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어처구니 사라지고 취두만 남아

 

궁궐에는 어처구니라는 것이 있다. 흔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궐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서역을 갔다 온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언제 우리의 궁궐로 온 것일까? 이 궁궐 처마에 올라타고 있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처구니를 찾아보면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요철도 구멍도 없이 꽉 막혀 도통 통하지가 않는다는 말의 뜻을 갖고 있다.

 

'어처구니'는 한자어의 요철공(凹凸孔)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들어가고 나옴의 요철과 구멍의 합성어로 된 말인데 이것이 변하여 요철이 '어처'가 되고 공이 '구녕'이 되었다가 다시 '구니'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의 변화야 어찌되었건 앞뒤가 꽉 막힌\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나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붕 위에 잡상도 이런 이유가?

 

이 어처구니가 궁궐의 지붕 위에 있는 잡상이다. 지붕위에 어처구니를 올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궁궐을 지을 때 기와를 올리는데 기왓장의 측면에 계단식의 홈이 한 줄 파여 있다. 이것은 빗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맞물려지도록 하는데 이것을 '어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처가 없다면 기와의 줄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즉 어처구니는 이 어처공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어처를 막기 위한 것이 바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동물이다. 흔히 잡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는 올리는데 순서가 있다.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는 취두라 하고, 새 꼬리 모양은 치미, 망새라고 부른다. 용두는 취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내림마루 끝에 있으며, 그 밑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린다.

 

잡상이 서 있는 순서를 보면 대당사부라는 삼장법사가 맨 앞에 무릎에 손을 짚고 서 있다. 그 뒤로는 손행자(孫行者)라 불리는 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순이다. 이 장식들은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에서 마화상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상이다. 삼살보살은 세 살, 겁살, 재살 등 살이 끼어서 불길한 재앙이다. 이것을 막고 있는 잡상이다.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다고 하는데 이 동물이 잡귀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잡상들은 언제부터 처마에 올라가 있을까? 기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조선 말기라고 한다. 고분벽화 등에 그림에도 잡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의 와편에도 잡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가 될 것 같다. 잡상은 아무집이나 올리는 것이 아니다. 궁이나 그와 관련된 건조물에만 올린다. 적게는 3개에서부터 많게는 11개까지 올린다.

 

 

창룡문과 화서문의 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 일본인 학자들이 1902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을 답사하며 문화유적을 조사하였는데 당시에 찍은 사진에 보면 화서문의 지붕에 어처구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 전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의 사진기록에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화서문의 현판이 기울어져 있고 지붕 위에 잡상(어처구니)도 보이지 않는다.

 

1940년 일본인 채색 목판화가 가와세 하스이가 그린 목판화의 화서문 역시 지붕 위에 어처구니를 그리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화서문 위의 어처구니는 1900년대 초 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일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화서문과 창룡문의 지붕 처마 끝에 각각 4구의 어처구니가 자리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팔달문 외도에 보면 1층 누각과 2층 누각 처마 끝에 각각 4기의 어처구니가 보인다. 현재 팔달문에는 어처구니가 서 있다. 하지만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 어처구니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하진 것일까? 더구나 화서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인데 어처구니가 없어 정조대왕 때의 원형과 다르다. , 서문의 어처구니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보물이 널려 있는 충남서산 보원사지

 

1년이 넘도록 문화재답사 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다. 모처럼 나선 문화재답사길. 그동안 한이라도 맺힌 듯 돌아치면서 만난 곳이 바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사적 제316서산보원사지였다. 벌써 이곳을 들렸던 지가 1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가까이 가보니 주변이 상당히 변해있다.

 

난 이곳을 찾아가면 마음이 들뜬다. 사적지 한 곳에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와 자릴 잡고 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물 제103호인 신라 때 조성된 당간지주다. 보원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와 고려 때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의 탑문이 묻힌 곳이다.

 

 

보원사지 발굴당시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발견되었으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매우 융성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 주변에는 100개소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보원사지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원사지에는 백제계의 양식에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탑양식을 갖춘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통 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조성한 한국최대의 석조(보물 제102), 975(광종26)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물 제105호 보승탑,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 보승탑비,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었던 당간지주 등 보물만 5점이 사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옆에 모아놓은 석물과 와편 등 수북해

 

보원사지로 접어들면 높이 4.2m의 당간지주가 앞에 서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 자리라고 한다. 절의 행사가 잇을 때 악귀를 쫓기 위해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놓을 때 사용하는 당간지주는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

 

당간지주 우측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가 보인다.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가장 큰 것으로 사지에 남아있는 고려 때의 보승탑 등을 볼 때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에서 금당방향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15년 전에는 이 내에 올갱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그것을 잡는 재미도 쏠쏠했다. 스님들의 포행길인 듯한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다. 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 지난날 보원사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전에는 금당 터도 발굴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찾아가보니 금당 터까지 발굴되었다. 금당 터 뒤편에는 부처가 앉았던 좌대가 보이고 그 앞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104호인 오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아래 기단부에 사자상을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8부 중상을 새겼는데 탑이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기분 좋은 답사, 이제부터 시작이야

 

하루 만에 참 많은 곳을 돌았다. 금당 터 뒤편에 높이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한 보물 제106호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제105호 법인국사탑. 두 기 모두 보불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원사지에는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 있는 보원사지의 석조물들. 시간이 가도 꼼꼼히 다져볼 수밖에 없다.

 

법인국사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던 탑이다. 975년에 건립된 이 부도탑은 나라의 장인인 국공에 의해 조성되었다. 팔각원당형의 형태로 조성된 부도탑은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중대석의 조각이 특히 뛰어나다. 이 부도탑은 상대석에 난간을 두른 것이 특이하다.

 

 

부도탑이 서있는 축대위에 올라서 앞을 내다본다. 시원하게 정비된 보원사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 전시해놓았다. 예전에는 없던 절이 들어와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대단한 보원사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문화재 옆에 세울 것 같으면 제대로 격식을 맞춰 마련할 수 없는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사지마다 한편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절들.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하겠지만 제대로 절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설프게 지은 절로 인해 오히려 소중한 문화재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답사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대원군 부친 남연군 무덤으로 폐사된 고려 절 가야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는 북쪽을 향해 서 있는 석불 한 기가 자리한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인 이 석불은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미륵불로 불리는 이 석불입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관에 소불을 새긴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길쭉하며 양 볼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있으며 좌편견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양팔을 몸에 붙이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고 왼손은 손등이 봉게 해 배에 대고 있다. 이런 유형의 불상은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석불입상은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묘에서 동북방향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불상은 원래 인근에 자리한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원군이 부친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없애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얼마나 그 행위가 불편했으면 돌부처도 등을 돌렸을까?

 

 

고려 때부터 전해진 가야사, 석재만 남아

 

덕산면 상가리에는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는 가야사지가 있다. 가야사지 추청불전지인 이곳은 옛 가야사의 석재가 한 곳에 쌓여있다.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시킨 절로 알려져 있다.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군은 가야사지의 보수 및 복원을 위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 조사를 벌여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와 석조불상 8, 청동불두 1, 가량갑사라 쓴 명문기와 등을 발견했다. 3차 발굴 시에는 남연군묘의 제각시설을 확인하여 남연군묘의 제각이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제각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야사지 한편에는 가야사지 발굴당시 찾아낸 석물들이 놓여있다. 이곳 가야사지의 중전(中殿)을 비롯한 불전지는 규모 18.2m × 14.2m의 대형 건물지로 확인되었다. 한편에 모아놓은 석물들은 이곳에 옛 가야사라는 절터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 가야산 한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던 절로 이곳 가야동이라 불리는 곳에는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가야사를 부수고 마련한 남연군묘

 

이곳이 명당이라고 절을 없애고 묘를 썼다는 대원군 이하응. 가야사지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둔덕 위에 마련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님연군 이구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석물들을 세웠다.

 

이구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었으나 대원군 이하응이 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명당을 알아본 결과 이 자리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에 1846년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를 옮기고 난 뒤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이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지관의 말대로 이곳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자리가 맞지만 그 2대를 끝으로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어째 지관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만 알고 나라가 사라질 것은 몰랐을까?

 

돌부처도 돌아선 남연군묘. 묘 아래편으로는 남연군을 운송한 궁중식 상여인 남은들상여를 보관한 전각이 있다. 남은들상여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강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이 금박이 있다. 님은들상여의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보호각에 있는 상여는 모조품이다.

 

 

 

주변에 관련되는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입안이 씁쓸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민초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거늘 어째 자신의 영욕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잘 꾸며놓은 남연군묘 앞에서 내려다 본 가야사지. 역사 속에서 숱한 사찰들이 사라졌지만 한 개인을 위해 사라진 가야사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 찾아온 봄을 맞이하다

 

정조가 현륭원(사도세자의 묘.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 이후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대나 용주사 일대를 비롯한 수원 화성 일원에 버드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재위 15년째인 1791년이다. 그해 1571주를 심기 시작해 몇 년에 걸쳐 수차례 버드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방을 쌓은 곳에도 심게 했다. 버드나무가 물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이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건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관망하는데 있어 어느 한 곳도 빠트리지 않도록 축조한 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곳

 

방화수류정이라는 명칭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닐기에 적합해 방화수류정이라 했던가? 41일 방화수류정을 찾았다. 매년 봄이 되면 연두색 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을 보기 위해 잊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17941019일 완공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하는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 보인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절경인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 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봄날 방화수류정의 버드나무에 반하다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임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방화수류정과 함께 있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방화수류정 주변을 돌아보면서 봄을 마음껏 느껴본다. 용연 주변에 심은 버드나무 가지에 연두색 잎이 돋아나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린다. 이런 멋스러움 때문에 정조대왕이 이곳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 남여 한 쌍이 방화수류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갖은 포즈를 다 취한다. 이 봄에 방화수류정에서 만난 수양버들만큼이나 저들도 들떠 있는가보다. 이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연두색 수양버들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용연, 정조대왕이 이곳을 좋아한 까닭은 바로 이런 봄날의 멋이 아니었을까?

 

613일에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다. 요즈음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거나 아니면 페이스북 친구를 하자고 신청을 한다. 요즈음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가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무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얼마 전만 해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한 겨울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이 찬바람이 부는 날 정조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기 위함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정조는 화성 곳곳에 그런 마음을 남겨두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눈이 바람이 옷깃으로 파고들지만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서역 앞에서 정조대왕을 만나다

 

화서역에 볼일이 잇어 찾아가는 길에 지하통로로 접어들었다.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지하통로 벽면에 화성이 그려져 있다. 화성의 돌로 쌓은 성곽이며 곳곳에 구조물들이 보인다. 봉돈, 팔달문, 포루 등을 만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니 말을 타고 장안문으로 들어가는 정조대왕을 그려놓았다.

 

현 영화동 주민센터 인근에는 영화역이 있었다. 영화역은 북문인 장안문 밖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역의 건물인 영화관 등을 합해 모두 5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은 물론 역 주변의 마을까지도 19세기 말 역참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역은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 한양의 남쪽에 소재하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모두 이주시켰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 <화성성역의궤> ‘연거도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횃불을 밝힌 모습이다

 

정조대왕은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전조대왕은 8일간의 행차 시 화성 가까이에 오면 황금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강한 왕권의 상징이다. 그런 정조대왕이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은 아마 장안문일 것이다. 벽화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그림 하나를 보면서 과거 화성으로 행차를 했던 정조대왕의 위엄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수원의 많은 벽화그림이 있지만 이렇게 화성과 정조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흔치않다. 짧은 이 지하통로 벽화가 더 살갑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