법의의 주름은 가슴과 아랫배에서 U자 모양으로 감아 올렸다. 법의의 한 자락은 오른팔에 걸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또 다른 옷 주름은 가운데 배에서 나비매듭을 엮었으며, 부챗살 모양으로 퍼진 주름은 몸 아래 하반신으로 곧게 흘러내린다. 다리 부분이 훼손이 되어서 다리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머리와 상반신의 모습으로 볼 때 발에는 목화를 신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주지역에는 이 석보미륵보살입상 외에도 비슷한 크기의 세구의 석조보살입상이 남아있다. 이 세구의 보살입상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미륵보살입상은 원주 지역을 활동 근거지로 삼은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이다. 다리가 훼손된 석조미륵보살입상. 전체적인 조성기법이 일반적인 석불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깊이 있게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광덕리 산21에 소재한 광덕사. 이 절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49년 한 보살은 석불의 꿈을 꾸고, 석불 옆에 세 칸의 작은 암자를 지은 뒤 광덕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인 10세기를 전후해 조성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석불입상의 내력으로 보아, 고려 때 이곳에 절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광덕사는 도안면 소재지에서 충주 방면으로 36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도안농공단지입구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1km 쯤 접어들면 도안면 광덕2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마을회관에서 700여m쯤 더 들어가면 농경지를 지나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진 작은 절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광덕사다.


어쩌다가 쇠 머리띠까지

광덕사는 작은 절이다. 절 경내에는 모두 3동의 전각이 있다. 절로 들어서면 우측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가 4.8m에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특이하게 이마에는 쇠 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는 목과 머리에 균열이 생겨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석불은 그 크기에 비해 간단하게 조성했다. 미간에 있어야 할 백호는 보이지가 않는다. 양 귀는 길게 늘어졌으나 어깨에는 닿지 않았다. 눈은 가늘게 반쯤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석불의 인상은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오래 동안 노천에서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서인지 선명하지 않은 부분이 보인다.




두 개의 돌로 조성된 석불입상

광덕사 석불입상은 두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 있다. 연화대좌와 석불이 같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함께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80cm의 높이로 꾸몄으며, 꽃잎 등을 표현한 수법이 투박하다. 고려 초기 지방에서 나타나는 석불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이 석불의 연호대좌와 석불의 조각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연화대좌 위에 세운 석불입상은 일석으로 꾸며졌다. 머리는 큰 편이며 이목구비가 큼지막하게 표현을 했다. 오랜 세월 풍우에 씻겨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는데,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듯하다. 왼손을 배에 붙여 손바닥을 안으로 향했다. 법의는 양편 어깨서부터 주름이 잡혀있으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U 자형으로 표현을 하였다.



문화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광덕사 석불입상은 1949년에 암자가 지어지면서 나름대로 보존이 잘되고 있다. 이렇게 절 경내에 있지 않고, 야외에 있는 석불이나 탑 등은 훼손이 심하다. 아무래도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보니,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광덕사 석불입상의 이마에 머리띠를 두른 것도 경내에 있어 가능한 것이다. 야외에 있었다고 하면 관리가 안 돼 파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갑자기 지역마다 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고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정작 지역의 문화를 잘 이용하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가 않은듯하다. 그 이유는 문화를 관리하는 부서들이 대개는 전문적인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땅에 수많은 문화재들. 이렇게 쇠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석불입상의 앞에서 괜스레 낯이 붉어진다.

세상이 요상해서인가? 아니면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 더 이상은 말이 필요하지 않아서인가? 이천 대포동의 석불은 아예 입 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이천 단월동에서 행죽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길 가에 석조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정확한 소재지는 이천시 대포동 산123 - 1번지이다. 현재 이천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이 된 이 석불은, 고려중기의 거대석불의 한 유형으로 보인다.

지난 해 5월에야 제 모습을 드러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올 5월까지만 해도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2009년 5월 하반신을 드러낸 석불입상은, 높이가 3.6m의 거대석불로 어깨 폭이 96cm 정도이다. 이 석불입상의 이마에는 큼직한 백호공이 있어 보주를 박았던 흔적이 있다. 두 귀는 떨어져 나갔으며, 코 밑으로 입과 턱 부분은 심하게 파손을 입고 있다.

이 석불입상이 서 있는 곳의 뒤편을 '미륵골'이라 하고, 앞으로 펼쳐진 벌판을 '미륵댕이들'이라 이름을 붙인 것도, 이 석불입상과 관계가 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 마을을 대포동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이곳이 물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는 곳에서 가깝게 원두천과 자월천이 흐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과거에 이곳이 큰 내가 형성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요대와 손의 모양이 눈길을 끌어

얼굴 등 상반신이 심하게 파손이 된 것에 비해, 땅 속에 묻혀있던 하반신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허리 부위에 두른 요대는 그 복판을 묶은 결대로 조각을 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했다.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대하고 있는데, 손바닥에는 손금까지 새겨 놓았다.




하반신의 밑은 법의가 발목까지 덮고 있으며, 맨발을 벗은 발가락이 뚜렷하다. 상체에 비해서 하체가 짧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어, 조금은 균형이 맞지 않은 듯하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려불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석조여래입상. 그동안 땅 속에 묻힌 부분을 놓고 분분한 의견들이 많았지만,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날 수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심하게 파손이 된 얼굴, 왜일까?

대포동 석조여래입상의 얼굴부분을 보면 그 어느 곳 보다도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얼굴이 심하게 훼손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술적인 사고에 의해서다.
과거에는 성기석이나 석불의 코 등을 갈아내어 그것을 이용해 득남을 할 수 있다는 주술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석조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둘째는 억불정책에 의한 훼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불상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생겼다고 본다. 많은 불상들이 이 때 파괴 및 훼손을 당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연적인 파손이다.
석조물을 조각할 때 두상과 몸 부분을 이어주는 목 부분이 얇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금이 가고 파손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자연적인 훼손도 간과할 수가 없다.
넷째는 일제에 의해서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했다.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 없이 찬탈을 해가면서, 지역에 있는 석조물 등을 훼손했다. 특히 마을에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석조물들은 더 많은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가져갈 수가 없는 것들에 대한 훼손일 경우도 있다.
다섯째는 타종교에 의한 훼손이다.
타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한 무분별한 훼손도 적지 않다. 전국에 있는 장승이나 단군상 등을 훼손한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과 같이 석불도 이들로 인한 훼손을 당헸다.



이천 대포동의 석조여래입상이 어느 시기에 어떻게 훼손이 되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얼굴의 전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고, 어깨와 목 부분에 집중적으로 훼손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인위적인 훼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더 이상의 훼손만은 방지해야 할 것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 봉녕사.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이 되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삼존불 모두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한 석조삼존불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의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코,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가 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조각을 하였다. 밑에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이 조성되어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아래쪽 연화대에도 앙련이 흐릿하게 조성이 되어있으나, 상당히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의 귀는 어깨에 까지 늘어졌으며, 목은 두꺼워 얼굴의 넓이와 목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섬세한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협시불

12월 6일, 봉녕사에서는 큰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되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묘엄명사의 영결식과 다비식에 참석한 사람들로 인해, 각 전각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틈에도 문화재를 답사하겠다고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촬영을 한다.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조각 등은 섬세하지 못하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이 모두 평평한 느낌을 주는 영감 없는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큰 스님의 다비식을 맞아 찾아간 봉녕사. 많은 사람들 틈에서 조심스럽게 촬영을 하고 나오면서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저 삼존불의 원력이 있어 이렇게 큰 비구니스님이 득도를 한 것이나 아닌지. 삼존불 촬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봉령사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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