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가을은 가는 곳마다 한편의 시화(詩畵)

 

누군가 수원화성의 가을은 성을 따라 걸어보아야 제멋을 안다고 했다. 그만큼 가을 화성의 경치는 남다르다. 해가 바뀌면 그만큼 훌쩍 자라버린 나무들이 화성의 성벽을 넘나들며 성을 한 바퀴 도는 사람들과 조우한다. 성안으로 걷는 사람은 성밖 나무들을 만나고, 성밖을 도는 사람들은 성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안의 나무를 만난다.

 

화성은 자연이다. 자연과 가장 잘 어우러진 수원화성은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단순한 축조물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한 거대한 작품이라고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 아름다움 그대로를 지켜내고 있는 자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아름다운 화성은 그 하나만으로도 국가 사적 3호로 지정이 되었다. 그런 화성 안에 4기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팔달문과 화서문, 그리고 서북공심돈과 방화수류정이 바로 보물이다. 하나의 사적인 성곽 안에 또 다시 4기의 보물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수원화성이 뛰어난 선조들의 지혜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가을을 만나기 위해 화성을 걷다

 

4일 오전, 카메라를 챙겨들고 잡을 나섰다. 가을을 만나기 위해 화성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돌아본 화성이다. 각 계절별로 화성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제는 집안에 놓아둔 물건처럼 알고 있다. 이 계절에 화성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가을의 화성은 자연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거대한 조화는 화성을 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로 감탄을 하게 만든다. 창룡문을 지나면 성곽 위로 고개를 내민 감나무 가지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잎 하나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나뭇가지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감이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자연의 조화로움은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성 밖으로 돌아보면서도 정말이지 이런 자연이 고맙기만 하다. 이 계절에 어느 곳을 찾아간 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을까? 동북공심돈을 지나치면 억새들이 하얗게 피어있다. 그리고 그 한편 동장대 외벽을 끼고 노란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화성을 걸으면서 어디에 어느 계절에 아름다운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돌아볼 수 있다는 것 또한 행복이다.

 

 

가을, 화성의 절경은 방화수류정에서 정점에 달한다.

 

방화수류정에도 가을이 왔다. 보물로 지정된 방화수류정은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에 보물 제1909호로 지정되었다. 방화수류정 앞 연지와 함께 화성이 건축물 가운데 당연히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17941019일 완공을 한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한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이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그 방화수류정 인근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한편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아직 잎을 잔뜩 품고 있다. 그곳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세를 취하고 사진촬영을 한다.

 

 

방화수류정을 지나 장안문을 거쳐 장안공원으로 접어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잎들이 마치 눈이 내리는 듯하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온 것이 아닌가? 걸음을 뗄 수가 없다. 한참이나 그곳에서 나 스스로가 낙엽이 되어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고 싶다. 가을 화성에서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비밀스런 느낌이다.

 

화서문 건너편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억새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가을이 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중 한 곳이다. 오는 사람마다 사진 찍기에 바쁜 이곳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한 화성의 아름다움. 3시간이나 걸었지만 피곤하지도 힘들지도 않다. 가을 화성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그동안 단풍이 아름다운 곳을 먾이도 다녀보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에 자리한 대원사 단풍이란 생각이다.

우연히 자료를 정리하다가 만난 모악산 단풍. 시리도록 붉다는 그 단풍이 아직도 선에 선하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낙남헌방방도(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에 보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찾은 정조는 윤211일 화성에서 문무 양과에 걸친 과거 시험을 본 뒤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1795년 윤211일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서 성묘 전배를 마치고 유생들을 시취한 뒤 낙남헌에서 거행한 방방 장면은 8폭 그림 중 한 폭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과거 시험 합격자 시상식은 화성(華城) 능행차 기념 과거 시험 중 별시(別試)에 해당된다. 이날 문과(文科) 5, 무과(武科) 56명이 합격하였다.

 

이날의 시험 문제는 근상천천세세수부(謹上千千世歲壽賦)”로 혜경궁(惠慶宮)60세 생일 기념 별시였으므로,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부를 작문하는 것이었다. 정조대왕이 직접 출제를 한 문과와, 무과의 실기 시험은 활쏘기로 정조대왕이 직접 통제하고 채점했다. 이날 무과 합격자는 양인(=平民)이 많았다. 방방도에 보면 어사화를 꽂고 도열한 인원은 문과 5, 무과 56명보다 더 많은 인원이 도열해 있다. 이는 친림 문·무과 시험 외에도 딴 별시 급제자들에게도 이날 시상한 것으로 보인다.

 

 

친림무과시험연무대 국궁터에서 선보여

 

55회 수원화성문화제 3일 째인 7. 국궁터를 찾았다.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수원화성문화제 일정표에는 6일과 7일 오후 2시에 각 한 차례씩 친림무과시험 연시를 한다고 했다. 6일 오후 2시에 국궁터를 찾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국궁터 관계자들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어 오늘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다. 나중에 연락을 받은 내용은 6일 친림무과시험 연시는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태풍 콩레이로 인해 수원화성문화제 프로그램이 상당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문자로 취소가 되었다고 알려준 프로그램이 다시 시간을 변경해 진행한다는 연락이 오는가하면, 다음날로 변경해 두 차례를 여는 등 발 빠르게 변경소식을 알려주어야 할 프로그램 변경사항을 제시간에 알려주지 못해 헛걸음을 치는 일도 생겼다. 수원의 가장 큰 축제인 수원화성문화제 소식을 알려야 할 관계기관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 많은 사람들을 헛걸음치게 만들었다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7일 오후 2시에 여는 친림무과시험 시연을 보기 위해 국궁터를 찾았다. 이미 3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환호한다. 무예24기 시범을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기예가 출중하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정조대왕()이 국궁터 무과시험장에 도착하고 곧 이어 다양한 무과시험 종목들이 선보였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식년시 8, 중광시 3, 각종별시 30회 등 총 42회이 무과시험을 쳤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루는 과거시험으로 초시에는 지방에서 190명을 선발하고, 복시에는 한양에서 28명을 선발하며 전시에는 임금입회하에 28명을 선발했다. 이 외에 중광시나 별시는 식년시 이외에 비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이다.

 

 

 

다양한 종류의 무술시험인 친림무과시험

 

정조시대 친림무과시험의 종목은 다양했다. 무과 전시에서는 목전은 3발을 240(288m) 거리에서 쏘았으며, 철전은 3발을 80(96m)애서 과녁을 향해 쏘았다. 유엽전은 5발을 120(144m) 거리에서 쏘고, 편전은 3발을 130(156m) 거리에서 쏘았다. 이 외에도 기사(기추) 1, 관혁 5130(156m), 기창 11, 조총 31, 편추 12중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다루는 시험을 쳤다.

 

이 외에도 마상재 시연으로 주마입마(달리는 말 등에 서는 행위), 마상도립(달리는 말에 거꾸로 서기) 등 달리는 말과 함께 뛰면서 땅을 차고 다시 말 등에 오르기나, 달리는 말에서 좌우로 땅을 차고 뛰어오르기, 달리는 말에서 몸을 돌려 뒤로 타기 등 다양한 마상재의 기능들이 시험 종목에 있다고 한다.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을 관람하다보니 극적인 요소들을 가미한 것이 보인다. 정조가 무관시험을 치르는데 민국(民國)을 건설하기 위해 평민 등을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제도를 바꿨다고 하면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 대사를 한다. 그리고 어린여자아이가 과거를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는 양반(=士足)중심의 국가운영을 탈피하여 소민(민초)을 보호하는 민국(民國=백성의 나라)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정조는 그러한 정책을 완수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기구를 원한다. 왕권강화를 필요로 한 정조는 반대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군사들이 바로 장용영(壯勇營)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부대였다.

 

 

강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정조의 친림무과시험

 

정조는 강한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노비제도를 철폐하고 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신을 믿고 따르는 무관들이 필요했던 것이죠. 낙남헌방방도에 보면 문과급제자보다 몇 배나 많은 무과급제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정조의 민국건설에 동참하는 자들이었죠. 정조가 무과시험을 치르면서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이 바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무과급제자들이었습니다

 

7일 저녁에 창룡문 앞에서 시연될 야조의 연출자인 최형국 박사는 정조의 친림무과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조 어디에도 여자가 무과시험을 본 기옥은 없다면서 화성문화제 때 보여주는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에 어린여자아이를 등장시킨 것은 하나의 설정이라고 설명한다.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을 보면서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그런 극적인 설정을 잘 모르는 관람객들이 혹여 모든 사람은 공평하다는 민국건설을 위해 노력한 정조이기 때문에 평민만이 아니라 여자도 무과시험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할 수 있다는 잠이다. 역사는 언제나 정확한 가운데 극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설정은 앞으로 좀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수원도 어린무사들 키워내 미래에 대비해야

 

마상재를 선보이는 어린친구들이 지금 초등학교 4학년생인 10살짜리 꼬마들입니다. 저들이 마상재를 하는 것을 보세요. 어른들처럼 훌륭히 소화해냅니다. 화성시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아이들인데 수원도 마상재 등을 연마할 수 있는 어린무사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저들이 기능을 다 익힌 다음에 무예24기 시범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합니다. 수원에는 화성시보다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갖고 있잖아요. 저런 마상재를 익힐 수 있는 어린이들과 말을 키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죠

 

야조 연습 때문에 긴 시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마상재를 하는 어린이들을 눈여겨보라는 말을 마치고 길을 건너는 최형국 박사.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보여주는 마상무예를 실현하다 부상을 입어 공상기간인대도 하루도 쉬지 못하고 화성문화제 야조 연출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친림무과시험에서 마상재를 보여주는 어린이들이 부럽다고 한다.

 

정조 때 치러진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 연무대 옆 국궁터에서 벌어진 무과시험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다. 정조의 민국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치러진 무과시험인데 수원이 아닌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시연이라는 점 때문이다. 수원도 말을 키우고 어린이들에게 무예24기와 마상재 등을 연마시켜 앞으로 정조의 민국건설의 뜻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화성을 따라 돌다보면 성곽의 부분, 부분에 돌출되어 나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을 보고 치()라고 한다. ()란 꿩을 의미한다. 꿩은 제 몸을 풀숲에 숨기고 머리만 내밀어 밖을 잘 내다보면서 위험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동태를 살피기 때문에 성곽의 돌출된 부분을 그 용도에 맞게 치라고 표현하였다.

 

치는 성곽의 안에서 보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성곽 위에는 누각 없이 여장만을 쌓고 몇 군데의 총안을 내 놓았다.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민틈이 있다. 이 여장의 빈틈은 경사지게 되어 있어 안에서 밖을 살피기에 적당하다. 밑으로는 경사지게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치의 목적은 군데군데 이 치를 만들어 성벽에 접근하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수원 화성에는 10개소의 치가 있으며 각기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용도서치, 용도동치,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남치, 북동치가 있다. 치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50타 마다 한 곳씩 둔다고 했다. 1타가 3~4보쯤 된다고 치면 일보가 80cm이니 150m에 한 곳씩 치를 둔 셈이다. 단순히 치만을 둔 곳이 있지만 지형에 따라서는 치를 응용하여 공심돈,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적대(敵臺) 등을 세워 적의 침략을 방비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운 화성의 치

 

화성을 한 바퀴 안팎으로 돌다보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성곽이 아닌 자연과 어쩌면 저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축조를 했을까 감탄을 하게 된다. 치는 화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성곽에 보면 보편적으로 치가 보이지만 화성만큼 그렇게 조화롭게 치를 이용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치는 성과 같은 높이로 쌓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러놓았다. 치는 성곽에서도 확연히 돌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치 위에 오르면 좌우를 바라다 볼 수 있으며 성곽을 오르는 적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히 화성을 왜 성곽의 꽃이라는 대명사로 부르는지 알만하다.

 

화성의 치 위에 세운 포루에서 총안을 통해 바라다 본 성곽. 적이 성곽을 기어오르면 그 뒷부분을 볼 수 있다. 적은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공격을 하지 못한다. 화성은 치 위에 적당히 포루 등을 배치해 화살이나 총을 쏘아도 그 사정거리 안에 적이 들도록 배치해 놓아 뛰어난 성곽 축조 기술을 엿 볼 수 있다.

 

지형이 높은 곳에는 치 위에 포루(鋪樓)를 세워 놓았다. 멀리서 움직이는 적도 모두 관찰할 수가 있어 적은 시야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적을 공격할 때는 사방이 모두 막혀있어 적의 공격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 그야말로 꿩이 풀 속에 숨어 밖을 내다보는 그런 형태와 같다고 하겠다.

 

 

 

취 위에 세운 구조물들의 놀라운 효과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는 치를 만들고 그 위에 포를 배치했다. 바로 장안문 양편에 마련한 적대이다. 장안문은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에서 내려오는 적이 장안문으로 공격할 것을 대비하는 세심함을 보인듯 하다.

 

요소마다 밖으로 돌출되어 나온 치 위에 누각을 짓고 여장을 둘러놓은 포루와 적대 등이 있어 적은 어디에도 성곽을 기어오를 수 없도록 하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적을 공격하고 최선의 방어만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다시 한 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봉화를 알리는 봉수대 역시 치 위에 올려놓았다. 봉수대는 성 동문인 창룡문과 남문인 팔달문 사이에 놓여있다.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축조된 화성은 그야말로 자연 위에 세운 거대한 미술품을 연상하게 한다. 방화수류정이나 서장대 같은 아름다운 조형물이 있는 화성. 선조들의 뛰어난 미적감성과 나라사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9월이다. 올해 그토록 폭염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제 얼마 안 있으면 산과 들의 단풍이 멋에 겨워 넘실거릴 계절이다. 이런 계절에 떠나는 가을여행. 역시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이 풍족한 계절에 찾아가는 문화역사기행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풍요의 계절 가을. 사람들은 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그저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렇게 찾아가고 싶은 많은 곳 중, 그레도 역사가 있고 문화가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고찰(古刹)이라도 좋고 고택(古宅)인들 관계있으랴.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계절을 따라 찾아가는 가을문화역사기행, 그 첫 번째는 여주시 신륵사로 정했다.

 

경기도 여주시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기도 판소리인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삼층석탑이다.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진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9월에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아름답던 남한강이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을 붙인 이 고찰은 신륵사라는 이름보다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 일주문에는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이 고찰이 자리한 절이 봉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 봉의 머리는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다.

 

여강 ·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신륵사 조사전 뒤에 보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신륵사 서북쪽으로 난 이 계단을 오르면 보물인 보제존자의 석종과 석등, 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철책으로 조성된 보호대 안에 자리한 보물 제231호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란 명칭을 갖고 있는 석등은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석등은 대개 절의 전각 앞이나 부도탑 등의 앞에 세운다. 아마 두 곳 모두 불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나보다. 더욱 보제존자의 사리를 모신 석종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아 놓았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명창 염계달이 피를 토하던 강월헌

 

예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이나,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 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이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그 곳을 눈여겨본다.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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