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상은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을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성불 한 후, 한 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지상에 부처가 없는 것을 허전해 하였다고 한다. 우드야나왕은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cm 정도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로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 때 만들어진 여래상의 법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여래상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최초의 여래상과 같은 법의를 걸친 석불입상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보물 제1436호로 지정된 농산리 석불입상이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53번지에 소재한 이 석불입상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이다.

보물 제1436호 농산리 석불입상은 석불과 강배가 일석으로 조형되었다

최초의 밧사국 여래상과 같은 법의

이 석불입상의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 가슴 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온다. 이 법의는 허리부분에서 Y자 형으로 갈라졌다가, 두 다리에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린다. 그리고 종아리 부분에서 다시 큰 V자를 그리며 마무리를 짓는다. 바로 이런 형태의 법의가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최초로 조성한 여래상과 같은 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법의의 표현법의 형태를 보고, 인도 우드야나왕의 여래상 형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우드야나상의 법의 형태는 몇 곳에서 보이고 있는 석불입상의 법의 형태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석불입상에서 이런 법의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당시의 특징적인 석불입상의 조형 형태라고 것을 알 수가 있다.



인도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최초로 만든 여래상과 같은 법의를 입고 있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석불입상

농산리 석불입상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정표조차 찾을 수가 없다. 도로에서 산속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몇 개의 이정표가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자칫 딴 곳으로 빠지기 쉬운 산길이기 때문이다. 농산리 석불입상을 들어가기 전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보인다. 그리고 넓게 마련한 공지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석불입상을 찾아간 날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여기저기 흰 눈이 보인다.

농산리 석불입상은 광배와 받침대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모습이다.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하였다. 알맞은 형태의 이목구비와 상투가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우고 있으며, 적당히 벌어진 가슴으로 인해 날렵한 인상을 준다.



받침돌은 마모기 되었다.

당당한 어깨에 잘록한 허리, 그리고 법의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 등이 이 석불입상의 조각이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는 뛰어난 입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광배의 한편 쪽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뛰어난 예술성이 돋보여

이 석불입상의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으며, 석불입상이 딛고 서 있는 받침대에는, 연꽃잎이 아래로 행하고 있으나 심하게 마멸이 되었다. 이 석불입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바로 발이다. 발은 몸과 광배를 조각한 돌과 떨어져, 받침돌에 발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발과 몸이 떨어져 있다.


발은 몸에서 떨어져 받침돌 위에 조각하였다. 뒤편은 자연석 그대로 놓아두었다.

통일신라 사대에 조성된 농산리 석불입상.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여기저기 눈에 쌓이고, 12월 11일의 날씨는 차갑다. 더구나 숲속에 있는 석불입상을 만나기 위해 들어간 곳에는 주변 나무에 가려 햇볕조차 들지 않는다. 옷자락을 여미게 하는 산바람이 차갑지만, 쉽게 석불입상 주변을 떠날 수가 없다.

한 해에 몇 명이나 이곳을 찾아오려나. 그래도 누군가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이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도 첫 여래상과 같은 형태의 법의를 입고 있는 농산리 석불입상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소재한 함양중학교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 바로 본관 현관 문 옆에 커다란 석불좌상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대좌를 합한 높이가 4m가 넘으면, 앉아있는 석불좌상의 높이만 해도 2.45m가 넘는 거대한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이 석불좌상이 어떻게 해서 이 학교 교정에 와 있는지. 원래 이 석조여래좌상은 청룡사 터나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2월 11일, 하루 만에 전북 남원과 경남의 거창, 함양을 돌아보았다. 정발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함양중학교 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을 시간이다.


조각난 석불좌상.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보물 제376호인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없어지고, 오른팔과 얼굴, 무릎과 대좌 등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거기다가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강건한 형태의 석불좌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손도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나가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의 경우도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사각형으로 조성된 대좌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싱대, 한 번에 두 개씩 눈모양인 안상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로 구성되어 진다.




고려시대 석불의 장중함이 그대로

많이 훼손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장중함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석조불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고 강건한 형상의 이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코와 입의 모습들을 볼 때, 함양 덕전리의 마애여래입상과 그 형상이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입가에는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표정은 전체적으로 온화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텁게 새긴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다. 석불좌상을 몇 번을 돌면서 나름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온전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그 장중함이 대단하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대좌만으로도 사람을 반하게 하다

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면서 옛 선인들의 뛰어난 작품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하나하나 조각을 하여, 작품을 만든 것일까? 대좌 하나만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맨 밑에 놓인 하대는 두텁게 조각한 연화문을 사방에 둘렀다. 일부가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상을 두 개 씩 조각한 중대는 온전한 모습이다. 상대는 밑에는 이단의 층을 만들고 위는 평평하게 다듬어 석조여래좌상을 올려놓게 하였다.

한편이 뭉텅 잘려나갔지만,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상대는, 고려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해가 지는 학교 교정에서 만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 그 웅장한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발길을 붙들기에 충분한 듯하다.



문화재답사를 하다가 보면 정말로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천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그렇게 버티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면서.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동에 가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조각을 한 솜씨도 뛰어나려니와, 아직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잘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창읍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는 곳은 예전에 노혜사 또는 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석불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이나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보물 제377호로 지정된 이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석조불상의 조형미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만나는 순간 숨이 막히다.

거창군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선 1211일은, 아침부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였다. 그래도 바쁘게 움직이다가 보면 추운 줄을 모른다. 답사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것은, 깊은 겨울이 되었을 때 눈길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길이 얼고 눈보라가 치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볼 심산에서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은 그 앞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 편하게 답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주차를 시키고 안으로 들어가니, 전체높이 3.7m, 불상 높이 2.7m 의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머리 위에 올려놓은 갓인 천개는, 근간에 올려 진 것이라고 한다. 아마 석불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함인 듯하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 숨이 막힌다. 그 조각을 한 솜씨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석불들과는 사뭇 다르다. 화강암으로 조성이 된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예술의 뛰어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섬세한 조각수법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

머리에 비해 몸은 약간 가늘어 보이지만, 늘씬한 체격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둥근 얼굴에 반듯한 이목구비. 반쯤 뜬 듯한 눈과 입가에 엷은 미소는, 살아있는 부처의 자비를 보는 것만 같다. 찬 돌을 깎아 조형을 하면서, 어찌 이렇게 섬세한 모습을 표현 할 수 있었을까?

목에는 삼도를 새겨 넣었고 넓지 않은 어깨에는 대의를 걸쳐 입었다. 대의 아래에 치마모양으로 길게 표현된 군의는 주름살 하나부터 접힌 부분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금방이라도 초겨울 찬바람에 대의 자락이 나부낄 것만 같은 형상이다.

더구나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려 대의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왼손은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법의자락을 잡고 남은 손가락은 곧게 폈는데, 그 형상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손가락 하나까지도 따듯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군의자락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듯한 발은 뭉툭한 느낌이다. 어찌 이런 모습을 그 시대에 정 하나만을 갖고 표현을 할 수가 있었을까?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려 옷깃을 살짝 잡과, 왼손은 아래로 내려 집게손가락으로 법의 자락을 자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예술작품

석조여래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둥글게 조성을 했는데, 약간은 투박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불상과는 달리 조금은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석조여래입상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있다. 위를 이층으로 둥글게 깎아 그 위에 석불을 새우고, 아래는 돌아가면서 연꽃잎을 크게 새겨 넣었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 주변을 돌면서 사진촬영을 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세상 모든 시름을 사라지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천년 넘는 세월을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는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도로에서 찾기가 수월한 것은 앞쪽으로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미륵암은 전각이 3곳에 요사 정도가 있는, 산 밑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이다. 절을 찾아들어가다가 보면 입구 양편에 목장승이 서 있다. 절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듯하다.

미륵암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인 ‘미륵암 석불입상’이 있다. 미륵암을 들어가면 좌측으로 요사가 있고, 앞으로 용화전이 보인다. 바로 석불입상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이 건물은 1927년 미륵암 신도들이 기금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미륵입상이 노천에 서 있었는가 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남원 미륵암 석불입상

고려초기의 일석으로 조성 된 석불입상

미륵암 석블입상은 온전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안면은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아마 오랜 세월 풍상에 훼손이 된 듯하다. 미륵암 석불 역시, 석불입상과 뒤에 광채를 표현한 광배가 한 돌로 만들어졌다. 남원 지역의 거의 모든 석불입상들이 이렇게 일석으로 제작이 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의 특징인 듯하다.

미륵암은 통일신라 때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한다. 미륵암에 모신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 세웠다는 미륵암은 흔적도 없다. 다만 현재의 대웅전을 세우려고 기초공사를 할 때 예전의 와편 등이 많이 발굴이 되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을 모르고 다 없앴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안타깝다.


안면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가슴께에서 양팔을 모은 듯하다.

심하게 훼손이 된 석불에는 사연이 많아

미륵암 석불입상은 전체적인 모습은 얼굴이 둥글고 온화한 표정인 듯하다. 머리 위에는 육계가 솟았으며 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코나 입, 눈 등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미륵암의 주지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와서 코를 갉아갔다는 것이다. 아마 기자속(祈子俗)에 상당한 영험을 보인 듯하다.

어깨는 둥글게 표현을 하였으며, 손은 가슴께로 모은 듯하다. 법의는 양편으로 흘러내렸으며, 밑 부분에서 양편으로 U자형을 그리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문양을 새겼는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다. 광배의 한편이 떨어져 한 옆에 따로 모셔놓았다.



하반신에는 법의의 주름이 보인다(위) 받침돌은 원래 일석이었으나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떼어놓았다(가운데) 석불입상과 광배가 한돌에 조각이 되었다.

일본인에게 팔려갈 뻔한 석불입상

단단한 바위로 조각한 미륵암 석불의 광배는 왜 쪼개진 것일까? 마침 주지스님이 차 한 잔을 하고 가라고 한다. 석불입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겸, 방으로 들어갔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광배는 왜 쪼개졌나요?”
“그것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 때 군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이 미륵암 석불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팔았답니다. 그런 다음에 받침돌과 석불입상을 따로 떼어 내, 아마 당시에는 길이 안 좋아서 커다란 리어카 같은 것에 실어서 마을 밖으로 옮겨 갔던 것 같아요”
“그럼 그 때 깨졌나요?”
“예. 그런데 절 입구를 빠져나가자 그 사람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두려운 마음에 다시 제자리로 갔다가 놓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그 때 광배 일부분이 깨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부쳐보지는 않았나요?”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부쳐준다고 했는데, 철심을 박고 쇠를 박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해서 붙여놓으면, 볼썽사나울 것만 같아 그냥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쪼개진 광배의 한편과 석불입상을 모셔놓은 용화전
 
미륵암 석불입상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정성을 드리면, 아이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미륵암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래도 일본으로 팔려갈 것을 막아낸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을.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우선은 그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시대적으로 또는 그것을 제작한 장인에 의해서도 다르다. 그런가하면 어느 지역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백리부동풍(百里不同風)’이라 표현한다. 거리가 그만큼 만 떨어져 있어도 바람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곧 그만큼의 거리가 있으면,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결국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문화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는 어느 시대 절이었을까?

설명에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예전의 절은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지금의 용담사는 예전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절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용담사가 언제 적 절이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가장 아쉬운 것은 기록문화가 약했다는 것이다. 기록이 있었다고 해도 수많은 기록들이 찬탈을 당해 사라져 버렸다. 용담사의 경우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보니, 전해지는 전설이나 주변의 유물 등으로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전하는 일화로 보아 통일신라 때 지어진 것으로 본다.


돌에 새겨진 머리와 몸을 보면 당당함이 엿보인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예부터 ‘용담’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저수지에는 ‘용 못된 이무기’ 한 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이 이무기는 밤이 되면 여우로 변해 사람들을 자주 해치고는 했단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도선국사가 이곳에 용담사라는 절을 짓고 나서, 그 이무기의 행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광배와 석불입상이 한 돌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일반적인 석불의 경우 석불과 뒤편을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따로 제작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한꺼번에 조각을 하였다. 높이가 6m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입상은 고려 시대에 흔히 보이는 거불(巨佛)형태의 석불이다.


빛을 상징하는 광배에도 조각의 흔적이 보인다. 받침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아래)
 
이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 역시 자연석을 그대로 놓아 만든 것이다. 타원형으로 생긴 돌을 그대로 받침돌로 이용한 점도 색다르다. 이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 알아보기가 힘든 정도로 닮거나 깨어져 나갔다. 그러나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거불임에도 불구하고 꽤 잘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당한 체격에 무게가 있는 모습

이 석불입상은 고려 때에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미륵입상의 형태와 동일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깨까지 늘어진 귀로 보아 삼도가 굵게 표현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거불의 조성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석불입상의 특징이다. 넓은 어깨와 당당한 체구, 그리고 넓은 가슴과 두터운 표현 등,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다.

많은 문화재를 만나러 다니면서 늘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제발 이번에 만나게 되는 문화재는 온전한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가, 그리고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마음가짐이 그렇지를 못했는데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저 오랜 시간 수많은 문화재를 조성해 우리에게 전해 준 조상님들께, 정말로 무릎 꿇어 사죄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문화사대주의자들이 판치고 있는 나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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