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보면 복잡한 탑이다라고 생각이 든다. 탑 하나에 많은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이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 오래 전에 장비도 부족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돌에다가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하다니, 그저 놀랍다라고 할 밖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천년고찰 갑사. 그 경내에는 특이한 승탑 한기가 서 있다. 보물 제2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공주 갑사 승탑(公州 甲寺 僧塔)’. 이 탑은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놀랍다.

 

106일과 7일의 답사는 꽤 빡빡한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근 한 달간이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답사를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바삐 돌아보는 일정으로 인해 피곤하기도 하고 발도 아팠지만, 문화재를 만난다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힘든 답사일정도 즐거움이었다.

 

갑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한 후,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인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아도화상은 탑 아래 배례석에서 참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그 후 위덕왕 3년인 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했다. 의상대사는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갑사는 수차례 찾아간 곳이다. 많은 문화재도 있지만, 갑사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신선이라도 될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찾아본 승탑. 언제 보아도 놀랍기만 하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악비천인상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

 

갑사 승탑은 높직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올렸다. 기단은 상중하 받침돌로 나뉘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하층기단에는 사자와 구름, 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고, 거의 팔각이 아닌 원에 가까운 가운데기단에는 각 귀퉁이마다 귀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는 주악비천인상을 새겨 놓았는데, 금시라도 연주소리가 울려 나올 것만 같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상층기단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의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사자 조련사가 맞아?

 

하층 기단에 조각한 사자들을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 중 한 마리의 사자 앞에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이 탑에 조각한 사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예전 갑사에 들렸을 때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사자들을 먹이느라 저렇게 하루 종일 사자 우리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씀이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다. 하지만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진 것이 흠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작으로 손꼽힌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갑사 승탑. 또 다시 만날 때는 무엇이 또 보일까? 문화재를 만나면서 늘 하는 기대이기도 하다.

 

 

1,10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비 한기.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에 소재한 국보 제8호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신라시대인 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비를 만난 것은 106일이다.

 

낭혜화상은 신라 무열왕의 8세손이다.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태어나,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인 845년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중요한 신라역사를 알 수 있는 탑비

 

무염이 이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뒤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무염이 진성여왕 2년인 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려주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 몸돌에 새겨진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를 세운지 벌써 1,123년이나 되었다.

 

 

이 비에 적힌 기록을 보면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이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비는 성주사 절터 서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다양한 문양과 힘 있게 조성한 탑비

 

6, 12일의 보령시로 답사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성주사지이다.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성주사지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바로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 탑비이다.

 

 

벌써 몇 번째 찾아 본 낭혜화상 탑비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그만큼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탑비는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다. 받침돌인 귀부는 머리의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다. 귀두 부분이 깨어진 부분이 있어 전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백미

 

귀부의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인 문양을 새기고, 중앙에는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는데, 안상을 파고 그 안에 꽃을 새여 넣었다. 귀부 위에 올린 비몸은 앞면에는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린 머릿돌인 이수는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앞으로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문화재답사는 문화재와 함께 호흡을 하고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내어 찾아가야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낭혜화상 탑비.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로 조성한 이 탑비는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백미로 꼽힌다. 모처럼 찾아가 만난 그 탑비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장마 통 장대비가 내리는 날 미치지 않고서야 무슨 문화재 답사람?”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난 거의 어김없이 문화재 답사를 떠난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거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 날 꼭 문화재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장대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보아야만 할까? 남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비를 맞은 문화재들은 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선명하게 드러난 문화재들을 잘 살피다가 보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샅샅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맛비에 찾아간 고달사지

 

7월 12일(금) 중부지방에는 정말로 장대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 찾아간 고달사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은 것이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굵은 빗줄기 속에 희뿌옇게 모습을 보이는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과 왕방울 눈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이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장맛비에 들어난 조각, 정말 장관일세

 

머릿돌인 이수에는 명문에 혜목산 고달선원 원종대사의 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종대사 탑비의 이수에는 용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는데, 비를 맞은 용의 비늘이 장관이다. 돌에 새겨놓은 비늘이 바로 꿈틀거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장관을 보기 위해 비속을 뚫고 답사를 다닌다.

 

 

발을 본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비에 젖은 앞발이 힘 있게 대지를 움켜잡은 모습이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을 했을까? 탑비의 뒤편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트린다. 힘이 넘치는 앞모습과는 달리, 뒤편에 말려 올라간 꼬리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라야 이러한 것들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래도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간다고 난리를 칠 것이여?”

미쳤다고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비가 오는 날,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답사를 해보지 않은 분들은 그 멋을 모르니 말이다.

2004년도에 수원에서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화성을 돌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마도 화성을 안과 밖으로 돌아본 것이 20여 회는 되는가 보다. 그것도 복중에, 장마철에, 단풍이 들었을 때, 흰 눈이 쌓여있어 몹시도 미끄러울 때. 같은 시기에 돌아 본 적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심지어는 밤에도 화성을 돌아보았으니.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화성을 왜 그렇게 돌아보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화성. 그런데 몇 번인가 계속해서 화성을 돌아보았더니, 아주 조금씩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화성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화성이 정조대왕의 효심과 막강한 군주의 위용이 서린 곳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단지 화성이 그것뿐이었을까? 적어도 화성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거리들이 널려있다. 우선은 자연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과 정조대왕의 위민도 있다. 또한 숱한 석공들의 땀과 희열도 있다.

 

그 화성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저 운동 삼아 화성주변을 돌아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기 보다는, 그래도 그 화성과 말 한마디 쯤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지난해인가, 효원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주송이란 학생이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접하는 순간 충격이었다.

 

 

나는 2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느낀 것을,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하지만 주송이는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화성을 걸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주송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얻은 것일까?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화성에 대한 글을 연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화성을 걸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성을 돌면서 한 가지 깨우친 것이 있다면,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점이다. 문화재는 눈으로 보아서는 그 안에서 무엇도 발견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문화재를 바라볼 때,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달사지에서 또 한 번 좌절을 맛보다

 

화성 못지않게 많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지이다. 고달사지에는 국보인 승탑을 비롯해, 보물이 3점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비는 몸돌인 비는 무너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318일 여주에 동행한 지인들과 함께, 아침에 고달사지를 찾았다. 넓은 고달사지에는 여기저기 석조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혜목산 자락 쪽으로 탑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 한편도 보지 않았는데, 일행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내려오고 있다. 찬찬히 원종대사 탑비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수 뒤편으로 돌아가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띤다. 움푹 파인 것을 그동안 무심히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틀림없이 용의 발톱자국이 그 안에 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간 듯한 자국. 네 개의 발톱자국이 선명하다. 왜 이렇게 이수에 할퀴고 간 흔적을 만든 것일까?

 

그동안 10여 차례나 이 탑비를 보았으면서도, 한 번도 이 움푹 파인 곳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다시 탑을 꼼꼼히 따져본다. 이번에는 이수 앞쪽에 쓰인 명문아래에 도깨비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양편으로는 힘을 주어 금방이라도 비를 떨치고 일어날 것만 같은 발이 표현되어 있다.

 

 

그동안 무엇을 본 것일까? 날마다 찾아와 들여다보았으면서도 아직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다니. 순간 부끄럽다. ‘문화재를 마음으로 보라고 그렇게 떠들어댔지만, 정작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또 한 번의 죄스러움.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얼른 자리를 비켜 승탑이 있는 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 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문화재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험상궂은 괴수의 얼굴을 하고, 머리의 양 옆 귀 뒤에는 물고기 지느러미와 같은 형상을 한 용머리. 그리고 몸은 거북의 몸체에, 발톱은 용의 발톱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는 보물 제78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 이 탑비는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소재 사적 제168호 거돈사 터에 자리하고 있다.

 

거돈사지를 찾아가면 우측 한편에 서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의 고승인 원공국사(930 ~ 1018)의 행적을 적은 탑비이다. 비문은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라는 김거웅이 써서, 현종 16년인 1025년에 세웠다.

 

왕사를 지낸 원공국사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속성은 전주 이씨인데, 자는 신칙이다.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8세의 어린나이에 동진출가를 하여,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홍범삼장에게 출가하였다. 광종 6년인 955년에는 오월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광종 21년인 970년에 15년 만에 귀국하여 대선사, 왕사가 되었다.

 

 용머리에 거북이 몸을 갖고 있는 탑비의 받침돌

 비문에는 원공국사의 일대기가 적혀있다. 최충이 글을 지었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현종 3년인 1012년에 왕사가 된 원공국사는, 1016년 병을 얻어 현종 9년인 1018년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입적하였다. 이러한 원공국사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이 비는 형식적으로는 신라비의 형태를 취했으나, 세부적인 기법이나 고려초기의 비 받침에서 나타나는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조각 솜씨에 절로 감탄이

 

받침돌 위에 네모난 돌을 올려 비를 받치고 있다.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시대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연곷문양과 만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문을 적은 비의 몸돌이 받침이나 머릿돌보다 적다.

 

한 겨울에 찾아간 거돈사지. 눈이 쌓인 빈 절터에는 탑비와 반대편에 석탑 1기,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석조물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원공국사승묘탑비이다. 받침돌인 거북의 잔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 안에 '만(卍)'자와 연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눈이 쌓인 거북의 뒤편도 눈을 치워놓고 보니, 육각형 안에 똑같이 만자와 연꽃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비몸은 머릿돌인 이수와 받침에 비해 작은 편이다. 거북의 몸에는 사각형의 편편한 돌을 얹어 비 받침을 장식했는데,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 때의 탑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새겨 넣었다. 탑비는 전체적으로 높이가 499.7cm, 폭은 비신의 폭이 123.8cm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탑비이다.

 

비의 머릿돌에는 구름위에 요동치는 두 마리의 용이 가운데 놓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밑 부분에도 꽃잎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머릿돌의 뒤편 역시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머릿돌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반대로 하고, 뛰쳐나갈 듯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있다. 아래편 비 받침의 용머리가 전설 속의 괴수와 같은 모습이라면, 머릿돌에 조각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머릿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보주를 자기 위해 다투고 있는 형상이다.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탑비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 탑비의 머릿돌인 이수를 옮기려고 수 십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어 움직이려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머릿돌을 움직여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근처 농가에 가서 소 한 마리를 빌려와 끌어보았더니, 바로 움직였다고 한다.

 

머릿돌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뜻일까? 탑의 주위를 돌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정말 답답하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전설 하나로,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눈밭에서 서성이다니. 오후의 햇살이 흰 눈에 반사가 되어, 눈이 부시다. 저녁 햇살을 받은 탑비의 용머리가 더욱 괴이하다. 또 몇 날인가 이 해답을 얻기 위해 골이 아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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