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각루 안에 숨어있는 정조의 애민정신
화성 가까이에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일 수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일부러 화성을 찾아가지 않아도 일을 보러 드나드는 길에 늘 만나는 것이 화성이고 보면, 화성과 함께 살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성의 동편 마을, 마음이 따듯한 곳 지동’에 살고 있다는 것은 행복 그 이상이다.
눈이 오고나면 화성은 변화를 시작한다. 사철 어느 계절에 화성을 돌아보던지 화성은 늘 새롭다. 철에 따라 느끼는 바가 틀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화성을 백번만 돌아보면, 숨어있던 화성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엊그제 꽤 많이 내린 눈이 녹기 전에,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남수문을 지키던 동남각루
각루란 성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한다.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정자와 같은 건물을 지을 때 ‘정(亭)’과 ‘루(樓)’로 구분을 한다. 정은 땅의 지면에 붙여지은 건물을 말하고, 루는 아래로 사람들이 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중층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남수문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남각루가 있다. 이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지켜내기 위한 구조물이다. 동남각루는 남공심돈(지금은 유실되어 버린 화성의 구조물 중 하나이다)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으며, 그 중 동남각루가 가장 규모가 작다. 동남각루는 화성에 설치한 각루 중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로도 사용한 곳이다.
동남각루에 깃든 정조의 애민정신
화성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가 있다. 화성을 축성할 때 정조대왕은 성을 일부러 설계번경까지 해가면서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화성을 쌓는 노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이나,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준 것 등은 모두 정조의 애민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심지어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도 정조의 애민정신의 하나이다.
노역자들이 더위에 일을 한다고 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척서단이라는 환약을 지어 공사를 하는 인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은 그런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가 있는 대목이다. 동남각루라는 건조물 하나를 보아도, 정조대왕이 얼마나 화성을 지키는 장용외영의 군사들을 자식처럼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온돌방을 드린 동남각루
남수문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로 향했다. 요즈음은 동남각루의 중층 누각의 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안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사방을 돌면서 동남각루를 촬영한 후 그 밑에 있는 벽돌로 쌓은 곳을 살펴본다. 동남각루 한 편에 굴뚝이 서 있다. 연도는 땅에 묻혀 보이지가 않지만, 그렇게 벽돌로 삼면을 쌓은 곳이 바로 온돌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궁이도 보인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누각 위에서 쉴 수가 있고, 날이 찬 겨울이 되면 온돌방에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따듯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마련을 한 것이다. 화성의 건축물들은 대개가 이렇게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시절에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정조대왕은 꼼꼼하게 따져 계절에 따라 병사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화성을 다 돌지 않아도, 동남각루 하나만 보아도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가 있다. 모처럼 돌아보려고 마음먹은 화성. 가장 먼저 눈에 띤 동남각루 앞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과연 이 시대에 정조대왕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화성 창룡문에는 왜 ‘오성지(五星池)’가 없을까?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위에 적루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옹성 문 위에 보면 구멍 5개가 나란히 뚫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성지로 일종의 소화를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는 시설이다. 이 오성지는 장안문과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팔달문의 옹성문에도 조성을 했다.
이 오성지가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있는데, 왜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는 없는 것일까? 눈이 쌓인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나름 생각해본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옹성의 형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렬로 선 옹성의 문은 군왕의 위용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문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장안문의 앞으로는 북옹성을 쌓았는데, 그 중앙에 옹성의 문을 달았다. 옹성의 문과 장안문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이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의 문이, 성문의 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은 위용을 보이기 위함이란 생각이다.
평산성인 화성에는 해자가 없다. 주변이 모두 논밭이어서 해자가 없어도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오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으로 이어를 한다거나, 행궁에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인 융건릉으로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행차를 한다면 이렇게 일직선상에 문이 나 있지 않았으면 위용이 있겠는가?
하기에 그 옹성의 문 위에 적의 공략시에 화재를 대비해 오성지를 조성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꼭 오성지가 없다고 해도 장안문이나 팔달문을 공략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장안문의 양 편에는 적대를 두어 포를 설치하고 있고, 팔달문에도 남포루와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이 있어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을 튼 창룡문과 화서문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보 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보 3 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보 1척이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척 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척 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촌]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척 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척 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 그 남쪽 끝에는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창룡문의 옹성에 대한 설명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의 옹성에는 성문이 없다. 그리고 한 편을 튼 형태로 조성을 했다. 옹성의 문이 없으니 당연히 오성지도 없다. 그런데 이곳은 왜 문을 달지 않고 한편으로 성을 튼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옹성의 문이 없다면 적의 공략을 막아내는 대는 어렵지 않을까?
창룡문과 화서문이 공략하기가 더 어렵다
15일 아침. 이른 시간에 화성으로 나갔다. 1박 2일로 여행을 할 계획이었으나 여기저기 취재 요청이 들어오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가 되었다. 눈이 쌓인 화성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줄을 지어 지나간다. 요즈음 화성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창룡문을 꼼꼼히 따져본다. 굳이 오성지를 마련하지 않고, 한편을 튼 상태로 옹성을 축성했는가를.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수긍이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은 옹성의 형태가 같다. 창룡문의 앞은 내리막이다. 공성무기를 끌고 올라가기가 쉽지가 않다. 거기다가 파문(破門)을 하기 위해 공성무기를 옮긴다고 해도, 옹성을 거쳐 성문을 깨기란 날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우선은 옹성의 양편이 치와 같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곳을 통과하는 것만도 어렵다. 어렵게 그곳을 지나 옹성안으로 들어가면,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거기다가 옹성과 성문 사이가 불과 12보 정도이다. 그 안에서 성문을 깰 수 있는 공성무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축성과 구조물을 조성한 화성. 그 문 하나에도 일일이 지형과 쓰임새를 보고 축성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옹성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왔다. 저편 동장대와의 사이에 동북공심돈과 동북노대가 보인다. 창룡문을 취하기 위해서 성문으로 다가간다면, 그곳에서 쏘아대는 화력을 당해내기도 어려울 듯하다. 화서문의 곁에도 서북공심돈이 자리를 하고 있지 않던가? 문루나 옹성에 오성지가 없어 행여 화를 미치지 않을까를 생각해 낸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괜한 걱정 떨쳐내고, 눈길을 걸어 화성의 설경에나 취해보아야겠다.
화성 방화수류정, 그 아름다움에 취하다
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7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 9월 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월 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정자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좇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성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단의 벽돌담으로 쌓은 위에 지은 정자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에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아름다운 십자문양의 벽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를 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의 기단을 오르면 정자가 한편으로 서 있게 된다. 정자는 남쪽은 쪽문의 위까지 돌출이 되고, 북쪽은 중앙으로 돌출을 시켜 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했다. 그저 넘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이 된 아름다움이다. 일단의 기단 위 공백은 네모난 흑색으로 된 돌을 깔았다. 그런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방화수류정이다.
지붕위에 올린 용두
아마 방화수류정만큼 많은 용두가 지붕 위에 올려 진 건물은 없을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정자가 여기저기 돌출이 되어있고, 그 돌출이 된 곳의 지붕이 서로가 엇물려 있다. 그 양편에 모두 용머리를 올렸다. 또한 한 가운데는 절병통과 같은 모양도 있다. 이렇게 많은 용머리를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수원 팔경의 하나인 '용지대월'이 용연에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님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멋진 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강릉 경포호에도 있다. 그러나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그것과는 뜻이 다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이 용연은 화성의궤에 나타난 용연과는 다르다. 지금의 용연은 당시의 용연보다 많이 형태가 달라졌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는,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연못보다 오히려 크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용연이 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도 한결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찬바람도 마다않고 찾아간 곳에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잃어버렸다.
무예24기, 그 아름다운 모습
무예 24기는 정조임금이 실전에 맞게 집대성한 것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를 말한다. ‘무예24기(武藝二十四技)’는 조선시대 군사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의 무예로, ‘무예이십사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무예도보통지 속에는 무예이십사기로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각종 외침을 겪었던 조선이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무예 중 정수만을 집대성한 실전무예이다. 더욱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나라의 무기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던 무기들까지도 그 동작 등을 실어 실전의 교범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가히 당대 최고의 무예지라고 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무예 24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본국검 2. 예도 3. 제독검 4. 쌍수도 5. 쌍검 6. 마상쌍검
7. 등패 8. 왜검 9. 왜검교전 10. 월도 11. 마상월도 12. 협도
13. 장창 14. 기창(騎槍) 15. 죽장창 16. 기창(旗槍) 17. 당파 18. 낭선
19. 권법 20. 곤봉 21. 편곤 22. 마상편곤 23. 격구 24. 마상재 등이다.
화성 장용영의 후예, 무사 배국진
월도를 앞에 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월도를 하늘 높이 받쳐 들었다. 선대의 장용영 무사들에 대한 예의였다. 햇볕에 번쩍이는 월도가 바람을 가른다. 순간 단단하게 묶어 놓은 5개의 짚단이 한 순간에 동강이 난다. 짚단의 검불이 날아오른다. 기합소리에 함께 순식간에 짚단이 날아간 것이다.
지난 20일, 수원 화성 동문인 창룡문 앞에서 수원문화재단 소속인 무예24기 시범단의 공연이 있던 날 수석단원인 무사 배국진(남, 45세)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정조시대의 장용영 무사들이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날이 지나면서 그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24일 오후, 시범공연을 하는 화성 행궁 신풍루를 찾았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관심이 높아
“이제 무예를 시작한지는 20년이 되었나 봐요. 1994년부터 시작했으니까요. 그 이전부터 우리 무예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그 전에는 태권도를 했거든요. 공인 5단예요. 그런데 무예 24기가 더 하고 싶어서 무예를 시작했어요. 제 갈 길을 바로가지 못한 것이죠.”
말을 하는 것이 칼을 휘두르고, 월도로 짚단을 베는 우락부락한 무사이기 보다는 곱상한 처자같이 조심스럽다. 배국진씨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로 단련되었다. 공인 5단이라고 한다. 부친이 태권도 공인 9단이시고, 어려서부터 부친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서 수련을 했단다. 대학은 전기공학과를 나왔지만 무예에 깊이 빠진 마음은 자꾸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예24기 시범단 창단 멤버
“무예24기를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2003년에 무예24기 시범단이 수원에서 창단되었어요. 그때 이곳에서 본격적인 무예 시범을 보일 수가 있어서 행복했죠. 지금은 시범단 3명의 수석단원 중 한 명입니다. 날마다 두 차례씩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어요.”
자신이 좋아서 택한 길이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나니 생계가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아내가 함께 맞벌이를 하지만 그래도 윤택한 생활은 아니라는 것. 늘 아내와 아이들에게 마안하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면 좋죠. 하지만 저희들은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시범을 보이는 날만 일급으로 수당을 받고 있어요.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시범을 보이지 못하면, 대체 근무를 서죠. 그것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그런 날은 아예 공치는 날이었거든요. 고생을 하는 집사람에게는 늘 미안하죠.”
수원 최고의 문화 콘텐츠, 활성화 되어야
수원 화성 행궁을 찾는 사람들은 수원의 최고 문화 콘텐츠는 바로 무예24기라고 한다. 그들이 무예24기 시범이 열리는 행궁 신풍루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무예24기 시범 때문이다. 수원 화성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무예24기 시범단의 생활은 넉넉지가 않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지금 화성열차가 달리는 길을 옛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듯, 그렇게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꿈을 꾸죠. 그리고 동장대에서 활을 쏘고 무예 시범을 보이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무예24기를 즐겨 찾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말을 하지만 무사 배국진씨는 정말 마음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수관과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실내 공연장이 필요한 것은, 눈이오나 비가오나 이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는 머리가 하얗게 백발이 날리더라도 무예24기를 할 것입니다. 멋있잖아요, 예전 무사들처럼 백발을 날리면서 말을 타고 창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무예24기와 함께 할 것입니다.”
신풍루 앞에서 보인 오후 3시 시범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일어서는 무사 배국진씨.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무예24기 시범을 보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서 정조대왕 시대의 장용영 무사의 기개가 보인다. 딴 고장에서처럼 수문장 교대행사를 벌이는 것이 아닌, 진정한 무예를 보여주는 무예24시 시범. 장용영의 후예 무사 배국진씨가 자긍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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