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이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불입상 1기가 서 있다.

 

미륵불로 조성된 매산리 석불입상. 전체적인 모습에서 고려 초기의 석불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상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석불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 쓴 사각형의 보개와 비례에 맞지 않는 보관

보개와 보관이 마주하는 부분에도 연꽃문양을 조각해 나름대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이 미륵당의 부처는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모습보다, 오히려 괴이하기까지 한 모습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석불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이 해학적이기도 하다. 가늘고 길게 조성한 눈도 조금은 어색하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석조여래입상을 찾은 날, 한 여인이 쉬지 않고 합장을 하고 석조여래입상의 전각을 돌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열심히 빌고 있는 것인지. 하기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원이든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후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청풍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모양이 풍부하고 자비로운 상이다.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코는 한편이 마모가 되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되었으며, 콧방울이 무너져 내렸다. 인중이 뚜렷하고, 양 볼은 두툼하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양 어깨까지 내려져 있다. 그저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상이다. 그러한 석조여래입상의 주위를 그렇게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도는 이유는 무엇인지.

 

"날이 많이 차네요."

"예."

"무슨 소원을 그렇게 비세요."

"아이 아빠가 많이 아파서요."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빌면 좋아지실 겁니다."

"예,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 와서 이렇게 빌고 갈 때마다 많이 나아지는 듯해요."

"다행입니다. 얼른 나으셔야죠."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

 

더 이상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정성을 다해 남편이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분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다. 석불에 정성을 드린다고 정말로 나아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란다면, 무슨 소원인들 이루어지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박한 모습에서 전해지는 정다움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목이 두툼하여 자칫 비대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석조여래입상. 법의는 앙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걸치고, 안에는 내의를 받쳐 입었다. 배에서 매듭을 지어 V 자 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두발은 발가락까지 표현을 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밑에는 대좌를 밟고 있다. 전체가 일석으로 조성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이다. 누군가 단주 하나를 발 등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렇게 단주를 놓고 간 사람도, 마음속에 간절히 비는바가 있었을 것이다.

 

청풍 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석조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자애로움이 있다. 생명이 없는 돌로 조성한 석불에서 따스한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장인의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 서 있던 것을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전각을 조성하고 복원을 한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굵게 표현이 되어 비대한 감마져 있다

통견으로된 법의는 v 자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누군가 발들 위에 단주를 올려놓고 갔다.

 

사연도 많은 문화재

 

전국을 다니면서 불교문화재와 고택, 정자, 고분, 능원 등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다녔다. 벌써 그 시간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늘 밖으로 불러낸다. 자다가도 문화재 답사라면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는 했다. 그 많은 문화재 안에는 정말 따듯한 이야기도 있었고, 가슴 시린 사연도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사연을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문화재는 일부러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어느 문화재는 파손된 부분을 보수를 하면서 엉망으로 해놓아, 헛웃음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날이 춥거나 덥거나 누군가 문화재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들도 있어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나지만, 이번 답사 길은 제발 마음 아픈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도 문화재의 인녕과 함께, 이 여인 제발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전히 비는 마음이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에서 406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공근면 상동리 496-3에 소재한 3층 석탑과 나란히 있는 석불을 도로 옆에서 만날 수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이 상동리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앞으로는 금계천이 흐르고 있고, 옆에는 상동리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머리 부분은 잘려나가 흩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려 다시 조성한 것이다. 현재의 머리 부분 이전에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 자비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의 신체부분을 조성한 실력으로 미루어 보아도, 신라 전성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당당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무릎 위에 올려 왼손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의 형태는 부처가 깨달음을 상징하는 상징이다.

 

남아있는 신체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런 손 모양과 당당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의 유려한 옷 주름 등에서도 역시 이상적 사실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에서부터 양어깨를 거쳐 무릎에 이르는 선이 유려하다. 이 석불좌상은 그 형태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경에 뛰어난 석공에 의해 조상된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8각 연화좌인데 하대는 안상을 새겨 넣었는데,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그 위로는 두장의 꽃잎이 아래를 향하게 조각을 하였으며, 연꽃을 새긴 원형의 상대와 각 면에 안상을 새긴 중대는 전형적인 9세기 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석불좌상에 비해 좌대가 조금 왜소한 듯하다. 이 석불좌상은 부드러운 옷 주름과 8각의 대좌 등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아, 8세기의 불상양식을 잘 계승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석탑과 함께 모셔져

 

석불좌상의 옆에는 성덕사의 옛터에 석불좌상과 함께 남아있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석탑의 기단은 이단으로 되어있으며, 아래기단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에 두 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위기단은 중앙에 탱주와 양편에 우주를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3층 몸돌은 잃어버려 없어진 것을 탑을 복원하면서 새로 조성을 해 끼워 넣었다고 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층과 2층은 4단씩, 3층은 3단으로 새겼으며, 낙수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살짝 위로 들려 있다.

 

 

이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붕돌의 너비가 좁고 두꺼워지는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일반적인 밋밋한 형식으로 조성을 한 삼층석탑은 상륜부는 남아있지가 않다.

 

두상을 잃어 새롭게 조형을 해서 올린 상동리 석불좌상. 뛰어난 조각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들어 조성한 머리로 인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했다. 흔히 요즈음 말로 ‘훈남’이 된 것이다. 문화재 답사를 할 때 만나는 이런 문화재로 인해 마음이 아픔이 가실 날이 없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소재한 칠장사는 국보와 보물 등을 소유한 고찰이다. 이 칠장사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이 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현재의 칠장사로 옮겨서 보관을 하고 있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하다.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원래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이 산 아래 아란야를 짓고 기도를 하던 차에, 선량치 못한 7인이 찾아와 교화가 되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고려 초기 작품

 

현재 보물 제9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현재 대웅전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눈과 코, 입은 심하게 닳아 제 모습을 판가름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비교적 식별이 가능하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어깨를 감싸 며 밑으로 흘러내린다. 옷 주름은 여러 겹의 U자형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석불의 형태는 비교적 비례가 원만한 편이며,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 손이 다소 큰 편이다. 하지만 머리와 어깨의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조각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신광으로 표현을 하였다.

 

지방의 특징을 보이는 봉업사지 석불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보면 중앙의 문화재와 지역의 문화재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앙의 기능이 뛰어난 석공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석불이나 탑 등은 그 화려함이나 섬세한 조각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지방의 석공들이 조성을 한 석불이나 탑 등은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당당한 어깨와 발달된 신체표현, 그리고 U자형의 옷주름 등과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안성지방 인군의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지방은 그 지방 나름의 기능공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조성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잘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받침돌의 표현이 두드러져

 

받침돌은 아래받침돌과 위바침돌로 구분이 되어있다. 위 받침돌은 둥글게 조성을 하고 조각을 하였는데, 심하게 마모가 되어 조각을 잘 알바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아래받침돌의 문양으로 볼 때 위받침돌에는 꽃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을 것 같다. 또 이 위받침돌이 심하게 훼손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정확지가 않다.

 

 

 

아래받침돌은 문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밑으로 된 넓은 앙련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연꽃잎에 꽃을 사긴 것은 흔히 볼 수 만날 수가 없다. 아래받침돌의 위부분은 돌출을 시켜 그 곳에도 8장의 꽃잎을 가진 꽃을 돌아가면서 조각하였다. 이 받침돌 하나만 보아도 당시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제 자리를 떠나 안성 칠장사 대웅전 옆에 서 있는 봉업사지 석불입상. 우리의 많은 문화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자리를 떠났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속으로 기원을 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제자리를 떠나는 문화재들이 없게 해달라고.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나다가 보면, 목이 잘린 석불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의 목이 잘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훼파와 더불어, 일제의 석불의 목 훼손이 극성을 떨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이질감에 의한 훼손도 합해져, 여기저기 목이 잘린 석불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자리한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길가에 보면 석불좌상 두 기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다가,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 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 현재의 위치인 시립박물관 뒤편으로 옮겼다. 이 두 기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를 하였다. 새로 보수를 한 머리 부분이 조금은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즈음 말로하면 두 기의 목이 잘린 석불의 위에 새로 맞춰 올린 두상은 훈남에 속한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현재 남아 있는 몸체와 대좌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의 뛰어난 석불좌상

 

두 기의 석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단정한 체구의 세련된 형태, 법의는 통견에 평행 옷주름 등이 신라 말의 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얼굴 부분이 사라져서 그 뛰어난 모습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이 된 석불좌상. 이 석불도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수인은 깨어진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다. 두 기의 석불좌상은 같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두 기가 다 비로자나불 석불좌상으로 추정된다. 손이 깨어진 것조차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법의는 양 어깨로 흘러내려 주름이 잡혀있으며, 가슴에는 내의에 나비매듭을 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을 젖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법의가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주름을 넣어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두 기의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역시 뛰어나다.

 

수인은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고려시대의 대좌를 보다.

 

이 두기의 석불좌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두 기가 모두 사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면을 보고 우측에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는 하단에는 팔각으로 조형을 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동물들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단은 팔각으로 조성을 하고 조각을 했으며, 삼단 역시 팔각으로 해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모두 4단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맨 위 사단은 원형으로 조성하고 꽃과 받침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이 아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있는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좌측에 있는 석불좌상 역시 같은 형태로 대좌를 조성했는데, 이단에는 가지를 문양으로 넣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곳도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맨 위단에는 꽃을 새기고 넓은 잎을 새겨 넣은 것이 다르다.

 

 

우측 석불좌상의 대좌에 있는 천인상(위)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아래)

 

이런 형태로 닮은꼴로 조성이 된 두 기의 석불좌상이, 삼존불 좌상 가운데 양편에 있는 협시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 비록 머리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두기의 석불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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