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3년인 1789년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으며, 이때부터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니 지금의 수원시이다.

 

수원부를 옮기고 난 후 정조 17년인 1793년부터 화성 축성이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조성되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된다. 그 남북으로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성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과 팔달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성문 양편에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다만 팔달문 옆 양편의 적대는 지금은 유실되어 버렸다.

 

강화부의 화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홍이포

 

홍이포는 남만대포(男蠻大砲)’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으며, 홍이포는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 ~ 5km 유효사정거리는 700m 인 전장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홍이포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1664년이다. 당시 강도어사 민유중이 병자호란 이후, 강화부의 미곡과 화기에 대한 보유 상황을 조사하는데, 그 목록에 남만대포라는 화기가 등장한다. 당시 강화부의 화기류는 현종개수실록현종56월 계축조에 의하면, 진천뢰 140, 대완구·대포·중포가 65, 소완구 30, 호준포 37, 각 보에는 대포 179, 진천뢰 63, 남만대포 12, 불랑기 244좌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남만대포 12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남만대포인 홍이포는 12좌로 다른 화기보다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만대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불랑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화성의 홍이포는 영조 때 우리가 만들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이는 붉은 오랑캐라는 말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인을 뜻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선교사들에 중국 명에 전해진 서양대포를 말한다고 했고,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 조선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영조79월 신사조에 기록된 훈련도감의 보고 기록에는 본국(훈련도감)에서 새로 마련한 동포(銅砲)50이고, 홍이포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입니다. 동포의 탄환거리는 2천여보이며, 홍이포의 탄환거리는 10여리나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예람하시도록 올리니 강동한 자들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 양편에 적대를 만들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에 놓인 홍이포.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유입한 홍이포가 아닌, 영조 때 우리기술로 만든 홍이포. 사정거리가 최장 10여리에 이르는 이 홍이포의 위력이야말로 화성을 지켜내는 화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을 것이다.

 

 

쇠뇌를 연속 발사하는 노대

 

화성에는 두 곳의 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으며, 서노대는 가장 높은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북노대는 치 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조성하였다. 대 아래의 석축은 높이가 13, 대의 전체 높이는 18척이다. 대의 밑에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위는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노대의 안쪽 너비는 174촌이고, 바깥쪽 너비는 19척이다.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5,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동북노대의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5촌이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렇게 대 안을 네모난 벽돌로 깐 이유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쇠뇌란 걸쇠라는 발사체를 유도하는 홈과, 그것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갖추고 있다. 하기에 쇠뇌는 일반적인 활보다 그 힘이 강하며,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쇠뇌는 비스듬히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앞에 여장을 놓고도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힘이 있다 하니 그 사정거리도 일반 활에 비해 월등히 멀리 나갔다. 쇠뇌는 다연발로 연달아 활을 적에게 날려 보냄으로 해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쇠뇌를 쏘기 위한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서장대의 뒤에는 서노대가 자리한다. 원래 노대는 <무비지(武備志)>에 설명하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는 화살을 쏘는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노대의 설명을 보면 현재의 노대는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다.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5,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5, 높이 12, 지대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를 얹고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에는 모두 네 곳의 각루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에서 남문인 팔달문 쪽으로 가다 보면 성벽이 갑자기 아래로 굴곡져 내려가는 곳이 있다. 이곳 등성이에 '동남각루'가 자리한다. 팔달문을 지나 팔달산 정상을 향해서 오르면 좌측으로 난 등성이를 따라가는 용도가 나타나고, 그 끝에 화양루라고 부르는 '서남각루'가 자리한다.

 

그리고 다시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서장대를 지나 서문인 화서문을 향해 가다가 보면 '서북각루'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문인 장안문을 지나 동쪽으로 가다보면, 북수문인 화홍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다. 이렇게 4곳에 축조돼 있는 각루는 각기 형태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휴식과 감시를 하는 기능인 각루

 

이 네 곳의 각루는 모두 지형적으로 시야가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각루에선 병사들이 쉴 수도 있고, 주변을 감시한 수도 있다. 비상시에는 각루가 각 방면의 지휘소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 곳에 서 있는 각루 중 서남각루와 동북각루는 각각 '화양루''방화수류정'이라 이름을 붙일 정도로 정자나 누각과 같이 꾸며져 있다. 이렇게 아름답게 쉼터를 꾸며 놓았다는 것도 화성의 자랑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모든 축조물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 네 곳의 각루는 어떤 모습으로 축조가 되어있을까? 지형과 용도에 따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는 각루에 쉴 수 있는, 옛 장용영의 군사들은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남수문과 팔달문을 지키는 동남각루

 

동남각루는 작은 정자처럼 꾸며져 있다. 돌계단을 올라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동남각루는 계단 위 입구를 제외한 3면이 판벽으로 막혀있고, 전안이 뚫려있다. 동남각루는 성 안팎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성벽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그 밑을 흐르는 수원천의 남수문과 팔달문 등을 방어하기 위한 곳이다.

 

화성의 사라진 시설물 중 하나인 남수문과 동남각루의 건너편에는 남공심돈과 남암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공심돈과 남암문이 사라졌다. 동남각루의 누각 아래에는 온돌방이 있다. 수직하는 병사들이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궁이가 있고, 반대편에는 굴뚝이 서 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남각루를 구천(龜川 =현 수원천)의 위 일자문성의 머리에 있다. 성이 산세 때문에 이곳에 이르러 가파르게 뚝 끊어졌으며 누는 성 위로 쑥 나와서 멀리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그 규모 또한 54간으로 높이와 너비가 모두 서북각루와 같다. 다만 네간 모두 판자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층계를 설치하였다. 서남 한 간은 총판아래에 역시 온돌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날이 풀렸다고 하지만 이른 시간의 화성걷기는 쌀쌀하다. 특히 동남각루는 아래로 수원천이 흐르고 있고 산마루에 각루가 서 있어 딴 곳마다 더 춥다. 이런 곳을 지키고 있을 장용외영의 병사들을 생각한 정조의 마음이 동남각루 안에 그대로 보인다. 정조의 애민(愛民)정신이 이 작은 각루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다. 한 겨울 칼바람에서 화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잠시나마 따듯한 온돌에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방. 정조는 이 작은 각루에도 온돌방을 마련했다. 화성의 구조물 가운데 이렇게 온돌방을 마련한 곳이 상당수이다. 그 안에 정조의 따듯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남쪽 능선 끝에 마련한 서남각루

 

팔달문에서 팔달산 위로 올랐다. 그 능선 위에 마련한 서남암문 앞으로 능선을 따라 용도가 마련되어 있다. 팔달산 전체에 걸쳐 성을 쌓지 않고 그 반을 갈라 축성한 화성은 이 용도를 두고 그 끝에 서남각루를 마련하였다. 능선으로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서남암문에서 170m 거리인 용도 끝에 마련한 서남각루에는 화양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는 화성을 뜻하고 ''은 남쪽을 뜻하는 이름이다. 서남각루는 정조 20년인 179641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720일에 완공하였다. 3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을 가졌다. 화양루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으로 21척에 동서의 길이는 14척이다. 남쪽으로 2간은 누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러쳤으며 삼면에는 판문을 내었다.

 

서남각루는 현재 판문의 흔적이 있으나 문은 달려있지 않다.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네 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서남각루는 화양루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용도 끝에 자리한 각루는 준 지휘소이자,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서남각루가 서 있는 곳은 능선의 끝이자, 용도의 끝이 된다. 이곳에서 양편으로 돌출된 성벽은 양편 모두가 치의 역할을 하고 있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와 함께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게 축성이 되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18세기 동, 서양을 통 털어 가장 완벽한 군사시설이라고 화성을 극찬하였겠는가?

 

서남각루는 한편은 바닥이 돌로 되어있고, 한편은 장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려 마루를 놓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군사들이 주변감시를 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올라 성안을 공격하겠다고 죽자 사자 능선으로 오른 적군들. 그들은 능선에 버티고 있는 용도로 인해, 또 한 번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누마루 밑에 온돌방을 마련한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서장대에서 화서문으로 내려가다가 만날 수 있다. 2004824일 화성답사 중 만난 서북각루.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누각 위에서 쉬고 있다. 화상을 돌면서 늘 만나게 되는 서북각루는, 위층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하고 아래층에는 온돌방을 놓았다.

 

동남쪽으로 한 칸은 청판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방을 들였다. 이는 수직하는 군사가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북각루도 판문을 설치하였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으나, 현재 판문은 보이지 않는다. 문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었다고 한다.

 

서북각루를 찾아가면 언제나 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서북각루 성 밖에 펼쳐진 억새군락지의 모습은 절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서북각루에 올라 쉬어가는 것은 각루가 예전에도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주변을 살피기도 했던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주변경치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맡아한 각루는 네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형태가 다르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이 마주보이는 자리에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보물 제1909호로 지정된 동북각루

 

동북각루의 별칭은 '방화수류정'이다. 이 말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그럴 정도로 동북각루는 아름다운 정자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에 보물 제1909호로 지정이 되었다.

 

17941019일 완공을 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하는 방화수류정. 한 겨울에 만나는 방화수류정은 여름과 달리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이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건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관망하는데 있어 어느 한 곳도 빠트리지 않도록 축조한 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원화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8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9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 가까이 있는 동장대와 팔달산 정상부근에 위치한 서장대이다. 동장대의 현판에는 '연무대(鍊武臺)'라고 적혀있다. 연무란 군사들을 조련한다는 뜻이다. 현재 동장대 담장 안에는 연무대 건물과 앞쪽 우측으로 솟을삼문, 그리고 좌측으로는 네 칸의 창고인 듯한 전각이 자리한다.

 

현재 동장대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나고 있는 <동장대도>와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성역의궤에 따른 보수 및 복원 때문이다. 2019년 황금돼지해 기해년 123, 쌀쌀한 바람 속에 동장대를 찾았다.

 

완벽한 독립공간 동장대

 

동장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한데다 높이 솟아 있다. 더구나 앞으로는 평평한 너른 평지가 있어, 군사들이 훈련하기에 적당하다. 장용외영 군사들을 조련하던 지휘소인 동장대는, 정조 19년인 17957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25일에 완공하였다.

 

동장대인 연무대가 자리한 곳은 3단으로 쌓은 대를 조성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를 설치하고 흙을 평평하게 하였으며, 바닥엔 네모난 벽돌을 깔아 놓았다. 장대의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앞으로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을 만들었다.

 

동장대는 독립공간이다. 아마도 화성에 들른 정조는 이곳에서 장용영 군사들이 조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마음속으로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곳 화성으로 도성을 옮기고 북벌을 위한 커다란 이상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동장대는 그런 이산 정조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영롱담

 

동장대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연무대 뒤편 담장이다. 이 담장은 '영롱담'이라고 하는데, 이 담장을 두른 이유는 연무대에서 군사들의 조련 모습을 관망하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기와를 이용해 조성한 영롱담은 마치 꽃 모양을 닮았다. 구슬이 울리는 듯하다 하여 담장 이름을 영롱담이라고 한다는데, 밑에는 문석대로 기단을 놓았다.

 

뒤편을 막은 담장을 지나 성 쪽으로 나가면 총안 앞에 놓인 작은 '불랑기'를 볼 수 있다. 불랑기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이다. '불랑기포(佛郞機砲)'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도입한 서양식 박격포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졌다. 불랑기는 <프랑크(Frank)>라는 유럽인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몸체길이는 72cm이며, 총구멍은 9.5cm이다.

 

이 불랑기는 몸체가 큰 1호서부터, 작은 5호까지로 구분된다. 불랑기포는 발사 틀의 구실을 하는 모포에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 발사하는 자포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사용하였으며, 불랑기포의 시용법은 당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이 서양식 포술을 지도했다고 한다.

 

 

정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성의 담장 안쪽으로는 커다란 철로 만든 함에 돌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돌들은 전쟁이 나면 실제로 사용하기도 했던 '투석(投石)'이다. 지금 생각하면 돌이 무슨 전쟁무기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당시에는 이 투석만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무기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투석이 무기로써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돌이 날아다닌다고 하며 '비석(飛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투석에 사용하는 돌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보면, 타마다 크고 작은 돌멩이 100개씩, 10타마다 큰 돌 200(120kg)이나 150(90kg)짜리 3개씩을 두도록 하였다. 이 돌들을 이용해 수성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작은 돌로는 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였으며, 큰 돌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향해 굴렸을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수성을 할 수 있는 화성. 1월 말이라고 하지만 찬바람 속에 찾아간 동장대. 바람을 따라 연무대가 떠나갈 듯 웃는 이산 정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이산 정조의 그 꿈이 아직도 후손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장대 아래편 솟을대문 안쪽에 보면 수문규칙(守門規飭)’이라는 글을 적은 족자 하나가 눈에 띤다. <1.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 1. 밤에 돌아다니거나 군호를 잃은 자는 처벌한다. 1. 직무에 불평하는 자는 처벌한다. 1. 부녀자를 데려 들어오는 자는 처벌한다. 1. 헛된 말을 하여 혹하게 하거나 까닭 없이 군을 놀라게 하는 자는 처벌한다. 계축 6월 초1일 수원유수 채제공>이라 적혀있다.

 

아마도 당시에 이렇게 규칙을 정해놓고 모든 군사들이 이 규칙을 지키도록 했나보다. 정조대왕이 가장 신임하는 장용외영의 병사들이었으니, 그 규칙 또한 어느 곳보다도 엄격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채제공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는데 있어 일등공신이다. 그가 정한 수문규칙을 보아도 채제공이 얼마나 수원화성의 축성에 열정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화성축성에 사용할 돌 때문에 눈물 흘린 정조

 

채제공은 1793년 화성 건설을 위해 새로 설치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留守)로 임명된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능으로 옮기고 화성 건설을 하겠다고 하자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을 샀다. 멀쩡한 한양 성을 놓아두고 왜 수원에 성을 쌓느냐?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정조는 젊은 정약용에게 성의 설계를 맡긴 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석성(石城)을 쌓기 위해 필요한 돌이었다.

 

화성을 축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돌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돌을 구할 수 있을까하는 것도 정조에게도 고민이었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경모궁에 앉아 아버지에게 간구했다. “단단한 석성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정조의 간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해진 닝보로 인해 한시름 놓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수원 인근 숙지산과 여기산, 권동, 팔달산에서 성을 쌓을 수 있는 돌맥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숙지산에서 81110덩어리, 여기산에서 62400덩어리, 동에서 32000덩어리, 팔달산에서도 13900덩어리를 채석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돌을 옮기기 위한 장비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채제공에 따르면 가장 큰 채석장이 된 숙지산은 숙지(熟知), 즉 깊이 안다는 뜻이다. 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더 놀라운 것은 숙지산과 여기산이 속한 곳이 공석면(空石面)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화성을 쌓느라 돌을 다 캐내 이제 돌이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공석면이 된 것이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당시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연무대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다시금 옛 역사를 떠올려본다. 그 많은 돌을 이용해 축성한 수원화성. 연무대 앞에서 말을 달리며 각종 무술을 보여주던 무예24기 시범단의 군호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곳 연무대에서 정조 이산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까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을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세월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얼마 전 문을 만들어 달아놓아 완벽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에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90년 만에 복원된 남수문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는 아마도 북수문인 화홍문과 더불어 물길을 지켜낼 수 있는 남수문이었을 것이다.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는데,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전국 유일의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그런데 북수문이 일곱 개의 수문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아홉 개의 수문을 낸 것일까?

 

 

왕권의 상징이었을 남수문

 

아마도 남수문에 아홉 개의 문을 낸 것은 왕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이며 꽉 찬 것을 의미한다. 왕의 복장 중 가장 품격이 높은 것이 구장복이고 보면 남수문은 왕권을 상징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북수문은 상류의 물이 유입되는 곳이지만 남수문은 팔달산 등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쳐지기 때문에, 그만큼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공간 확보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든다.

 

"남북 수문의 터는 동서로 38,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서 터를 닦고 땅을 14척 깊이로 판다. 모래에 진흙을 섞어서 다져서 쌓은 후 전을 2중으로 깔았다. 다리의 안팎에도 넓게 고기비늘처럼 전을 깔고 그 끝에 장대석을 물리어 굳혔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수문의 설명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조형한 수문이다.

 

남수문은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수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9개의 수문 구간 위에는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에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다리의 길이인 동서 약 28.6m에 남북 3.6m의 검은색 벽돌로 꾸민 포사(舖舍)’를 길게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을 내어 짧은 시간에 많은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장을 검은색 벽돌로 쌓아 57개의 총안을 내었다. 이 총안 구멍이 수문을 향해 공격을 하는 적을 향하고 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여장 역시 구간수문의 아치형에 어울리게 무지개형으로 조성하였다.

 

수원천과 어우러진 화성의 수문

 

이러한 남수문 주변이 홍수로 떠내려 간 뒤 90년이 지난 2012년 복원되었다. 남수문이 다시는 홍수피해의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몰시간이 지난 다음 남수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구간에서 형형색색의 조명이 남수문을 화려하게 만든다.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잠시 동안 촬영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조형미술이라는 화성, 그 중에서도 과거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한 곳이었던 남수문의 야경이다.

 

촬영을 하다 불현 듯 생각을 한다. 만일 저 앞에 분수라도 설치해서 그 분수에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참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수원천의 물길이 화홍문을 통해 유입되어 남수문을 통해 서해로 흘러가 듯, 수문을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도 물길과 같이 막힘이 없다.

 

수원 화성은 적의 침공에 대비해 놀랄 만큼 정교하게 모든 것이 잘 조성되어 있다. 화성은 단순히 전쟁에 대비한 하나의 성곽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화성은 효와 충, 그리고 자연사랑과 기록정신, 과학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 시대의 가장 정교하고 가장 자연과 동화된 축조물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난 역사학자도 아니고, 축성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깊이를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화성을 꼼꼼히 살펴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한 성곽이기 때문이다. 성벽은 밑 부분은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르면서 점점 돌이 작아진다. 틈이 없이 정교하게 쌓여진 것은 적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성벽은 위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어가게 해 철저하게 무너짐에 대비를 했음이 알 수 있다. 더구나 성돌보다 큰 적심이라는 길고 큰 돌을 축성에 사용해 성벽을 강하게 쌓았다. 성벽 위 여장에는 몇 개의 총안을 내고 사이에는 비스듬히 뚫린 구멍이 있어 성벽에 적이 달라붙으면 뜨거운 물이나 기름등을 부어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숨겨져 있는 중요시설

 

화성은 은밀한 곳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암문이다. 암문은 숨어있다는 소리인데 화성에는 모두 5개소의 암문이 있었다. 암문은 좁게 만들고 지형을 이용해 교묘히 숨겨 놓았는데 이는 전투 시에 물자를 적이 모르게 은밀히 수송하거나, 병력을 이동시켜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5개의 암문은 그 위치에 따라 동암문, 서암문, 북암문, 서남암문, 남암문으로 불렀는데 현재 남안문은 남공심돈과 함께 복원을 하지 못해 4개소의 암문만이 존재한다.

 

암문이란 성의 숨겨진 시설물이다. 주로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축조하여 적이 모르게 양식이나 무기 등의 물자를 반입하거나,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할 수 있게 만든 비밀통로이다. 하기에 암문에는 누각도 없거니와,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이렇게 숨겨진 암문은 전투시에는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암문이 있는 곳의 지형을 보면 후미진 곳에 두어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또한 암문이 있는 곳의 지형이나 성곽을 보면 적이 은밀히 공격을 해올 만한 장소라는 점도 눈에 띤다. 결국 적은 이 곳으로 침입을 했다가 암문을 이용해 순식간에 병력이 이동되어 전, 후에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동암문은 전으로 홍예를 쌓고 위에는 원여장과 평여장을 쌓아 만들었다.

 

서암문은 서장대 남쪽 약 52m거리에 있는 성곽 시설물이다. 서암문 역시 전돌로 홍예를 물렸는데 안쪽 너비 1.7m, 높이 2.33m이고, 바깥쪽너비 1.24m 높이 2.18m이다. 안팎에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문은 산허리에 있으며, 길은 성 위로 났기 때문에 문안의 돌층계는 네모지고 움푹하게 되었다. 돌층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위가 적으로 길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보이는 길과 암문의 길을 통하게 하였다.

 

암문은 4대문과 중요시설물이 있는 곳 주변에 있으며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가축, 수레를 통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암문 역시 후미진 곳에 있으며 서장대가 가까워 적이 한꺼번에 공격을 할 것에 대비하여 암문 안쪽에는 계단을 양편으로 두고 그 위에 다시 길을 내어 공격을 할 수 있는 방어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화성은 아무리 보아도 참 대단한 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면 볼수록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느 곳에 이렇게 완벽한 성이 있겠는가?

 

 

용도의 출입문이기도 한 서남암문

 

암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곳은 역시 서남암문이다. 서남암문은 팔달문에서 성곽을 따라 오르면 팔달산의 등성이로 오르게 되는데 그 곳에 위치한다. 서남암문은 다른 암문과는 다르게 암문위에 포사를 두고 있다. 유일하게 암문 중에서 문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문의 크기는 겨우 말 한 필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문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이 서남암문은 170m 길이의 용도가 시작되는 곳이며, 또한 서남각루인 화양루에 이르는 통로의 문이다. 서남암문 앞으로 난 용도는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는 적에 대비해 양편으로 성곽을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쌓았다. 이 용도가 끝나는 곳에서 산등성이도 끝나게 되며 그 끝에는 화양루가 있다. 화양루는 병사들이 쉴 수도 있는 누각이지만 적을 관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적은 숨어서 공격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서남암문을 나서면 용도로 이어진다. 용도는 화성을 방비하기 위한 구조물 중 성 밖에 설치된 화성의 또 다른 성 길이다. 산등성이에 마련한 용도는 성에 조성한 암문을 이용해 길게 뻗어있으며 그 끝에 화양루를 두어 적의 침입을 사전에 간파하거나 병사들이 쉴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암문은 이와 같이 수원화성의 시설물 중 성을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이지만 각 암문의 형태가 다 달라 화성이 얼마나 치밀하게 조상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암문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북암문

 

북암문은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의 동쪽 40보 되는 거리에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6촌 높이가 6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 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북암문을 조성한 곳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수원화성에 조상한 암문 중 가장 눈에 띠는 곳이 바로 북암문이다. 북암문 곁에는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고 그 옆에는 북수문인 화홍문이 자리한다. 이곳 역시 수원화성의 시설물 중에 중요한 곳이다. 북암문은 남문 위로 길을 내어 언제라도 병사들이 이동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암문의 위는 둥그렇게 아치형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암문은 비상시에 군사들의 빠른 이동 과 식량의 운반 등을 고려해 만든 성문이다. 더 견고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저렇게 문 위에 아치형으로 벽돌을 쌓아야만 했을까? 물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아치형으로 쌓아올린 벽돌의 쓰임새는 더 중요한데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적이 문을 공격해 오면 아치로 된 벽돌을 무너트려 성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아치형의 구조물이 이런 쓰임새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감히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암문의 중요성은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얼마나 많은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어느 곳 하나를 보아도 철저하게 방어를 위해 시설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화성은 최고의 공격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계 최고의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축성된 성이다. 그야말로 과학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어떠한 칭찬의 말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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