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6) - 서남암문과 용도

‘화성(華城)’,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알면 알수록 대단한 성이다. 어느 한 곳도 화성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성을 축조할 수 있었는지, 그저 혀를 내두를 판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의 성은 성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난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로 이렇게 묻는다. “성을 제대로 알기는 하는가?”라고.

중국과 수도 없이 많은 국경에서의 전쟁을 한 고구려. 그 고구려에 왜 그 수십만의 수나라나 당나라 군사들이 형편없이 패하고 돌아갔을까?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성이 그만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은 그런 각 시대의 성곽에서 좋은 점만 모아서 축조가 된 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화성의 모습이다.


산으로 오르는 적군이 다시 놀라다

화성은 4대문으로 공격을 하거나, 성벽으로 공격을 하기에는 어렵다. 어디라도 비빌 언덕이 없기 때문이다. 성 주위를 맴돌던 적은 한 곳의 빈틈을 발견하게 된다. 성벽보다 더 높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이다. 그곳으로 오르면 성 안으로 총과 활을 쏘고 불을 날릴 수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적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면 여지없이 성안에서 날아오는 총탄과 화살에 맞아죽기가 일쑤다. 그래서 일부러 팔달문에서 멀리 떨어진 쪽을 향해 팔달산의 능선을 향해 오른다. 쉴 새 없이 적들은 능선을 향해 올랐다. 나무숲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오른 능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함께 수많은 총알과 화살이 날아온다.



서남암문의 위에 놓인 포사(위)와 용도에서 바라 본 암문, 그리고 암문으로 오르는 성벽과(붉은 선) 용도가 놓인 산등성이(노랑색 선)

고개를 숙이고 능선을 향해 치닫던 적들이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어본다. 놀랍게도 그 능선을 따라 또 다른 성벽이 있다. 바로 서남암문에서 길을 따라 화양루까지 가는 '용도(甬道)'가 있었던 것이다. 용도란 말 그대로 길을 따라 양편으로 담을 쌓은 것을 말한다. 팔달산의 반을 갈라 쌓은 성 끝자락에는 이 용도가 있어, 남부 능선으로 올라오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용도와 서남암문, 그리고 서남각루

팔달문에서 성벽을 따라 남부 능선으로 오르면 그 정상부에 서남암문이 있다. 이 서남암문 위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서남포사(西南舖舍)’가 자리한다. 한 칸으로 지어진 이 포사에서는 주변 경계는 물론,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적이 공격을 하면 깃발을 이용하거나, 포를 쏘아 신호를 했다. 이 포사는 항시 장병들이 기거를 하기 때문에, 온돌로 꾸미고 사면을 판문으로 막았다.



포사 아래 문이 바로 서남암문이다. 이곳은 안과 밖으로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가퀴를 설치하였으며, 화성의 암문 중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가 된 곳이다. 암문을 빠져나가면 능선을 따라 양편으로 성벽을 쌓고 여장을 올린 용도가 나타난다. 이 용도는 능선의 끝까지 나 있으며, 그 끝에는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설치되어 있다.

준 지휘소인 각루

용도 끝에 자리한 각루는 준 지휘소이자,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서남각루가 서 있는 곳은 능선의 끝이자, 용도의 끝이 된다. 이곳에서 양편으로 돌출된 성벽은 양편 모두가 치의 역할을 하고 있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와 함께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게 축성이 되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18세기 동, 서양을 통 털어 가장 완벽한 군사시설이라고 화성을 극찬하였겠는가?



용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화양루라고 부른다. 각루의 양편 끝에도 둘출이 되어 치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서남각루는 한편은 바닥이 돌로 되어있고, 한편은 장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려 마루를 놓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군사들이 주변감시를 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올라 성안을 공격하겠다고 죽자 사자 능선으로 오른 적군들. 그들은 능선에 버티고 있는 용도로 인해, 또 한 번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저 병사들은 땅에서 솟아났느냐?"

화성은 실제로 축성을 하고 난 뒤 전쟁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화성을 시물레이션으로 전쟁 장면을 제작한다고 하면, 정말 장관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것도 화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 장용위의 군사들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할 것이다. 화성은 그만큼 수성(守城)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적이 성으로 밀려왔다. 4대문을 아무리 깨트리려고 공성무기를 총 동원했지만, 문 앞까지 다가서지도 못했다. 겨우 옹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무기를 움직일 공간이 없이, 옹성 안에 들어 온 병사들이 전멸을 당했다. 그것이 바로 화성이다. 적들은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었다. 성벽을 타고 오르기로 한 것이다.


화성의 서암문. 성벽 안에 감추어졌다.

앞뒤에서 공격하는 성안의 병사들.


긴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성벽을 오를 수가 없다. 여장에 걸친 사다리는 긴 창을 이용한 성안의 병사들에 의해 제거가 되고, 뒤에서도 화살이 날아왔다. 성벽이 돌출된 치성에서 쏘아대는 화살이다.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적은 성을 오르기를 포기하고 만다.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번에는 후미진 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성 앞으로 조금씩 지형지물을 이용해 다가들었다. 성벽에 줄을 던지고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뒤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적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한 무리의 장용위 군사들이 나타난다,


암문의 문은 계단을 내려가 성벽 아랫쪽에 나 있다. 암문 여장에서 내다 본 바깥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병사들이 어디서 나왔단 말이냐. 저 병사들은 땅에서 솟아난 병사들이란 말이냐?“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성 밖은 자신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딴 곳에서 지원군이 올만한 길도 모두 차단을 했다. 그런데 어디서 저 많은 군사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저 군사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이냐?”

화성에는 암문이 있다. 현재는 네 곳의 암문이 남아있다. 이 암문들은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적의 눈에 잘 띠질 않는다. 그곳은 전쟁이 나면 무기를 공수하거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통로이다. 거기다가 몰래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의 적의 배후를 공격하게 된다. 성으로 접근을 했던 적들은 혼비백산을 할 수 밖에.


북암문의 바깥과 안

화성에는 처음으로 축성을 하고 난 뒤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다. 현재는 4개의 암문이 남아있다. 동문에서 남문 사이에는 암문이 없다. 그리고 남문에서 서장대를 오르는 산꼭대기에는 서남암문이 있다. 서남암문의 위에는 주변을 관찰하는 ‘포루(鋪樓)’가 있으며, 앞으로는 용도(甬道)가 시작되는 곳으로 그 끝에는 화양루가 자리한다.

암문은 철판으로 문 바깥부분을 덮었다.

벽돌로 쌓은 아름다운 암문

서장대의 남쪽에는 서암문이 있다. 팔달산 남쪽 기슭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이 암문을 찾아내기가 쉽지가 않다. 암문이 연결되는 곳은 가파른 비탈로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이 암문을 통해 쏟아져 나온 병사들이 뒤를 공격하고 난 후,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고 생각을 해보자. 모골이 송연하지 않겠는가?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방화수류정 옆에도 암문이 있다. 북암문은 화성 전체구간 중에서 유일하게 좌우의 성벽을 벽돌로 쌓은 곳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3월 27일에 완성이 되었다. 이 북암문 앞에는 연지가 있다. 요즈음 연지는 한창 보수공사 중이다. 만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면, 적군의 시신으로 메워질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혼자 놀란다.



동암문

그리고 동장대 가까이 또 하나의 암문이 있다. 바로 동암문이다. 동암문은 북암문보다 이틀 빠른 정조 20년인 1796년 3월 25일에 완성이 되었다. 만일에 대비해 4대문 외에도 후미지고 적당한 곳에 마련한 암문. 이 암문이 있어 적들을 물리치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이러한 많은 구조물들이 적절하게 자리를 하고 있어,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기도 하지만, 최고의 성이란 찬사를 받는가보다.

‘치(雉)’란 꿩을 말하는 것이다. 화성에는 치라고 부르는 시설물이 있다. 성벽을 쌓다가 일정 간격을 두고 밖으로 튀어나온 시설물들이다. 이 치는 꿩이 자신의 몸을 숨기고 주변을 돌아보 듯, 그렇게 자신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밖으로 돌출된 이 치는 여장을 두르고 총안을 내어,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원래 화성에는 11개의 치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화성에서 볼 수 있는 치는 열 개다. 화성 동문에서 시작해 좌측으로 성을 한 바퀴 돌면, 동일치서부터 만나기 시작한다.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남치가 있고, 산 위로 오르는 용도라고 불리는 길에 용도동치와 용도서치가 있다. 그리고 서장대를 지나 동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서삼치, 서이치, 서일치와 북동치가 있다.


다양한 기능을 갖는 화성의 치.

성 밖으로 돌출된 구조물을 단순히 치만을 생각하면 안된다. 치성을 쌓은 후에 그 위에 포루와 적대 등을 설치했기 때문에, 기실 화성의 치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구조물은 그 배나 많기 때문이다. 이 치는 일정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축조한 화성이기에, 그 지형에 맞는 곳에 치가 있다.

치의 총안을 통해서 성벽을 보면, 성벽 전체가 보인다. 치와 치, 혹은 치와 포루 사이에서 성벽을 오르기란 불가능하다. 성벽을 타고 오르려고 한다면, 앞뒤에서 날아오는 화살 등을 막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공성무기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성,그것이 바로 화성이다.





위로부터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와 맨 아래 남치

치롤 돌아보면 화성을 알게 된다.

열곳의 치성은 그 크기가 같은 것이 아니다. 지형에 따라 크기가 다르고, 총안의 각도가 다르다. 한 마디로 이 치성 안에 숨어 성벽을 오르는 적을 공격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시설물이다. 치성 안에 들어가 총안으로 밖을 본다. 건너편 포루가 보인다. 저 포루와 이곳 치성 사이에는 성벽이 한 곳도 그늘진 곳이 없다. 그만큼 완벽하게 쌓은 성이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늘 하는 생각이다. 만일 이 성에서 정말로 전쟁을 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누구도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총안을 통해 적의 뒤를 공격하고, 치성으로 오르려고 하면, 치의 바닥에 나 있는 구멍에 끓는 기름을 붓거나 끓는 물을 부어 적을 덤비지 못하게 만든다.



위로부터 용도 동치, 용도 서치와 용도 좌우에 난 치

누구도 성벽을 탈 수 없다.

이렇게 완벽한 성은 없다. 이런 치의 용도로 인해 화성이 더욱 더 난공불락의 성이 되는 것이다. 그저 성벽을 쌓다가 돌출을 한 것이 아니고, 성의 방어하고 적을 섬멸하게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이 치성을 한 곳 한 곳 돌아보면 화성의 동선이 그대로 들어난다. 꼭 있어야 할 곳에 치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서심치, 서이치, 서일치, 북동치

전쟁은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치가 있어 적어도 화성에서 전투를 한다고 하면, 성안의 군사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적을 공격할 수가 있다. 그래서 꿩이라고 하는 ‘치성(雉城)’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인가 보다. 적에게 나를 들어 내놓지 않고, 적을 살피는 꿩과 같이.

열 곳의 치와 포루와 적대. 그 모든 것은 꼭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다. 일정한 거리가 아닌,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다. 화성이 제일의 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작은 구조물인 치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벽에서 돌출된 치의 모습과, 치 안에서 총안을 통해 본 성벽(가운데)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의 등뒤를 공격할 수 있다. 성벽이나 치에 나 있는 아래로 비스듬히 나 있는 구멍. 이곳으로 끓는 기름이나 끓는 물등을 내려보낼 수 있다.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은 ‘팔달문’이요, 북문은 ‘장안문’이다. ‘팔달(八達)’이란 그야말로 팔방 어느 곳이나 다 통한다는 뜻이요,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 앞은 ‘성시(成市)’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으로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곳의 지형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이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 전국의 명당이라는 곳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거북산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화성을 축조할 즈음에 생겨난 것이라고 전한다. 아마도 남문 밖에 성시(시장)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노역자들이 장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수원 상권의 중심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들어갈 곳이 없는 성문, 아름다운 옹성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헌데 남문과 북문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2011년 8월 28일 현재,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보수 공사중이다. 팔달문의 자료는 2004년 8월 24일에 답사한 자료이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현재 보수 공사 중인 팔달문의 옛 모습을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으려는지, 하루 빨리 성벽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옹성에 홍예문을 낸 팔달문과 장안문

남문과 북문의 윗부분의 중앙으로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를 내었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양 대문의 형태는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손꼽힌다.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으로 가는 길목인 장안문, 남으로 가는 길목인 팔달문. 그 두 문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장안문인 북문은 이곳을 기반으로 북으로 한 없이 뻗어나가는, 문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뜻이 숨어있다는 생각이다. 팔달문 또한 이 땅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가겠다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아마도 대로인 이 두 곳의 문에서 이산 정조는 적을 섬멸하고, 더 큰 조선을 건설한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장안문의 용도에 서서 장안문의 현판을 바라다보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참 백성을 위할 줄 모르는 이 시대에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산 정조를 왜 우리가 ‘정조대왕’이라고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으로,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한양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둘레의 길이 5,744m인 화성은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이 되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현재는 41개 시설물이 남아 있다.



창룡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손이 되었던 것을 복구하였다. 동쪽으로 난 문인 창룡문은 푸를 '창'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옹성 밖의 성벽이 돌출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성문을 지키는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철옹성'이란 말이 생각난다.


동문인 창룡문을 들어서다

수원화성은 규장각의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을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 축성 시에는 거중기와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이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방을 ‘청(淸)’이라고 하는데, 그 청을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창룡문은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다. 창룡문은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동문의 옹성은 밖은 벽돌로 쌓고, 안은 화강암으로 이용하여 축성을 했다. 옹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터진 곳 밖에 없다. 성문을 깨트리는 공성무기를 안으로 옮기기도 힘들지만, 성문 앞으로 다가서면 전멸을 하게 된다. 성문은 모두 여러조각의 철퍈으로 덮어 놓았다


창룡문을 들어서면 우선 홍예의 크기에도 놀랍지만, 창룡문서부터 팔달문까지 이어지는 제1저지선이 있다는 것에 더욱 경이롭다. 용머리길이라고 하는 이 외곽의 저지선은 그 자체가 토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루로 올라본다. 한편을 터놓고 둥글게 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 옹성위로도 병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어, 적이 성문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비하였다. 성벽 여기저기에는 뜨거운 기름등을 부어 성벽을 타고 흐르게 만들었다. 성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루에 올라가면 옹성위로 난 길을 따라 이동을 할 수가 있다. 옹성 위 여장에는 총혈과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로는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도 있다. 상상만 해도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이 어떻게 될지가 그려진다.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문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서문인 화서문의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동문인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든 것이 다르다. 화서문을 둘러쌓고 있는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동일하며, 높이는 11척이다.

화서문은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서문은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년 1월 8일에 완성을 하였다, 화서문은 서해안과 남양만 방면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서장대에서 성벽을 떠라 내려오다가 만나게 되는 화서문. 화서문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보물 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서문의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단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이 벽돌로 쌓은데 비해, 화서문의 옹성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쌓아 올렸다. 문루는 양편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안에는 마루를 깔았다.

성문, 그 위에 올라서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파손된 부분을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 그 위 문루에 올라서 난 무엇을 보았을까?



서문인 화서문은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꺾어 놓아 또 다른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문은 각기 특색있게 꾸며졌다. 성문의 두께도 대단하지만, 겉을 보누 철판으로 마감을 하였다.


화성의 성문들은 자연이다. 사방으로 난 길을 따라 난 성문들은, 그 형태들이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네 곳의 문이 다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인양 하다. 주변의 지형에 맞게 꾸며진 사대문. 그것 하나만으로도 화성에 쏟아 부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성곽인지 알만하다.



옹성 위로 올라가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성무기조차 사용할 수 없는 화성의 문. 당시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생각해 낸 것일까?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면서 참 잘 쌓은 성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엄청난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눈물을 이곳에 얼마나 흘린 것일까? 땀과 눈물, 창룡문의 문루 위에서 저 멀리 높게 보이는 서장대를 바라보니, 군사들의 함성과 함께 수많은 민초들의 땀으로 얼룩진 모습이 있다. 끝내 이루진 못한 이산 정조의 눈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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