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은 입장료 받고 숲만 보여줍디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사적 제206호인 ‘화성 융릉과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소재한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역시 사후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다. 이 융릉은 합장 능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후에 의황제로 추존한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한 능이다.
융릉은 조선 후기의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융릉의 병풍석 / 사진자료 문화재청
여러 번 명칭이 바뀐 융릉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년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년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년 11월 12일,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길(위)과 가을빛이 물든 곤신지
뛰어난 융릉의 석물과 곤신지
지난 11월 10일(토), 융건릉을 찾아 나섰다. 융건릉을 다 돌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융릉의 석물을 보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기억해 내고 싶어서였다. 입구에서부터 융릉으로 들어가는 숲은 가을이 내려 앉아있었다. 발밑에서는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정겹다. 누군가 가을은 발밑에서 온다고 했던가. 숲을 벗어나면 곤신지가 나타난다.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이 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을 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을 했다고 한다. 원형의 곤신지에도 가을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융릉으로 향한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 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 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융릉 전경
융릉 앞에 조성한 석인도 사실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낸다. 효성이 깊은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당대의 최고 석공들을 데려다가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장부터 뒤틀리기 시작한 심사
11월 10일의 답사는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동행을 한 답사였다. 그런데 곤신지를 지나 융릉의 홍살문 앞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사가 영 불편하다. 홍살문 옆에는 ‘판위’라고 하는 조형물이 있다. 네모나게 조성을 한 판위는 임금이 능에 제사를 올리려고 찾아왔을 때, 능을 바라보고 절을 하던 곳이다.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는 사람
판위 앞에는 한 무리의 학생인 듯한 사람들이 서 있다. 문화재를 해설하는 분인지 학생을 인솔하고 온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지만, 판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남들에게 문화재를 안내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할 수 있을까? 이 분 제대로 문화재 해설을 할 수 있는 소양은 갖추었는지 궁금하다.
융릉의 정자각과 비각
석물 보러 갔다가 숲만 보고 왔지요.
정자각을 돌아본 후 비각으로 향했다. 비문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 능으로 올라 석물을 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능으로 오르는 것을 금지시킨다는 푯말이 붙어있다. 물론 출입통제를 하는 목책 울타리도 쳐놓았다. 어이가 없다. 조선 후기 가장 뛰어나게 조성을 했다는 융릉의 병풍석 등을 보러왔는데, 먼발치에서만 보아야 하다니.
그것도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뒤틀린 심사가 급기야 울화로 변한다. 물론 문화재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시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능 근처에도 들어가 볼 수가 없게 만들다니. 여주 세종대왕 능에도 관람을 할 수 있는 관람통로를 내놓았다. 그렇다고 문화재가 훼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 융릉과 블로거들에게 설명을 하는 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 앞으로 보이는 통제 목책
참으로 어이가 없다. 보호란 무조건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만들어야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결국 융릉을 먼발치에서, 능위로 보이는 것만 보고 온 셈이다. 융릉을 보러갔다가 가을이 깊은 숲만 보고 왔다. 바람에 날려 땅을 구르는 낙엽처럼, 씁쓸한 마음만을 안고.
산 낙지를 통째로 냄비 속에 ‘풍덩’
11월 10일(토)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함께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팸투어를 다녀왔다. 버스에 올라 처음으로 향한 곳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206호인 화성의 ’융건릉‘. 그곳을 돌아보고 나 뒤 찾아간 곳이 그리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단다. 점심을 먹으려고 예약을 해 놓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이름 한 번 거창하다. <쭈구미 색시, 낙지 서방>이란다. 우리가 시킨 것은 냄비 안에 커다란 낙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는 ‘낙곱전골’. 대자는 40,000원, 중자는 30,000원을 받는다.
블로거들은 못 말려
어딜가나 블로거들은 표시가 난다고 한다. 식당을 들어가면서 카메라를 챙기는 사람은 십중팔구 블로거들이라는 것이다. 가스레인지 위에 낙곱전골을 담은 냄비가 올려지자, 너도 나도 카메라를 꺼내들고 찍기 시작한다. 미디어 다음에서 주관한 수원블로거들의 팸투어이다. 이 집 화성에 있지만 참 열심히도 찍어댄다.
화성시 안녕동 154-13에 소재한 이 집은, 그동안 블로거들의 포스팅에서 자주 보아왔던 집이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살아있는 낙지들이 얼마나 싱싱한지 덮어 놓은 뚜껑 밖으로 발을 내민다. 참 이렇게 싱싱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반주 한 잔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맛이야, 입맛 따라 다른 법이니.
하긴 나는 맛집 블로거가 아니다. 그저 답사를 하거나 취재를 나가서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가끔 맛집을 소개하고는 한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 내아 맛있다고 해서 남들도 맛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골이 끓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참 오랜 시간 낙지가 버티고 있다. 잠잠해진 낙지를 잘라 한 입 넣어본다. 쫄깃한 것이 감칠맛이 난다. 전골을 한 번 뒤집으니 바닥에 곱창이 깔려있다. 곱창에서 나오는 맛 또한 괜찮은 편이다. 곱창과 낙지를 같이 먹어본다. 이렇게 먹어야 제맛이 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반주가 없다는 것
음식을 먹는다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낙지의 머리를 잘라본다. 흔히 ‘밥’이라고 부르는 속이 꽉 차있다. 이것이 남자들에게는 그만이란다. 무엇에 그만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맛있으라고 먹는 음식이니 꿋꿋하게 먹을 뿐이다. 낙곱전골 한 냄비를 4명이서 다 비우는 동안 내내 아쉬운 것은 반주가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 반주가 빠져서야 어디 음식 맛을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 낙지에 곱창까지 곁들였다면, 막걸리 한 탁배기를 주욱 들이켜야 하는데 말이다. 애주가는 아니라고 해도, 그냥 밥만 비비기는 무엇인가 빠진 듯하다. 이 집은 본점이고 지점이 수원 파장동에도 있다고 한다. 다음번에는 파장동으로 가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먹어보아야겠다. 그 맛 또한 일품일 것이란 생각이다.
‘수원 고읍성’, 이래서 어떻게 城인 줄 알아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수원 화성 장안문에 성혈이 있다고?
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곽의 문 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런 장안문은 참으로 견고한 성문이다.
장안문은 4대문 가운데 가장 아픔이 많은 문이다. 6,25 한국전쟁 때 장안문은 반파가 되었다. 그리고 성문에는 무수한 파편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폭격을 받았는데도 반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장안문이 견고하다는 뜻도 된다. 정조 당시의 화력으로는 아마 적들이 장안문 인근에도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한마디가 당시의 장안문의 위용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현재의 장안문(위)와 한국전쟁 때 반파된 장안문(아래) NBC 종군기자인 존 리치가 촬영한 사진이다.
옛 사람들은 왜 성혈을 팠을까?
옛 선사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돌을 갈아내어 성혈을 팠다. 성혈은 주로 커다란 바위에 파기도 했지만, 고인돌이나 선돌 등에 많이 나타난다. 아직 성혈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돌로 돌을 갈아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성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혈을 몇 개씩 파여져 있기도 하다.
임실군 지사면 영천마을에는 마을 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돌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았는데, 이것은 선사시대의 선돌이라고 한다. 이 선돌에는 한편에 나란히 12개의 성혈이 남아있다. 수원의 여기산 화성 성돌을 뜨던 곳에도, 큰 바위에 성혈로 보이는 구멍이 남아있다. 그리고 보면 이 성혈을 판다는 것은, 선사시대 이후로 계속되었던 것 같다.
임실군 지사면 영천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선돌의 성혈(위) 안양 삼막사 남녀근석 중 남근석에 있는 성혈
여기산 커다란 바위위에 남아있는 성혈의 흔적. 그렇다면 이 바위돌은 혹 지석묘는 아니었을까? 이곳이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였다는 점이, 더욱 이 바위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수원인근의 오산 등지에서도 이 개석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커다란 바위가 지석묘일 가능성을 유추해본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수원 화성을 수없이 다녀 본 사람들도 장안문이 신앙의 대상물이었다고 하면, 아마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언젠가 어느 분에게 장안문은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하던 장소였다고 하였더니, 무슨 정신 빠진 소리냐면서 핀잔을 들은 기억이 있다. 글쎄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하나 더 안다고 하여서, 그리고 자신이 본 일이 없다고 하여서 정신 빠진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화성의 성돌을 뜬 여기산 바위에 보이는 성혈
장안문의 안쪽에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성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10여 개가 넘는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는 그 장안문처럼 웅장하고 단단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서방이나 아들이 꼭 장원급제하기를 염원해서 성혈을 파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문을 받치고 있는 든든한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파면서 얼마나 속으로 많이 기원을 했을 것인가?
나는 장안문에 올라서면 항상 머리를 잠시 숙이고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그것은 장안문에 성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안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믿음이 가는 성문이 아니던가? 정조 역시 화성 행궁으로 행차를 하면, 이 장안문을 통해서 출입을 했다.
그러기에 아마도 혹 누군가는 정조의 안녕과 강한군주, 그리고 강한국가를 위해서 성혈을 팠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성혈이 장안문에 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문화재를 돌아볼 때는, 돌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라고 당부를 한다.
8도의 파워소셜러들이 극찬한 수원 팸투어
11월 3일과 4일 2일 동안 전국 8도의 파워소셜러들이 수원을 찾았다. 이 행사는 '미디어 다음'이 주관하여, 수원의 아름다움과 볼거리를 알리고자 하는 행사였다. 11월 3일(토) 오후 1시 수원시청에 모인 8도에서 모인 파워소셜러들은, 제주에서 온 아이엠피터(임병도), 파르르(양경만) 등과 강원도 양양의 한사(정덕수), 부산의 거다란(김혁)과 커피믹스(김성자), 전남 여수의 임현철(임현철), 서울의 보라미랑(장유근)과 경기 용인의 캔디(최명희) 등이다.
그리고 수원에서는 온누리(하주성)와 수원시티넷 운영자인 김홍범 등이다. 10명은 시청을 출발하여 화성 동장대 앞 활터로 이동하여 활쏘기체험으로 1박 2일의 수원 팸투어가 시작이 되었다.
11월 3일과 4일 수원 1박 2일 파워소셜러 팸투어에서 활쏘기 체험을 하는 블로거 보라미랑님(위)과 동북공심돈 위에서 내려다 본 동장대(연무대)
시작부터 즐거워하는 파워소셜러들
활쏘기 체험을 마친 소셜러들은 <동장대>와 <동북공심돈>을 돌아본 후 화성이 이렇게 아름답고 과학적으로 꾸며진지 몰랐다면서, 화성의 이곳저곳을 설명하는 e수원뉴스의 김우영 주간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촬영을 했다. 화성의 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성신사>까지 화성열차를 이용해 이동을 하면서도 연신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성신사에 들려 참례를 한 후 걸어서 <서장대>에 오른 일행은, 서장대에서 화성행궁과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과거 화성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도 한다. 성 안으로 걸어서 내려오면서 화성의 여러 가지 기능을 살펴보던 일행은, 화서문을 나서 성 밖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장안문까지 걸어 온 파워소셜러들은 차로 이동을 하여 창룡문(동문) 옆으로 이동을 했다.
성신사까지 파워소셜러들을 태우고 간 화성열차(위)와 서장대(아래 좌)와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행궁(아래 우) 화성을 관람하다가 만난 억새(아래)
지동 벽화길에서는 다양한 질문과 의견을 제기하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일대에 조성한 '벽화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벽화길이 조성된 팔달구의 윤건모 구청장이 마중 나와 파워소셜러 들을 반갑게 맞아주기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소셜러들답게 지동 벽화길을 들어서면서 부터는, 딴 곳의 벽화들과 대비를 하면서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도 보였다. 벽화길의 안내는 팔달구 지동주민센터의 기노현총괄팀장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으며, 소셜러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밝히기도.
지동 벽화길을 돌아보면서 한 집의 벽에 설치한 담장이 내려져 평상이 되자, 파워소셜러들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이런 생각을 하여 벽화길과 접목을 하였는지, 기팀장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한 소셜러는 ‘지동 벽화길은 아기자기한 것이 재미가 있다. 저런 발상을 어떻게 한 것인지 정말 놀랍다’고도.
벽화골목 입구에서 파워소셜러들을 맞이하는 윤건모 수원시 팔달구 구청장(우에서 두 번째)
지난 해에 조성한 벽화와 벽화 앞에 마련한 의자에서 쉬는 마을사람들
제2구간에 들어서 골목벽화를 돌아보던, 일행은 벽화길 조성의 총 책임자인 유순혜 작가에게 안내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한 소셜러는 더 아름다운 벽화길 조성을 위해 다양한 벽화그림과 조금은 색채가 화려한 것을 쓰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벽화 골목을 나선 일행은 지동 13통장 댁의 옥상에 올라가 팔달산으로 넘어가는 일몰을 구경하였다. 이곳은 그 유명한 '옥상음악회'를 열었던 곳인데, 소셜러들은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성을 보면서 지동은 앞으로 유명한 곳이 될 곳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동 제일교회(담임목사 이규왕) 13층에 있는 '노을빛 전망대'에 오르기 전, 파워소셜러들을 위해 제일교회에서 마련한 다과회 자리에 들려, 지동 제일교회가 왜 종탑을 전망대로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백종각 장로에게 설명을 들었다. 이 자리에는 '수원 마을만들기추진단'의 민완식 단장도 참석해 마을만들기 사업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지동 벽화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담장 평상. 평소에는 접어 올리면 담장이 되고, 내리면 평상이 되기도. 아래 좌측은 파워소셜러들에게 벽화길 설명을 하는 작가(위) 아래는 지동제일교회에서 마련한 다과를 즐기는 동안 제일교회 백종각 장로가 노을빛 전망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염태영 수원시장도 파워소셜러들과 함께 해
팔도의 파워소셜러들이 수원을 1박 2일로 팸투어를 한다고 하자, 염태영 수원시장은 딴 곳의 일정을 접고 제일교회로 달려왔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소셜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격려를 하고, 함께 제일교회 13층 노을빛 전망대에 올라가 설명까지 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한 소셜러가 화성의 조명이 어둡다고 하자, 배석을 한 시관계자에게 ‘팔달구 관계자를 불러 이곳에서 화성의 야경을 바라보게 하고, 아름다운 화성의 선이 나타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라’고 지시하기도.
8도에서 모인 파워소셜러들에게 환영인사를 하는 염태영 수원시장과(위) 파워소셜러들과 함께 노을빛 전망대로 오르기전 설명을 듣는 염태영 수원시장
7시간동안 쉬지 않고 수원을 돌아본 소셜러들은 저녁자리에 함께 참석을 한 염태영 수원시장께 다양한 질문과 함께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지금은 SNS시대이다. 파워소셜러들은 일인 미디어 시대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니, 아무쪼록 우리 수원을 즐겁게 돌아보시고 난 뒤, 좋은 기사들을 많이 써 달라” 고 주문을 하기도. 이어서
“수원은 정조임금의 계획된 도시이다. 우리 수원은 화성뿐이 아니라, 돌아 볼 곳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수원천을 걸어보면 생태하천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는 돌과 흙, 그리고 수초로 자연친화적인 하천으로 수원천을 조성하였다”고 하면서 수원천 복개를 적극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막았으며, 복개구간을 원상으로 복원한 점과 수원의 이모저모를 하나하나 파워소셜러들에게 설명을 해주기도.
2일 째 화성행궁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파워소셜러들과(위) 행궁 앞에서 펼쳐진 무예 24기 시연
2일 째 행궁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보다.
첫날 일정을 마친 파워소셜러들은 수원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수원호스텔인 사랑채에 묵었다. 2일 째인 4일(일)에는 오전 9시부터 <화성 행궁>으로 옮겨 이상숙 해설사의 안내로 행궁을 돌아본 후, 신풍루 앞에서 펼쳐지는 24기 무예를 관람하기도. 이어 <화성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파워소셜러 일행은, 1층 특별전시관에 전시중인 ‘한, 중, 일 대목장의 세계’전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수원천을 걸으며 수원천의 생태계를 살핀 파워소셜러들은, 재래시장인 지동순대골목으로 이동을 해 철판볶음과 순대국밥으로 점심을 즐겼다. 이렇게 돌아본 1박 2일의 수원에서 펼쳐진 파워소셜러 팸투어는 많은 이야기꺼리를 남겼다. 한 소셜러는 감동을 했다면서, 이렇게 전한다.
“수원은 1박 2일로도 부족한 곳이다. 화성 하나만 갖고도 며칠은 걸려야 할 듯하다. 거기다가 벽화골목과 노을빛 전망대, 재래시장 등 정말 즐겁게 즐기고, 맛있게 먹고,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는 곳이다. 이번 팸투어에서 수원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정말 좋은 글을 써, 많은 사람들이 수원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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