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란 비석받침을 말한다. 비를 세울 때는 밑에 비석받침은 거북이의 몸체를 이용한다. 신라시대의 귀부는 거의가 거북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에서 고려를 거치면서 귀부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몸체는 거북이의 몸체에, 얼굴은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비란 어떤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거나, 벌어진 일을 적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기에 비석받침인 귀부는 딴 석조물에 비해 상당히 무겁게 조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귀부는 비석의 받침으로 이용을 하고, 그 위에 비를 세우게 되며, 머릿돌인 이수에는 용을 조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비의 형태이다. 그러나 예전 비의 모습을 보면 이런 통상적인 비 받침의 형태를 벗어나는 것들도 있다.

 

 

머리가 비뚤어진 귀부, 무슨 이유인가?

 

부여군 부여읍에 자리하고 있는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는 많은 석조물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탑과 석조불상 등, 그리고 각종 석물로 된 옛 자료들을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그 중에 귀부가 보이는데,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비석받침과는 동떨어진 모습들이 보인다. 한 마디로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서천군 군사리에서 발견이 된, 고려시대인 11~13세기 조성된 귀부가 있다. 거북의 등껍질인 육각형의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그리고 등에는 육각형 문양 외에 나뭇잎과 같은 무늬가 둘러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물인 구례 연곡사 동부도에는 날개와 같은 조각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서천 군사리의 귀부 등에는 나뭇잎과 같은 조각이 보인다.

 

 

얼굴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귀부에서 흔히 보이는 험상궂은 용의 안면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북이의 안면도 닮지 않았다. 얼핏 보면 장승의 해학적인 모습과도 같은 모습이다. 거기다가 얼굴이 똑바로 놓이지도 않았다. 약간은 삐뚤어진 형태가 해학적이다. 발은 거북이의 발이라기보다는 구부러진 것이 용의 발을 닮았다.

 

누워버린 귀부의 얼굴

 

박물관 한편에는 많은 석조물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 이곳에 잇는 귀부는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몸체는 네모나게 조형이 되었으며, 등에 흔히 표현을 하는 육각형의 귀갑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몸체를 네모나게 조각을 했는데, 목은 한편이 땅에 닿도록 비틀어져 있다. 얼굴은 거북도 용도 아닌 해괴한 모습이다.

 

 

이런 비석받침과는 대조적인 비석받침도 있다. 조각이 난 채로 전시가 되어있는 사실적인 비 받침은,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 터에서 발견이 된 비석받침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등 보양이 사실적이면서도 힘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귀부의 형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조각의 형태와,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형된 형태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저 재미로 보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귀부이긴 하지만, 그 안에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단할 수 없는 사람들의 비석받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혹 대단하지 못한 세상을 산 것에 대한, 스스로의 자탄 때문에 이런 조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당시 지금의 세대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제대로 보려고 그렇게 누웠을까? 빗뚫어지고 고개를 돌려버린 비석받침. 그런 비석받침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기회를 삼는다.

국보 제198호는 단양 적성비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에서 보면 뒤편에 성곽이 보인다. 신라 때 쌓은 단양적성이다. 그 성곽 위편 산봉우리 쪽으로 올라가면 적성비각이 있고, 그 안에 국보 제198호인 적성비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위편이 떨어져 나간 돌에는, 촘촘히 글이 새겨져 있다.

 

적성비에는 신라가 삼국시대에 죽령을 넘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을 빼앗은 후,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한 표적으로 세운 것이다. 선무란 자국의 국민이나 점령지 백성들에게 본국의 시책을 이해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말한다.

 

 

점령지역을 선무한 비석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의 척정(국경 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이치의 공훈을 표창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하겠다는 정책의 포고 내용이다.

 

이 적성비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고관들 10명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진흥왕 때 많은 공을 세운 이사부, 비차부, 무력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비는 신라 진흥왕 5~11년인 545~550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알지 못하면 참 답답하다. 그 동안 이 적성비를 보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다. 비를 찾아가려고 단양군 단성면으로 들어가니 비탈길이 장난이 아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아예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런데 찾아갈 때마다 비가오거나 눈이 날린다. 결국엔 몇 번을 찾아갔지만 허탕을 치고 말았는데, 이번에 오르고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에 나가는 통로가 있다. 왜 진작 몰랐을까?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참 무지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이게 국보야, 무슨 국보가 머 이래”

 

돌로 된 길을 따라 오르려니 발가락에 통증이 심하다. 날마다 무리를 해서 걷고 또 걸었기 때문인가 보다. 적성 안내판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저만큼 적성비가 보인다. 비각 안에 있는 적성비. 방학이라 부모를 따라 온 아이들이 적성비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 아이가 “에게 이게 국보야? 무슨 국보가 이래“ 아이는 국보라고 하니 대단한 것인 줄 알았나보다. 곁에서 보던 부모들은 할 말이 없는지 당황한 눈치다. 국보를 보자고 데리고 올라왔는데, 아이가 보기에는 작은 돌 하나에 글씨만 있으니 실망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어디 문화재의 가치 등에 대해 알려주고는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국보는 크다고 지정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볼품이 없어도, 그 가치가 중요하면 국보로 지정을 하는 것이지”

 

좁은 식견이나마 아이에게 이해를 시켜주고 싶었다. 아이를 붙들고 그늘에 앉아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어느새 부모님들도 곁에 와 앉았다. 아이에게 적성비가 왜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문화재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을 하다가 보니 아이도 깨닫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말을 마치고 적성을 돌아보려고 내려오려니 부모님들이 고맙다고 한다. 아이에게 문화재를 보여주려고 올라왔는데, 막상 설명을 하려고 하니, 아는 바가 없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다. 전문가가 아니고, 우리 것에 대해 애착이 없다면 그저 구경만 하고 돌아선다. 그것이 당연하니까 말이다.

 

적성을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신라인들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다. 잠시 돌아본 듯한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돌아갈 길이 바쁘다. 이번 겨울에는 눈 쌓인 적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 아주 편한 길로 말이다.

모악산에 오르면 꼭 한 가지 빠트리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전북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대원사 용각 부도를 찾는 일이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용각 부도는, 용을 새겨 넣은 조각솜씨로 보아 당 시대의 고승의 부도로 여겨진다. 이 용각 부도를 찾아보는 것은 뛰어난 조각솜씨도 일품이지만, 찾아볼 때마다 조금씩 색다른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다

 

이 용각 부도는 모두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기단위에 옥신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상륜부는 부분적으로 손실이 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백색 규암으로 조성한 이 부도는 석질이 연약하여 많이 마모가 되었다. 높이 187cm의 크지 않은 이 부도는 대석은 땅에 묻혀있다.

 

부도 옥신의 위아래에는 띠를 두르고 있으며, 하단의 띠 위에는 18개의 겹으로 된 연꽃을 둘러 새겼다. 중앙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 솜씨는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섬세하게 하나하나 금방이라도 곧추세울 듯한 비늘이 온몸을 덥고 있는 용. 두 마리의 용은 그렇게 몸을 비틀고 탑신을 감싸고 있다.

 

두 마리의 용이 옥신을 휘감고 있다. 비늘 하나하나도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두 마리의 용은 발톱을 세우고 여의주를 다투고 있다. 

 

머리는 뿔이 나 있으며 입 부분에는 길게 수염이 나 있는데, 이 또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두 마리의 용은 발로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승천을 할 만한 이 두 마리의 용은 몸으로 부도를 감싸고 있다.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대원사 용각 부도. 언제나 들러서 돌아보고는 하지만 늘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것은 계절이나 일기에 따라서, 그 용이 보이는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정말 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이 부도가 달라진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용각 부도의 용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때문인가 보다.

 

 옥신의 아래는 띠를 두르고 18개의 연꽃을 새겨 주위를 둘렀다

 

이것도 용처럼 생겼는데?

 

대원사의 향적당 뒤를 돌아 부도가 있는 산으로 발을 옮겼다. 대원사에는 모두 6기의 부도가 있다. 향적당 뒤편 모악산 중턱에 용각 부도를 비롯해 4기가 있고, 20m 정도 위에 2기가 있다. 부도는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보호철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용각 부도를 돌아보다가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용각부도 서쪽 하단부에는 흡사 새끼 용으로 보이는 조각이 있다. 머리와 뿔 등이 보인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용처럼 생겼다. 용각 부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한편 용머리가 있는 밑으로 영락없는 작은 용 한 마리가 있는 것 같다. 반대쪽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조각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용의 머리에 뿔이 난 듯한 모습이다.

 

옥신의 상부에도 띠를 두르고, 밑으로는 구름을 새겨 넣었다.

 

대원사 용각 부도를 갈 때마다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볼 때마다 무엇인가 다른 점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는 몰라도, 문화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재미를 느낀다. 그래서 하고 한날 온 땅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런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신기해 들여다보고는 하는 것도, 아직은 더 돌아다닐 힘이 남아있기 때문인가 보다.

 

부도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괜히 혼자 헛웃음을 날린다. 참으로 허황된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용이 새끼용을 낳았나?' 하는 생각 말이다.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 차도를 따라 삼일공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도로 좌측에 작은 비각이 하나 서 있다. 그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신경을 쓸 일도 없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비각이다. 이 비각은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다.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이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탑비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소중한 문화재

 

진각국사조탑비는 창성사 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원래는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이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매향동 현 위치로 옮겼다.

 

 

이 탑비는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운 다음, 덮개석인 우진각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새긴 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붕돌의 경사면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다.

 

창성사 터로 돌아가야 해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엔 많은 문화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주춧돌이며 축대의 부분이 남아있다. 농사를 짓고 있어 석물들이 제자리를 떠나 함부로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현장이 마구잡이로 훼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창성사 터에 서 있어야 할 탑비가, 왜 현 위치로 옮겨져야 했을까? 어떤 문화재이든지 그것이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방화수류정의 한 편에 와서, 서 있는 보물 제14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의 유적발굴이 더 시급한 것은 아닐까?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의 몸돌은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대책이 아쉬워

 

이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고려 후기의 단순화된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는, 보물 제229호인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와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는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문의 글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새긴 창성사조탑비. 지금의 위치는 이 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다. 차라리 박물관 안에라도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져주지는 않았을까? 지나는 사람들조차 관심 없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이곳과는 전혀 관계도 없다. 그러한 소중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옮겨,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세워놓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문화재의 또 다른 훼손이란 생각이다.

 

창성사의 발굴이 시급하듯이, 이 탑비 역시 창성사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갖다 세워놓은 탑비 한 기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탑비(塔碑)’란 옛 고승들이 입적을 한 후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고, 그 옆에 승적기를 새긴 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탑비’는 광종의 명에 의헤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워진 법인국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비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안에 소재한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옛 보원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보원사 터에는 보물 5점과 함께 많은 석재들이 있으며, 주변에는 국보인 용현리마애삼존상 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신과 관계하는 꿈을 꾸고 난 탄문

 

법인국사 탄문의 탄생일화는 신비하다. 국사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귀신과 관계를 맺는데, 한 중이 홀연히 나타나 금빛 가사를 주고 갔단다. 이 날 탄문의 어머니는 임신을 하였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법인국사의 자는 대오이며, 성은 고씨이다.

 

 

 

 

 

탄문은 15세에 출가할 뜻을 비쳐, 북한산 장의사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925년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안산을 기원하니, 태어난 이가 바로 광종이다.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서 법회를 베푼 후에 새로 낙성을 한 귀법사의 주지와 왕사가 되었다.

 

광종 25년인 974년에 법인이 은퇴를 청하자 광종은 국사로 임명을 하였다. 그가 서산 보원사로 길을 떠나자, 광종은 친히 왕후와 태자, 백관 등을 대동하고 개경 교외까지 그를 배웅하였다고 한다. 보원사로 온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국사가 된 이듬해에 기부좌한 자세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75세, 법랍은 61세였다.

 

 

형식에 치우친 듯한 귀부와 이수

 

법인국사의 탑비는 경종 3년인 978년에 세웠다. 대개 거북이의 몸과 용머리를 가진 비의 귀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를 거치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탑비받침인 귀부 역시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용의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인 이수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귀부의 등에 새겨 넣는 문양이 없이 밋밋하게 구성을 하였다.

 

또한 비 머리인 이수의 용 조각도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형태는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단순하다. 거북의 앞발도 일반적으로 땅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있는 표현이 아니라 형식적인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이 법인국사 탑비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거의 훼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산 보원사 터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보승탑과 법인국사 탑비. 아마도 이 탑비는 법인국사의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978년에 이 탑비를 세우고 ‘법인’이라는 시호와 ‘보승’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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