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구청의 개청을 선포하노라”
정조대왕이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3(매향동)에 나타났다. 손을 든 정조대왕은 ‘팔달구청의 개청을 선포하노라’라고 외쳤다. 신축한 수원 팔달구청의 낙성연이 베풀어진 자리이다. 5일 오전 11시, 그동안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세를 들러 살던 팔달구가 새롭게 청사를 마련하고 낙성연을 베푸는 자리이다.
낙성연이란 조선시대 국가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이나 새로운 관아가 생길 경우 낙성연이라는 잔치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대왕은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을 축조했다. 화성의 축성 공사를 마친 한 달 뒤인 1796년 10월 16일 화성 행궁 낙남헌에서 백성들과 함께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환경적인 청사
낙성연을 가진 팔달구 신청사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면적 1만2천628.11㎡로 단순한 관공서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주변에는 충분한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전시공간과 북카페, 소통의 공간과 저탄소 녹색환경의 수도 수원에 걸 맞는 태양광 발전, 옥상녹화, 자연환기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신청사 1층에는 종합민원과, 세무과, 기업은행, 당직실, 어린이집이 자리를 잡고 있고, 2층에는 구청장실을 비롯해 행정지원과, 안전주민자치과, 건설과, 건축과, 정보화교육장 및 의원실이 자리하고 있다. 3층에는 대회의실을 비롯해 사회복지과 경제교통과 환경위생과 교통상황실과 휴게실, 매점, 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팔달구청은 2012년 11월 23일 공사를 시작해 2014년 3월 31일에 공사를 마쳤다. 낙성연에 참가를 한 시민 임성희(여, 45세)씨는
“오늘 이렇게 새 청사를 마련하고 낙성연을 갖게 되어서 구민의 한사람으로 정말 기쁘다. 그동안 월드컵 경기장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구청에 갈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수원천과 화성박물관, 그리고 화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에 청사가 마련이 되어 마음이 뿌듯하다”고 했다.
한 시간 동안 다양한 행사 베풀어
낙성연은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가 취타대를 앞세우고 식장에 입장을 하면서 시작을 했다. 정조대왕의 낙성연 선포에 이어 예기보존회의 태평무, 사물과 탈춤이 어우러진 사자놀이, 그리고 여성민요그룹 아리수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낙성연장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 시민 천여 명이 함께 자리를 했다.
이날 낙성연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그동안 팔달구가 단독 청사가 없이 월드컵 경기장의 한편에서 구 업무를 보고 있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이렇게 신축을 하고 낙성연을 갖게 되어 팔달구민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내려놓게 되어 한 없이 기쁘다. 팔달구청의 신청사는 수원천과 화성박물관 그리고 주변에 행궁 등이 자리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문화와 생태가 어우러지는 수원시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청사라고 생각한다. 오늘 팔달구민들과 함께 마음껏 낙성연을 즐길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낙성연에 참석을 한 팔달구 구민이라고 밝힌 주민 한 사람은
“정조대왕의 개혁정신과 효를 상징하는 화성과 행궁, 그리고 소통의 중심이 되는 장안문서부터 팔달문까지, 또한 성곽의 대표적인 동문인 창룡문과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풀어 마련한 장시, 이 모든 것이 팔달구에 소재해 있다. 이렇게 버젓한 청사를 마련하고 보니 이제야 사통팔달의 팔달구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말 기쁘다”고 한다.
낙성연 행사를 마친 후에는 주민들이 참석한 단심줄 엮기와 청사 입주 테이프 커팅, 내빈들의 청사순회 시간도 함께 가졌다.
“정조대왕 납시오, 길을 여시오”
5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수원천 위에 걸린 매향교로 파발마들이 달려왔다.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으로 납신다는 파발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세 필의 말은 그렇게 대로를 달려 행궁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뒤이어 많은 무리들이 행궁을 향해 열을 지어 행진을 했다.
218년 전 정조대왕은 개혁정신과 당대 과학의 힘을 집대성하여,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성을 축조했다. 이 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으며, 사적 제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개혁사상의 산물이다. 강한 국권을 지향하던 정조대왕은, 가장 강한 군대인 장용외영의 무사들을 훈련시켜 이 화성을 지키게 만들었다.
수시로 화성 행궁으로 행행을 한 정조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행을 하였다. 이는 1년 평균 약 3회 정도를 행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행행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을 참배하였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현릉원으로 원행을 할 때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수원 현릉원의 원소재실까지의 지명과 행궁, 교량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으로 지역 경계나 지역 간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원행정례에 의하면 시흥로의 경우 전 노정의 길이는 83리, 교량 24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행궁 앞 상설 한마당 개막
5일 수원 화성 행궁일대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능행차반차도에 기록된 8일간의 화산릉 행차가 재현이 된 것이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어가행렬로 인해, 주변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가 묻힌 화성 현릉원을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 또는 ‘화성행차도’라고도 한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례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1795년 음력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이루어진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어머니인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동행하였다. 그 외에 우의정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천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반차도에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파발 뒤에 이루어진 어가행렬
5일 이루어진 어가행렬은 연무대에서 화성 행궁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행렬 또한 약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은 그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당시의 모습을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먼저 말 3필이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행차함을 알리는 파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뒤이어 경기감사, 훈련대장 등 말을 탄 정조대왕 당시의 인물들이 지나고, 뒤편에는 말을 탄 정조대왕과 어머니인 가마에 오른 혜경궁 홍씨가 이어졌다. 주변에 구경꾼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행궁을 행해 가는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외국의 방송사들까지 촬영에 열심이다.
“정말 멋있습니다. 이런 행렬은 수원이 아니면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수원시민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 합니다. 정말 행복하네요.”
길에게 어가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한 시민의 말이다. 이렇듯 행궁 앞 상설한마당의 개막일에 만난 정조대왕.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대왕의 백성사랑과 그 품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꽂도 사람도 하나가 된 경기도청 벚꽃놀이
벚꽃이 지난해보다 조금 일찍 만개했다. 2일 오후 경기도청 일원에는 꽃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족끼리 나와 음식을 나누면서 즐기는 사람들, 연인인 듯한 사람들은 서로 카메라에 모습을 담아주느라 부산하다. 친구끼리 사진을 서로 돌려 찍어주면서 웃는 모습들과, 웃음소리가 벚꽃과 함께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된다.
경기도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도청운동장 및 도로 내, 외곽 주변에서 벚꽃축제를 연다고 밝혔다. 예년처럼 음악회 등은 없지만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도민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올해 벚꽃축제. 프로그램도 상당히 다양하게 준비가 되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으로 기대된다.
다양한 체험부스 등 운영
이번 벚꽃축제에서는 정보화마을 운영 및 좋은 가게 소개, 경기 600년 관광홍보물 및 기념품 전시, 가족건강 지원센터 홍보, 내 맘처럼 아이키우기 좋은 경기도, 찾아가는 일자리 상담부스 운영, 굿 게임쇼 코리아 2014 홍보체험, G마크 우수농산물 사이버 장터 홍보 등도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2013 건축문화상 수상작 전시와 치매미술전시 등도 준비한다고 한다. 벚꽃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에게 무료 안마체험과 건강체험센터, 어린이 교육체험 프로그램과 찾아가는 녹색체험관, 유기견 없는 경기도, 어린이 승마 체험 등도 즐길 수 있다고. 이렇게 다양한 체험부스를 운영하는 이번 벚꽃축제에 거는 기대도 상당하다.
저마다 사진촬영 등을 하면서 즐겨
2일 벚꽃을 관람하러 가족들과 함께 나왔다는 이아무개(남, 43세. 정자동)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일찍 벚꽃이 만개했다고 하는데, 오늘이 가장 좋은 모습인 듯합니다. 4일부터 축제를 연다고 하는데 그때쯤이면 벚꽃이 많이 바람에 날릴 것 같아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늘 이렇게 구경을 나온 것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안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화성을 돌다가 꽃이 핀 것을 보고 왔다는 이송희(여, 22세)양은
“정말 아름답게 꽃이 피어서 화성을 한 바퀴 돌다가 내려왔어요. 오늘이 마침 절정인 것 같아서 너무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따 행궁 앞에서 무예24기 시범을 보아야하는데, 그때까지 꽃구경 실컷 해야겠네요. 이렇게 만개한 벚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행복해요.”라고 한다.
정작 축제 때는 꽃이 질 수도 있어
기상에 이변이 없다고 하면 축제 때도 만개한 벚꽃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목요일에 영남과 중부지방에 비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걱정스럽다. 다행히 중부지방은 5mm 정도의 비가 예상되고 있어 만개한 꽃이 다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러 찾아 올 경기도청 벚꽃축제는 그래서 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수원은 많은 비가 올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약간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긴 하지만 꽃이 다 떨어질 정도는 아닙니다. 문제는 바람을 동반하고 있을 경우 꽃잎들이 다 질 수도 있기에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기상청 관계자의 말이다.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즐기는 경기도청 벚꽃축제.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개나리와 진달래 등을 함께 즐길 수 있어 더욱 좋다. 올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연보다,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체험부스를 많이 준비하고 있어서 또 다른 축제를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화성이 꽃을 입었다면 그 모습은?
사적 제3호,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보물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특이한 성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수원 화성. 이번에 화성을 돌아본 것이 벌써 7번째이다. 화성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 마디로 싸움을 하기 위한 성곽이긴 하나, 그것이 다가 아니란 생각이다.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많은 파손을 가져왔으며, 여기저기 탄흔이 보이기도 한다.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수원 화성.효심에서 시작되어 당파정치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그 결실을 보기 위해 축성을 한 화성.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화성이 꽃피는 계절을 맞이하여 꽃으로 치장을 하였다. 화성과 꽃, 화성을 돌다가 보면 주변에 핀 꽃들과 유난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화성의 ‘홍이포’는 영조 때 우리기술로 만들었다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는 적대라는 구조물이 있다. 이 적대는 장안문을 지키기 위한 시설로 적대에는 홍이포를 설치하였다.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홍이포는 ‘남만대포(男蠻大砲)’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으며, 홍이포는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 ~ 5km 유효사정거리는 700m 인 전장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강화부의 화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홍이포
홍이포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1664년이다. 당시 강도어사 민유중이 병자호란 이후, 강화부의 미곡과 화기에 대한 보유 상황을 조사하는데, 그 목록에 남만대포라는 화기가 등장한다. 당시 강화부의 화기류는 『현종개수실록』 현종5년 6월 계축조에 의하면, 진천뢰 140좌, 대완구·대포·중포가 65좌, 소완구 30좌, 호준포 37좌, 각 보에는 대포 179좌, 진천뢰 63좌, 남만대포 12좌, 불랑기 244좌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남만대포 12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남만대포인 홍이포는 12좌로 다른 화기보다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만대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불랑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되는 1593년 정월 이후, 명에 의한 평양성 공격을 계기로 본격적인 도입이 모색되었다. 그 당시는 서양 기술이 도입된 대포의 호칭에 대해서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았던 게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만대포와 불랑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랑기와 홍이포는 다른 종류의 대포임을 알 수 있다.
화성의 홍이포는 영조 때 우리가 만들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이’는 붉은 오랑캐라는 말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인을 뜻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선교사들에 중국 명에 전해진 서양대포를 말한다고 했고,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 조선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영조7년 9월 신사조에 기록된 훈련도감의 보고 기록에는
「본국(훈련도감)에서 새로 마련한 동포(銅砲)가 50이고, 홍이포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입니다. 동포의 탄환거리는 2천여보이며, 홍이포의 탄환거리는 10여리나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예람하시도록 올리니 강동한 자들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홍이포는 박연이나 하멜이 갖고 온 것이지만, 조선 영조 이후에는 홍이포를 직접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화성에 진설된 홍이포는 순수한 우리기슬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있다. 홍이포는 포탄이 여러 조각으로 폭발하는 산발식이 아니라 둥그런 철환 덩어리들이 목표물을 부수는 형식의 대포이다. 하기에 최대사정거리는 2~5km에 이르는 홍이포가 유호사정거리 700m에서 그 철환들이 갖는 위력은 놀랄 만 할 것으로 보인다.
장안문과 팔달문 양편에 적대를 만들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에 놓인 홍이포.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유입한 홍이포가 아닌 영조 때 우리기술로 만든 홍이포. 사정거리가 700m에 이르는 이 홍이포의 위력이야말로 화성을 지켜내는 화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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