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 11월의 끝 날이 토요일이라서 인가, 시청 건너편 올림픽 공원 앞에는 많은 차들이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어디론가 떠나는가 보다. ()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도 버스에 올라, 2013년 추계 답사를 준비하고 있다. 마침 날씨도 며칠 간 추웠었지만, 이날은 많이 누그러져 답사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일행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소재한 백제 때의 고찰인 성주사지.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지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평지형 가람 배치인 성주사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석등, 보물 제19호인 5층석탑,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인 동삼층석탑, 보물 제20호인 중앙 3층석탑, 보물 제47호인 서삼층석탑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사실 성주사지는 1110일에 다녀 온 곳이다. 이 날은 12일로 보령시와 서천, 공주를 돌아보았고, 성주사지는 벌써 10여 차례나 돌아본 곳이다. 하지만 문화재라는 것이 어디 한 반 가보아서 끝낼 일이던가? 시간이 날 때마다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문화재이고 보면, 이번 성주사지 여행은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왔다.

 

남포읍성과 옛 동헌을 만나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 중에도 남포면 읍내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남포관아문을 만났을 때는 신이 난다. 이렇게 읍성과 함께 있는 문화재를 한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 등을 만날 수가 있고, 거기다가 충남 기념물 제10호인 읍성까지 돌아보았으니.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이다. 앞에는 중층 누각인 진서루가 서 있고, 그 뒤편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동헌 마당을 지나서 외동헌을 만나게 된다. 진서루는 외삼문으로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2층 문루인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은 삼문을 달았고, 2층은 누마루를 깐 후 사면에 난간을 세웠다.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누각에서 남포현감은 주변 경관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정면 7,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큰 대문을 달고 나머지 칸은 방으로 꾸몄다. 중앙 칸은 한단 올려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방은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이 문은 출입문 앙 옆을 살창으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포현의 업무를 보던 외동헌은 대청으로 정면 7,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앞면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렇게 외삼문인 누각과 옥산아문, 동헌 등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옛 동헌답게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전국의 아문이 똑 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남포관아를 돌아보고 난 뒤, 읍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읍성은 동헌 뒤편에 성곽이 이어진다.

 

대천 앞바다를 돌아보고, 한 횟집에 들려 푸짐하게 차려진 상으로 점심을 먹은 후 서산 부석사를 거쳐 돌아온 ()화성연구회의 추계답사. 답사를 함께 한 모든 회원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담아가기 위해 열심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만들어주었을 것 같은 좋은 사람들과의 동행. 답사란 아름다운 과거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신라 제41대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으로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당시 해안사 절터이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성종 16년인 1485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명종 원년인 1546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아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하다. 숙종 38년인 1712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금포정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그러나 헌종 13년인 1847년에 은해사 큰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시주하였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그리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 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인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자료 은해사)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금포정을 들어서다

 

은해사를 다녀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금포정은 소나무와 금강송이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다. 2km나 되는 이 길은 1714년 조선조 숙종 때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수령이 300년 정도에 10m가 넘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길이다. 2007년과 2008년도에는 금강송 1080주씩을 이곳에 식재하였다.

 

은해사에는 보물인 괘불탱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된 대웅전 등 많은 문화재들이 부속암자와 은해사에 소재하고 있다. 은해사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쌍거북바위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왜구들이 의해 훼손이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주변을 정비하던 중 목이 달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지역 주민들의 고증을 거쳐 현지에 마애삼존불과 함께 복원을 하였다. 은해사 거북바위는 무병장수와 가정의 안녕을 기도하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유생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에 소재한 천년고찰 은해사. 다녀온 지가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답사란 항상 다녀온 후 바로 기록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사지란 예전 절이 있던 곳이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많은 절터가 있다. 지금은 비록 절은 사라졌지만, 옛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이다. 그 많은 절터 중에서 가장 잊지못하는 곳이 바로 물걸리사지이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 이 절터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이 물걸리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옛 기록을 알 수 없는 물걸리사지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67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 고려시대 철불파편 4, 철쇄파편 2, 암막새 4, 수키와 조각 6, 암키와 조각 6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청자 조각 4, 토기 조각 5,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 대좌(보물 제543), 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 삼층석탑(보물 제545)이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물걸리사지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절터에서 발굴이 된 많은 유물들은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 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옛 절은 어디로 가고,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석조물들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를 찾아 가다가 보면, 26번 도로에 명덕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명덕교를 지나면서 보면, 산에 굴을 파고 지은 듯 한 전각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인법당이 있는데,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단암사라는 절이다.

 

700년 전에 세운 인법당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688번지에 해당하는 단암사.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어 주변 경관이 그럴 듯하다. 이 단암사는 고려 말에 서암이 창건을 하였다고 하니, 벌써 700년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단암사에도, 전북 지역의 모든 사찰을 중건하였다는 일옥 진묵스님이 주석했다고 한다.

 

단암사는 '다남사(多男寺)'라고 했었다는데, 언제 단암사로 고쳐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말 그대로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잘 낳았는가 보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법당 뒤, 새로 조성한 미륵전 뒤편 바위 굴 안에 미륵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미륵이라고 하지만, 그 형태는 미륵인가는 분명치가 않다.

 

미륵굴 안에 조성한 미륵입상. 7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철재 계단을 조성해 놓앗다. 예전에는 이 계단이 가파라 줄을 잡고 오르내렸다.

 

지금은 굴 앞으로 새롭게 미륵전을 조성하고 뒤편을 유리로 막아놓았다. 적멸보궁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는데, 뒤편 바위 위에 조성한 미륵은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미륵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조성했지만, 예전에는 가파른 바위계단을 줄을 잡고 올라 다닌 흔적이 보인다.

       

많은 전설이 전하는 미륵굴

 

이 단암사 뒤편 미륵전은 깊지 않은 굴처럼 조성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굴에는 전설이 전한다. 예전 이 굴에서는 절의 식구들이 먹을 만큼 쌀이 나왔다. 절에 사람이 많으면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양이 나오고, 식구가 줄면 그 숫자만큼 먹을 수 있도록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절에서 일을 하는 공양주가 욕심이, 나서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굴을 찔러댔더니 쌀이 안 나오고 피가 흘렀다는 것이다.

 

그 뒤 굴 속에서 나오던 쌀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단암사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말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었다. 왜병의 장수가 이상히 여겨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굴 안에는 서연이 가득하고 미륵불이 현신해 있었다는 것이다. 왜장과 병사들은 하루 동안 그 곳에서 정성을 드리고 나서야 말이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이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을 많이 낳는다는 '다남사'라고 불렀던 점이나, 이곳에서 쌀이 나왔나는 전설 등은 모두 이 절이 영험한 도량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한창 불사를 하고 있는 단암사. 그런데 그 불사를 보는 순간,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미륵전은 굴 앞쪽에 새롭게 조성하였다. 흡사 인법당 지붕 위에 지은 듯하다.

 

새롭게 조성하는 불사로 인해 유명해질까?

 

지난 4월 30일,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절벽 안에 있는 미륵전을 보고 단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밖에서 볼 때는 한창 불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막상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기가 막힌다.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전각은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다. 커다란 트레일러 적재함 외벽을 방수목으로 둘러 목재집인 듯 보였던 것이다.

 

미륵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주지스님인 대명스님이 나오신다. 일을 하는 목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허리에는 연장 띠를 두르고, 허름한 옷을 입고 불사에 동참을 하고 계시다. 아니, 동참 정도가 아니라 직접 목수 일을 하신다. 트레일러 밑에는 커다란 바퀴들이 그냥 달려있는 대로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안과 밖을 목재로 마감을 하고 계시다.

 

"이 건물을 전시실로도 사용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모임도 가지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어쩌다보니까. 하하. 이거 유명해질 것 같아요?"

 

목재로 조성하고 있는 전시실

가까이 가서보니 트레일러다. 바퀴도 그냥 달려있는데, 단암사의 새로운 전각으로 바뀌고 있다.

 

조성이 다 끝나면 어떻게 변해있을까?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트레일러 전각이니, 생긴 그대로 유명해질 것 같다. 큰 돈 안들이고 전시장과 방, 그리고 창고까지 해결이 되었다고 호탕하게 웃으시는 대명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란 참 별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사를 마치는 날은 필히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아마 단암사는 전설과 함께, 색다른 모습으로도 유명해지지 않을까?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대신 전각 뒤편에 사리를 모신 탑을 세운다. 우리나라에는 5대보궁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소재한 정암사이다. 정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자장율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창건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서원했다. 한 범승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튿날 한송정으로 달려간 자장율사에서 문수보살이 갈반지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사라졌다. 태백산을 헤매던 자장율사는 사람들에게 갈반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그 지명을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칡넝쿨이 우거진 곳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갈반지를 찾게 되고, 그곳에 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번번이 무너져 버렸다. 그런 후 백일기도를 드린 후 밤에 칡넝쿨 세 가닥이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끝에 세운 것이 바로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정암사의 법당 자리라고 한다. 당시에는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여 갈래사라 칭했다.

 

서해용왕이 보낸 마노석으로 세운 탑

 

보물 제410호인 정암사 수마노탑은 서해 용왕이 물 위로 보낸 마노석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정암사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세워진 7층의 모전석탑인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화강암으로 6단의 기단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쌓았는데, 표면을 정교하게 잘 정돈하여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으며, 1장의 돌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 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한 수마노탑

 

정암사 수마노탑은 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탑 앞에 놓인 배례석은, 새겨진 연꽃무늬나 안상 등이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탑신을 구성한 석재는 회록색의 수성암 질석회암으로 길이 30~40cm, 두께 5~7cm로 정교하게 쌓여져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1972년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이 옥신부터 기단부까지 사이에서 5개가 발견이 되었다. 또한 금, , 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암사에서 느낀 기운은 맑기만 한데

 

그만큼 시대가 흐르면서도 정암사 수마노탑은 진신사리탑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정암사에 있는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깊은 가을에 찾아간 정암사.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계단을 걷는다. 마음이 경건해진다. 아마도 탑의 기운이 탑 주변에 넓게 자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를 조아려 서원을 한다. 무엇이나 이곳에 와서 간절히 서원을 하며 이루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일어나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가을이 짙어가는 산에는 붉은 빛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숱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마노탑.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정암사. 아마 자장율사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은 아닐까? 자장율사가 평소에 짚고 다니던 주장자였다는 주목 한 그루가 저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회생을 했다고 하니, 정암사야 말로 세상을 다시 살아나갈 사람들에게는 좋은 곳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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