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은 거대한 축조물이다. 하지만 화성은 자연과 닮았다. 사람들이 화성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화성이 자연과 동화되었다는 점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느 한 곳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거대하면서도 자연과 닮아있는 화성은, 4월이 되면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화성 주변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화성을 돌다가 보면, 어찌 이리도 자연과 어울리게 축성을 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411() 화성 창룡문(동문)을 들어서 남수문까지, 안과 밖으로 화성을 돌아보았다. 아직은 만개가 되지 않은 꽃들이지만, 그래도 화성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화성의 일부분을 돌아본다. 이 봄에 남은 구간을 4번으로 나누어 돌아 볼 생각이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화성은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되었다. 28개월 만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동원된 모든 인부들에게 적정한 노임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아보는 많은 사람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된 화성

 

화성의 축성시에는 많은 기물이 동우너되었다. 거중기와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해 사용하였고, 이런 장비를 이용해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은 축성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그 뒤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의 성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하였다. 성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못한 시설물은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등이다.

 

공사실명제로 축성을 한 화성은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화성을 그냥 돌아보았다니

 

요즈음 들어 날씨가 풀리면서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와 성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 관광객에게 물어보았다, ‘화성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돌아보았노라고.

 

그래서 화성을 좀 더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화성에서 이것들은 꼭 찾아보라고. 1. 공사실명제판 2. 성벽 위에 거대한 연못 3. 장안문의 성혈 4. 성벽에 남긴 야질흔적 5. 성을 지탱하는 적심돌 등이다.

 

화성은 철저하게 실명제에 의해서 축성이 되었다. 공사구간마다 책임자들이 그들의 주도아래 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성벽에 그곳을 축성한 자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이 축성실명제의 표시는 화서문과 창룡문 등의 성문의 바깥쪽 벽에 새겨져 있다.

 

장안문의 옹성 위에 마련한 소방시설인 다섯개의 구멍인 오성지 

 

'화성성역의궤'‘<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낸다. 오성지를 설치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14, 너비는 5,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안문의 북옹성에 설치한 오성지를 설명한 글인데, 팔달문의 남옹성에도 오성지를 설치하였고 그 크기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성지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는데, 옹성문이 없는 창룡문과 화서문에는 오성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규모지만 중요한 암문 중에서 동암문과 북암문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성지 뒤편 위에 커다란 저수통을 만들고, 그곳에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옹성문 위에 설치한 것이 오성지이다. 적의 화공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한 방법이다.

 

장안문의 기단석에는 많은 성혈이 파여져 있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다. 이 장안문은 사실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장안문이라는 상징성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정조대왕이 한양에서 화성행궁으로 오갈 때 이 장안문을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안문의 안쪽 왼편 기단석에 보면 성혈(性穴) 이 보인다. 대개 성혈이란 아주 오래 전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신앙이라고 하지만, 화성은 200년 전에 축성되고 난 후 이 성혈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양에 과거라도 보러 가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다 해 성혈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성돌을 쪼개내기 위해 파 놓은 야질의 흔적들

 

화성을 밖으로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돌에 야질의 흔적이 보인다. 야질이란 성을 쌓을 돌을 쪼개낼 때, 커다란 바위의 계획선 위에 띄엄띄엄 원뿔형의 구멍을 정으로 파낸다. 그 다음 바짝 마른 밤나무나 소나무 따위를 그 구멍에 맞게 깎아서 박아 넣은 후에 물을 뿌린다.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말로 야질이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써 오던 기술이다. 이 야질의 흔적이 성벽 곳곳에 남아있다.

 

가운데 큰 돌이 성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돌인 적심돌이다

 

화성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기울어져 있다. 2~3% 정도 안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 그 성이 단단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성벽의 중간중간에 적심돌을 하나씩 끼워놓는다. 적심돌은 크고 깊게 박혀있는 돌로 그 길이가 5m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성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돌이다. 이 적심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있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걷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다. 앞으로 화성을 걷는 일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진정한 화성을 멋스러움에 취해보기를 바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 요즈음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몸살을 앓고 있다. 바로 KBS-2TV의 리얼 버라이어티 ‘12-등잔 밑이 어둡다편이 방송이 되고 난 후에 일이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수원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그들은 화성을 돌아보며, 12일의 추억에 젖는다.

 

이들이 화성을 돌아보면서 가장 즐겨 찾는 곳은, 바로 12일의 멤버들이 찾았던 곳이다. 그러나 정작 수원 화성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무리한 코스이다. 10년이라는 세월동안 틈만 나면 찾았던 화성. 안과 밖으로 돌아본 화성은, 방법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제대로 즐기는 법이 따로 있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해 수원 화성을 백배로 즐기는 법을 소개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화성을 즐길 수가 있을까?

 

사실 수원 화성을 한 번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자녀들과 함께 찾아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수원 화성을 100배로 즐기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우선 화성을 대번에 바람 지나 듯 획 지나간다면, 그것은 화성에 대해서 무지라고 생각한다.

 

화성은 그냥 일반적인 성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것을 보면, 기록과 정조대왕의 애민(愛民), 과학적인 방법, 자연친화적인 조형물 등, 우리나라의 축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거대한 자연친화적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화성을 곳곳을 곱씹으면서 100배로 즐기며 돌아본다는 것은, 어쩌면 내 가족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100배로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0배로 즐기면서 화성을 둘러보자

 

(1코스)

연무대에서 국궁체험 후 출발(화성열차 탑승) - 성신사 하차 - 오솔길로 서장대 오름 - 성안 길로 장안문까지 이동(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는 화성열차를 이용시 성밖의 경치 관람함) - 장안문에서 성 밖의 길로 방화수류정 옆 북암문까지 이동 - 북암문을 이용 성 안으로 들어와 수원천을 따라 걸음 -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재래시장 탐방 - 지동벽화길 구경(소요시간 3시간 30. 천천히 아이들과 함께 거닐면 4시간 소요)

 

() 1코스는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고 있는 코스로, 국궁체험과 화성열차는 주말과 휴일에 관람객이 한꺼번에 몰릴 시 체험이 어려울 수도 있음.

 

 

 

(2코스)

장안문 출발 - 성안으로 화서문까지 이동 - 보물인 화서문을 둘러본 후 화령전 앞을 지나 행궁으로 이동 -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관람(무예 24기 시범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이루어지기 때문에 1시간 전에 장안문에서 출발해야 함) - 행궁 구경과 체험하기 - 공방길 구경 - 팔달문을 거쳐 재래시장 구경 - 남수문에서 성안으로 들어가 창룡문까지 이동 - 연무대 국궁체험(소요시간 3시간)

 

() 2코스는 화서문에서 행궁으로 이동할 때 만나게 되는 행궁동 일원에서 9월 한 달 동안 세계 최초로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린다. 이때 자녀들과 함께하기를 권한다. 생태가 살아있는 마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마을을 돌아본다면 관람시간은 1시간 정도가 추가로 필요하다.

 

 

 

(3코스)

팔달산 남쪽 중앙도서관 출발 - 오솔길을 걸어 산으로 오르면서 지석묘군과 부석소 관람 - 용도 끝의 외곽인 화양루 상 밖에서 서편으로 난 길을 이용해 서삼치까지 이동(이 길은 소나무 숲이 정말 좋다) - 관광안내소에서 성안으로 이동 - 우측으로 걸어 서남암문으로 들어가 용도 걷기 - 서남암문으로 뒤돌아 나와 팔달문 쪽으로 이동하기 - 팔달문 관광안내소에서 공방길을 따라 행궁으로 이동 - 무예24기 관람과 행궁 둘러보기 - 화성박물관 관람 - 수원천 - 재래시장 구경(소요시간 3시간)

 

() 3코스 역시 무예 24기를 관람하는 시간이 있어 시범시간인 오전 11와 오후 3시 공연 1시간 30분 전에 중앙도서관을 출발해야 함. 재래시장에서 먹거리를 즐긴 후 지동 벽화길 관람을 하면 더 바람직하다.

 

 

사실 화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일괄적이지 않다. 그것은 화성이라는 친자연적인 거대한 조형물이 계절에 따라 그 멋스러움을 달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코스로 즐긴다면 남들과는 다른 화성을 만날 수가 있다. 화성과 행궁, 박믈관과 재래시장, 벽화길과 노을빛 전망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딴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재미를 주는 곳이 수원 화성이기 때문이다.

2004년도에 수원에서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화성을 돌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마도 화성을 안과 밖으로 돌아본 것이 20여 회는 되는가 보다. 그것도 복중에, 장마철에, 단풍이 들었을 때, 흰 눈이 쌓여있어 몹시도 미끄러울 때. 같은 시기에 돌아 본 적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심지어는 밤에도 화성을 돌아보았으니.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화성을 왜 그렇게 돌아보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화성. 그런데 몇 번인가 계속해서 화성을 돌아보았더니, 아주 조금씩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화성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화성이 정조대왕의 효심과 막강한 군주의 위용이 서린 곳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단지 화성이 그것뿐이었을까? 적어도 화성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거리들이 널려있다. 우선은 자연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과 정조대왕의 위민도 있다. 또한 숱한 석공들의 땀과 희열도 있다.

 

그 화성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저 운동 삼아 화성주변을 돌아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기 보다는, 그래도 그 화성과 말 한마디 쯤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지난해인가, 효원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주송이란 학생이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접하는 순간 충격이었다.

 

 

나는 2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느낀 것을,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하지만 주송이는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화성을 걸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주송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얻은 것일까?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화성에 대한 글을 연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화성을 걸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성을 돌면서 한 가지 깨우친 것이 있다면,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점이다. 문화재는 눈으로 보아서는 그 안에서 무엇도 발견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문화재를 바라볼 때,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달사지에서 또 한 번 좌절을 맛보다

 

화성 못지않게 많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지이다. 고달사지에는 국보인 승탑을 비롯해, 보물이 3점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비는 몸돌인 비는 무너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318일 여주에 동행한 지인들과 함께, 아침에 고달사지를 찾았다. 넓은 고달사지에는 여기저기 석조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혜목산 자락 쪽으로 탑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 한편도 보지 않았는데, 일행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내려오고 있다. 찬찬히 원종대사 탑비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수 뒤편으로 돌아가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띤다. 움푹 파인 것을 그동안 무심히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틀림없이 용의 발톱자국이 그 안에 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간 듯한 자국. 네 개의 발톱자국이 선명하다. 왜 이렇게 이수에 할퀴고 간 흔적을 만든 것일까?

 

그동안 10여 차례나 이 탑비를 보았으면서도, 한 번도 이 움푹 파인 곳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다시 탑을 꼼꼼히 따져본다. 이번에는 이수 앞쪽에 쓰인 명문아래에 도깨비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양편으로는 힘을 주어 금방이라도 비를 떨치고 일어날 것만 같은 발이 표현되어 있다.

 

 

그동안 무엇을 본 것일까? 날마다 찾아와 들여다보았으면서도 아직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다니. 순간 부끄럽다. ‘문화재를 마음으로 보라고 그렇게 떠들어댔지만, 정작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또 한 번의 죄스러움.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얼른 자리를 비켜 승탑이 있는 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 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문화재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화성은 아름답다. 그저 자연과 순응을 하면서 자연인양 쌓았기 때문이다. 그런 화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냐고 누가 질문을 한다. 난 당당하게 요즈음이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그냥 느슨한 마음으로 뒷짐 지고 걷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물론 꽃이 흐드러지게 피거나, 단풍이 물들었을 때도 좋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움은 화성이 돋보일 때가 아닐까? 3월 중순 경부터 4월 중순 까지 화성을 걷다가 보면,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흡사 성 돌을 위해 있는 듯하다. 그저 차가운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온기 가득한 따듯함이 배어있다. 푸른 소나무 가지들이 성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그러하고, 성 돌에 비친 햇살도 그러하다.

 

 

화성의 압권은 역시 용도

 

물론, 화성 어디를 걷고 있던지 그 바람이 그 바람이다. 그리고 햇살 역시 동서남북 다르지가 않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역시 용도일원이다. 용도 끝에 서 있는 화양루 밖에서 길을 잡아 서삼치를 향해 걷는다. 숲에서 이상하리만치 은은한 향내가 난다. 그리고 서삼치를 돌아 흙길을 그저 터벅거리면서 안으로 걷다가 보면 서남암문이 반긴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에서 밖의 정황을 살피고, 이렇게 나른해지는 계절이 돌아오면 포사장 몰래 슬며시 고개를 떨구고 무거워지는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리고 용도 저편에서 자박거리고 걷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입가에 흘린 침 얼른 닦아내고 겨우겨우 눈을 치켜뜨지는 않았을까?

 

 

용도를 걷다가 보면 또 한 번 이 계절에 자지러지게 된다. 훌쩍 커버린 소나무들이 성 안을 기웃거리며, 봄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을 힐끔거리기 때문이다. 약간은 냉한 기운을 가진 바람도 덩달아 이른 상춘객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그래서 이 길은 늘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자랑을 하나보다.

 

화양루에 오르면 봄이 보인다.

 

용도 끄트머리, 팔달산 등성이 남쪽에 높지 않게 처마를 내민 화양루가 있다. 서남각루라고 하는 이 정자는, 그곳에 그리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마루 위에 올라서면 저 밑 수원천에서 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 또한 마음을 한 자락 펼쳐놓을 수 있는 곳이다.

 

 

잠시 여장으로 다가가 고개를 삐죽 내밀면 소나무들이 반긴다. 화양루 성 밖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늘 그렇게 사람을 반기고는 한다. 굳이 외롭지도 않은데도,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가 보다. 아마도 옛날 그곳에서 쐐기 박고 돌을 떼어내던 인부들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늘 먼저 봄을 탄다.

 

이 길 언제 걸어보려고 그리 아껴?

 

이 용도를 제대로 걸어보려면 우선 서장대를 먼저 오르는 것이 좋다. 아니면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치받듯 오르는 성의 여장을 따라 걷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렇게 어디로 오르거나 땀을 흘리면 더욱 좋은 곳이다. 그런 다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뒷짐 턱지고 걸으면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없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 계절이 오면 용도를 따라 걸으면서 장용외영의 무사들도 봄에 홀리고는 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길을 왜 그리 아껴두는 것인지. 그저 평일이면 어떻고 주말이면 어때. 화성으로 달려와 천천히 서남암문을 지나 용도를 걸어보고, 화양루에 올라 봄을 느끼면 되는 것을.

 

늘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언제 걸어보려고? 왜 아직도 아끼기만 하는데? 용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안에 봄은 늘 있지 않다. 꼭 이 철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화성 용도의 봄기운. 그 봄기운이 사라지고 있지 않으려나. 내일은 다시 올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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