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도 많고 말도 많은 4대강 정비.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이 되는 4대강 정비는, 연일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한다고 한다.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가운데 4대강의 정비로 인한 문화유적지의 훼손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유역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고달사지 정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여주 해목산 기슭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고려 초기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 왕실 비호를 받는 대가람이었다. 광종 1년인 950년 원감국사가 중건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1260년(원종 1)에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나, 그 후 기록이 없어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 고달사지 발굴 위에서 내려다본 고달사지 발굴현장. 7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6차발굴까지 이루어졌다.

  
▲ 정비된 고달사지 2009년 10월 18일 찾은 고달사지. 이렇게 정비를 하는데 꼭 10년이 걸렸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의 명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달사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조 중기까지도 고달사가 번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가 절터에 남아 있으며, 보물 제282호 쌍사자석등 및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몸체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달사를 찾았을 때는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2004년 8월 12일이었다.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드러난 석물들을 한 곳에 모아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물은 보호철책을 둘렀고, 발굴 작업을 한 곳이 비에 훼손이 될 것을 우려해 천막으로 덮어놓았다.

 

  
▲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8호 석불좌. 주변은 다 파헤쳐지고 보호철책이 둘러쳐 있다

  
▲ 정비된 고달사지석불좌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 석불좌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탐방로를 만들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

  
▲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 석불좌가 있던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다. 주추돌이 남아있고 오르던 계단이 복원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4대강 유역 지표조사를 마치겠다고?

 

고달사지는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처음 발굴을 시작한 것이 2000년이었으니 고달사지 한 곳을 발굴, 정리하는데 6차 작업을 마친 2006년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4대강 정비라는 명목 하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날림으로 조사될 확률이 높다. 강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사람들은 물이 많은 강 주변을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형성한다. 하기에 4대강 정비를 하기 전에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돼 있는 문화재 보호절차 등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4대강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도 유적지일 가능성이 큰 지역이기 때문에, 먼저 지표조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 우너종대사혜진탑비 및 이수. 탑비의 몸통부분(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여 누구나 다가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헸다

2009년 10월 18일, 다시 찾은 고달사지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있었다. 보호철책으로 둘러  쌓았던 보물들은 철책 대신 주변 정리가 되어 있었고, 탐방로가 마련되어 있어 문화재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이렇게 정비를 마칠 때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회마을에 보를 설치하겠다고 발표를 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취소를 하는 등 개발계획을 남발하는 관계당국이다. 이런 관계당국이 올바른 지표조사를 하리라고 믿음이 가질 않는다. 4대강 유역의 문화재지표조사는 한 두 해에 마쳐질 것이 아니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아야 한다. 여주 고달사지 발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5)


고달사지 경내에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오르면서 조금 못미쳐 우측으로 길이 나 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산능선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보호철책 내에 정비되어 있는 석실을 볼 수 있다. 무덤 서쪽에는 연도폐쇄석이 놓여 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 46-1에 해당하는 곳. 경기도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의 형채를 상방하원형이라 부른다. 상방하원형이란 하부의 석실평면은 원형이고 연도가 달려 있으며, 상부는 네모난 방형의 2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임이 밝혀져 그 구조상의 특징을 살려 '상방하원석실묘'란 명칭이 붙여졌다.


지상구조는 2층의 제단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기단 1층의 규모는 동서가 442cm, 남북이 412cm, 높이 46cm로 장방형을 이루었고, 기단 2층은 동서가 322cm, 남북이 280cm, 높이는 50cm이다. 기단하부의 석실은 돌을 쌓아서 평면원형의 현실과 평면장방형의 연도를 만들었고, 평면의 모양은 열쇠구멍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고달사지를 답사한 후 석실묘를 답사하기 위해 산길로 올랐다.  산림욕도 즐길 겸 천천히 이야기를 하면서 20여분 만에 보게 되는 석실묘. 그런데 언제 정비는 했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석실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보호철책을 둘렀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보호철책에는 문이 없다. 석실 내부를 보아야 석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데, 보호철책에 문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석실을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 석실묘 입구 잡풀이 무성한 석실묘. 정리가 안된 문화재.

  
▲ 석실 내부 원형으로 된 석실내부

 

문제는 보호철책을 넘어 들어가서다. 석실 입구를 막은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창살 틈으로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어두운 석실 내부를 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떠야 한다. 이때쯤이면 화가 치민다. 도대체 문화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보호만 하겠다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문화재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들어갈 수 없는 철책을 두르고, 거기다가 열 수 없는 문을 만들었다면 문화재를 보라는 것인지, 보지 말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닫고 감추고 하는 것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고 느끼고 가야 올바른 문화재의 가치를 알 수가 있다. 고려 말기의 묘제 연구에 소중한 자료인 상교리 석실묘. 하루 빨리 묘실 안을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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