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도는 경기도 안산시에 속해 있는 섬이다. 안산시는 공업단지가 가장 많은 곳으로 변해, 문화재들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도 몇 점의 소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전역에 많은 문화재들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안산시 대부북도에는 쌍계사라는 전통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쌍계사하면 하동 쌍계사를 떠올리지만, 그 외에 여러 곳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들이 있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널찍한 경내에 봄기운이 완연해

 

4일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를 하여 답사를 떠났다. 안산시에 소재한 몇 곳의 문화재와 쌍계사, 그리고 대부도와 연결이 되어있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선재도와 영흥도를 둘러볼 계획으로. 안산시 별망성지를 돌아 찾아간 쌍계사. 극락보전을 중심에 두고 한편에는 삼성각이,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약수가 나온다는 용바위를 보전하는 전각이 있다.

 

너른 마당에는 봄볕이 완연하다. 약간의 찬바람이 불고는 있지만, 절을 찾아가는 산길에는 벌써부터 농사꾼들의 작업이 한창이다. 최초로 창건할 당시에는 경기도 남양부지 서령대부도였다는 대부북도 쌍계사. 쌍계사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 목조여래좌상과 제182호인 쌍계사 현왕도, 그리고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인 아미타화상도를 소장하고 있다.

 

 

신비한 용바위, 유리 밑으로 물길이

 

극락보전에 들려 참례를 한다. 언제나 사찰을 들어서면 먼저 하는 의식이다. 꼭 돈독한 신앙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문화재가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서 용바위가 있다는 전각을 살펴본다. 앞에는 병을 낫기를 기원하는 촛불들을 켜 놓았다. 용바위의 물길이 흐르는 곳은 유리로 막아 놓았다.

 

방석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물길 위에서 앞에 걸린 용왕신의 탱화를 보고 절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은 섭섭한 생각이 든다. 그 몸에 좋다는 물을 한잔 떠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 물을 발견한 것은 정수암이라는 절을 처음으로 창건한 취촉대사가 발견을 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산 중턱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용 다섯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에서 깬 취촉대사가 그 자리를 파보니 용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여겨 그 자리에 정수암이라는 암자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물에는 철분 및 탄산수가 많아 위장병 및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약수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쌍계사의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학생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듯하다. 개구리가 동면을 깨고 나온다는 경칩을 하루 앞둔 5일 찾아간 대부북도 쌍계사. 그곳에는 이미 봄이 발치 앞까지 와 있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609-1번지. 미륵산 정상 부근에 있는 옛 절터인 사자사터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사자사지(師子寺址)’는 현재는 사자암이라는 작은 절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차도가 없어 걸어서 미륵산 정상 부근까지 걸어 올라야 한다. 날이 잔뜩 흐린 날 찾아간 사자암.

 

절 입구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기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만만치 않을 것만 같다. 천천히 좁을 길을 따라 오르니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그런데 얼마 오르지 않아 후두둑거리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런 낭패가 있나. 답사를 나갈 때 늘 챙기는 것이 우신이지만, 이 날따라 우산도 지참하지 않았다.

 

 

익산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한 사자사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된 사찰이다. 백제의 무왕과 선화비가 이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그곳에 절을 이룩하라고 일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자사로 행차를 하던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라고 일렀으니 그보다 먼저 창건한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자사는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준 점에서, 백제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하지만 이 사자사의 위치에 있어서 논란이 제기되어왔지만, 1993년 발굴조사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사자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지금은 옛 모습은 찾을 수가 없고, 현재는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그리고 창고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 석탑 1기가 남아있다.

 

 

자욱한 운무 속 풍광이 일품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가 않다. 그저 걸음을 빨리 옮겨 사자암으로 가서 피하는 수밖에. 조금 더 오르니 길이 가팔라진다. 그런데 우리가 걷는 소로 길 옆으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곁으로 지나가는 것을 짐을 운반하는 곳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화라도 걸어 볼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편히 오르려고 하지만,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 걷는 것을 우선한다. 그래야 절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다. 많이 내릴 것 같았지만, 비안개인 운무만 자욱하다. 길이 바위 위로도 나 있어 위험하다. 비에 젖은 바위는 더 미끄럽기 때문이다.

 

 

저만큼 사자암의 담장이 보인다. 그리고 절로 오르는 계단의 우측에 커다란 바위에는 獅子洞天이라고 깊게 음각한 글자가 보인다. 누가 이곳에 이렇게 글을 새겨놓은 것일까? 대웅전 입구에 낯선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석질로 보나 깨나 오래됨직해 보인다. 하지만 제 짝을 맞추지 못한 것만 같다.

 

문화재는 없지만 후회가 안 돼

 

미륵사보다도 먼저 창건을 했다는 사자사. 하지만 그 어디에도 문화재는 찾아볼 수가 없이, 사자사지만이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을 뿐이다. 하지만 비까지 맞으면서 힘들게 올라간 사자암에 문화재가 없다고 해도, 마음 한편이 너무 즐겁다. 운무가 자욱한 모습이 정말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절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사찰이면 문화재 하나쯤은 다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자암은 문화재는 없었다. 딴 때 같았으면 마음 한편이 허전했을 텐데, 사자암은 오히려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제 나도 슬슬 절에 익숙해져 가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미 30년 세월을 길에 서 있었으니.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산136-11에 소재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인 고성화암사(高城禾岩寺)’는 신라 혜공왕 5년인 769년에, 법상종의 개조인 진표율사가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이 절은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3년인 1625년에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그 뒤 고종 1년인 1864년에는 지금 있는 자리인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1912년에 다시 화암사(禾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에 타 모두 소실이 되었던 것을 훗날 법당만 다시 지었다. 화엄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들은,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준비를 위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다.

 

 

화암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군과 일부 계단석이 남아 있다. 화암사는 금강산 일반 이천봉 팔만 구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봉우리의 두 번째인 신선봉의 바로 아래 세워져 있다고 한다.

 

수바위에 얽힌 전설

 

속초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금강산 화암사라는 이졍표가 보인다. 또 한 곳은 속초에서 미시령 터널로 향하다가 미시령 옛 길로 접어들어도 같은 이정표가 보인다. 어느 방향을 택해도 화암사를 찾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화암사경내를 향해 가다가 좌측에 보면 희게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바위를 수바위라고 부른다.

 

이 절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화암사라 부른 것은 1912년부터이다. 절 이름을 바꾸게 된 것도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 모양의 바위인, 이 수바위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화암사의 스님들은 모두 수바위 위에 편안히 앉을만한 곳을 찾아 좌선을 시작했다. 이 수바위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그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의 공양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주를 해오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을 하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지팡이로 세 번만 두드리면 쌀이 나올 것이다. 그 공양미로 밥을 지어먹고 열심히 수행에만 힘쓰라고 사라졌다. 꿈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백발노인을 본 것을 이야기를 한 스님들은 백발노인의 말대로 했더니 정말 쌀이 나왔다.

 

 

지금도 이 수바위에서 기도를 한 스님이나 신도들이 밤에 꿈을 꾸면 이 백발노인이 나타나 미리 닥칠 일을 알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회암사로 이름을 바꾸게 한 그 수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은 어찌되었을까? 여기도 마찬가지로 욕심이 많은 한 사람에 의해 그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전설은 그렇게 어디서나 똑 같이 마무리를 한다.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

 

봄이 금강산 줄기 아래 고성 땅에 꽃소식을 몰고 올 때 찾아갔던 회암사. 한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삼성각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미 촬영을 다 마치고 여유롭게 삼성각을 합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화암사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서원이 이루어지려나?

 

 

삼성각 안 벽면에는 금강산 천신대, 상팔달, 세선봉, 삼신대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긴 이 화암사에서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고 난 뒤 그의 제자 100명이 화엄경을 배우다가 그 중 31명이 하늘로 올라가고, 남은 69명은 무상대도를 얻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는 고성 끄트머리에 있는 절 건봉사에도 전한다. 건봉사에는 그렇게 많은 스님들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곳에 등공탑이 서 있어, 이곳보다 더 실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삼성각에서 참배를 하고 전각 밖으로 나온다. 수바위에서 불어온 바람 한 점이 108배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이런 행복함에 절을 찾는 것이다 아닌지.

 

보덕사는 신라 문무왕 8년인 668년에 의상조사가 지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조선의 비운의 왕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유배당할 때, 절 이름을 노릉사(老陵寺)’로 고쳤기도 했다. 후에 단종의 능인 사적 제196호인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영조 2년인 1726년에 보덕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덕사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절이다. 영월읍내서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장릉을 찾아가는 길에 들릴 수 있는 절이기 때문에, 큰 불편을 겪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이 보덕사에는 수령 600년 이상이 된 느티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긴 역사의 질곡을 그대로 받아들인 곳이란 생각이다.

 

 

화려한 공포가 돋보이는 극락보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0이 소재하고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인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에 운허선사와 원경국사가 늘려 지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칸은 5개의 빗살문, 양 옆칸에는 각각 3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며 현판은 김규진이 썼다. 현재 보덕사의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아마도 고려 때 지은 극락보전은 유실이 된 듯하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원래 아미타불은 법장비구였다. 아미타불을 다른 명칭으로 무량수여래불이라고도 부른다. 아마타불은 서쪽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며, 석가모니가 살아생전 그의 부친인 정반왕이 아미타불에 의지하여 극락세계를 가실 것을 권고한 일화는 유명하다.

 

보덕사, 왜 슬픔이 일까?

 

극락보전으로 들어가 참배를 한다. 그저 습관적으로 절을 찾아가면 제일 먼저 중심 전각을 찾아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20년 넘게 다닌 답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서원을 할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슬픔이 말려온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도. 아마 이곳이 단종의 원찰이기 때문이었나 보다.

 

 

사실 보덕사를 찾아가기 전 먼저 장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청령포며 관음성, 자규루까지. 그 모든 곳에 단종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참이나 그렇게 맥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가 보다. 인기척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밖으로 나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신신각, 사성전. 해우소까지 한번 들러보지만 쉽게 아른 가슴이 가시질 않는다. 산자락 밑에 보이는 작은 부도 하나가 마음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도대체 누구의 부도일까? 부도란 그 절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입적하신 분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부도는 어느 스님의 것인데 이리 초라한 것일까?

 

 

올 봄에는 영월로 가고 싶다.

 

영월은 서너 번을 답사를 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찾을 때마다 비가 뿌렸다. 왜 그리도 철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갈 때마다 비가 뿌렸는지 모르겠다. 영월을 들어설 때까지도 말짱하던 날씨가 영월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비가 왔다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월은 늘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올 봄에는 영월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이미 다녀온 지가 수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날을 잡아 영월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싶다. 눈만 감아도 여기저기 돌아볼 곳들이 눈에 삼삼하다. 그곳에 가면 또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해가 지나며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으려는지.

 

설악산, 한 겨울에 보면 정말 설악이란 말이 실감이 나는 산이다. 속초에서 3년 정도를 머무는 동안 참 수도 없이 발걸음을 했던 곳이지만, 내가 본 것은 그 광활한 설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설악산은 수많은 비경을 숨기고 있는 곳이다. 난 설악산을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새색시가 몸 전체를 장옷으로 감추고, 겨우 눈만 뭇 남성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곳같다고. 그만큼 설악산은 우리에게 많은 곳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래도 감출 곳은 다 감추고 있는 듯하다. 설악산에 8기가 있는 것도 그만큼 이곳은 감추고 있는 곳이 많다가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명명한 것이나 아닐까?

 

 

설악산의 기이한 현상이라는 8(八奇)

 

설악산에는 팔기팔경이 있다. 여덟 가지의 기이함과, 여덟 가지의 절경이 있다는 소리이다. 그 중 팔기는 첫째 천후지동(天候地動)이라고 하여서 여름철이면 비가 많이 내려 뇌성벽력이 칠 때, 땅이 갈라지고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를 꼽았다. 두 번째는 기암동석(奇巖動石)으로 흔들바위와 같이 흔들리는 괴이한 돌이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백두구혈(百斗九穴)이라고 했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 외가평에서 백담사로 가는 길목의 백담계곡에 하식작용에 의한 구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전석동혈(轉石洞穴)로 외설악의 계조암은 대표적인 전석동혈이다. 바위와 바위가 서로 맞대 생긴 굴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수직절리(垂稙節理)로 암질과 구조의 차이에 의해 차별침식으로 생겨난 내설악의 하늘벽, 외설악의 천불동처럼 절리현상에 의해 생겨난 천태만상의 형상을 말한다.

 

 

여섯 번째는 유다탕폭(有多湯瀑)이다. 12선녀 탕과 같이 쏟아지는 물로 인해 바위가 패여 마치 탕처럼 생긴 것을 말한다. 일곱 번째는 금강유혈(金剛有穴)로 비로봉의 금강굴과 같이 큰 석산에 바위가 생긴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동계설경(冬季雪景)으로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려 11월부터 이듬해 음 3월이 지나도록 백설이 만연한 것을 말한다.

 

주변조차 둘러보기 버거운 설악산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설악산 입구에 있는 신흥사를 지나 천천히 산길로 접어든다. 길옆에 선 이정표를 보니 비선대 2.5km, 금강굴 3.1km라고 적혀있다. 그저 흰고무신을 신고 나들이 겸 금강굴을 오르고 싶었을 뿐이다. 바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주변 경관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길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숲길을 걷고 있다. 아마 이 너른 설악의 어디를 찾아가는 것이겠지? 설악에서는 궁금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저 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를 들어 궁금증을 갖는다면, 어디 한 곳 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숲속 냄새가 짙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돌들이 삐죽 고개를 내민 길을 걷는다.

 

그렇게 걷다보면 비선대를 만난다. 커다란 암반에 누군가 커다랗게 비선대라고 음각을 해놓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잡다한 글들이 보인다. 비선대를 지나면 길이 갈라진다. 오른편 산길로 들어서면 금강굴로 가는 길이고, 왼편 숲길로 들어가면 천불동을 지나게 된다. 금강굴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원효대사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금강굴은 신라의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왜 스님은 이곳 설악산 비로봉 아래 굴에서 정진을 하셨을까? 금강굴이라는 명칭도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 중 앞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금강굴은 외설악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수 있다는 곳이다.

 

길이 점점 가팔라진다. 이제는 뒷짐을 지고 여유를 부리기에는 버겁다. 새로 조성한 듯한 층계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위로만 치솟는다. 계단을 오르니 다시 암벽에 겨우 달라붙은 수직계단이 나온다. 비로봉 수직절리에 매달린 듯한 철계단. 그 위에 원효스님이 정진하셨다는 금강굴이 있다.

 

원효스님은 저 곳을 어찌 오르셨을까? 그 때는 이런 구조물도 없었을 텐데. 설마 날아오르지는 않았을 테고.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올 수도 없는 곳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철계단을 오른다.

 

금강굴에서 천불동을 바라보다

 

 

금강굴. 1300년 전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하셨다는 곳이다. 스님 한 분의 독경소리가 비로봉 벽을 타고 계곡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 계곡 밑에 바로 비선대가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 천불동 솟은 바위들이 가득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던가?

 

죽 일렬로 선 것 같은 천개의 봉우리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천불동. 그 천불동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원효스님은 이곳을 어찌 아셨을까? 아무리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이 자리에서니 모르는 것 투성이란 생각이다. 이곳에서 천불동을 백날만 바라보고 있어도 무엇인가를 깨달을 것만 같다.

 

 

이른 아침 원효스님의 체취를 만나기 위해 오른 금강굴. 굴 입구에 서서 이곳이 왜 설악 8기 중 한 곳인가를 깨닫는다. 아마 스님도 이곳에서 그런 깨우침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한 것도, 알고 보면 천불동에 서 계신 천분의 부처님 때문이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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