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누각이 있다. 바로 영월 영흥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관풍헌의 자규루다. 이상하게 영월에 답사를 갈 때마다 비가 쏟아졌다. 자규루에 올랐을 때는 비바람이 심해 답사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자규루는 영월의 동헌이었던 관풍헌에 속해 있는 누각이다. 이 자규루는 원래 세종10년인 1428년에 영월군수 신숙근이 창건한 누각으로 ‘매죽루’라 불렀다고 한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청령포가 홍수를 인해 침수가 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단종임금은 이곳에서 생활을 할 때 이 누각에 올라 ‘자규사’와 ‘자규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含愁情依樓頭)

울음소리 너무 슬퍼 나 괴롭네(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無爾聲無我愁)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니(寄語世上苦榮人)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단종임금은 누각에 올라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한탄했다. 『장릉지(莊陵誌)』에 전하는 자규사다. 단종임금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렇게 슬픈 나날을 보냈다. 장릉지에는 또 한 수가 전한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또 다시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또 가도 한은 끝이 없구나(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산봉우리 달빛만 흰데(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血流春谷洛花紅)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天聲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내 귀만 홀로 밝은고(何奈愁人耳獨聽)

 

통한의 시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통했으면 이런 시를 남겼을까? 비가 쏟아지는 자규루에 올라 앞에 보이는 관풍헌을 바라다본다.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은 조선조 태조 7년에 건립이 되었다. 이곳으로 옮겨 온 단종임금은 이듬해인 세조 3년인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내린 사약을 마시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관풍헌은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매죽루였던 이 정자는 단종임금으로 인해 자규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후 선조 38년에 큰 홍수로 인해 허물어진 것을, 정조 15년에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쏟아지는 비는 단종임금의 눈물인지. 관풍헌 앞마당에서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세상사 다 그런 것이라지만, 권력 앞에서는 숙부와 조카도 없는 것인지. 지금의 돌아가는 나라꼴을 생각하니 불현듯 자규루가 생각이 난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 찾았던 자규루. 그곳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권력의 아픔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에서 정동으로 길을 잡으면 그 끝은 어디일까? 그 종착지는 바로 추암해수욕장이다. 추암해수욕장은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에 있다. 그리고 이 추암해수욕장의 한편에는 해암정이라는 평범한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해암정은 뒤로 동해바다가 넘실거린다. 그러나 그 동해의 넘실거리는 파도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오히려 한가함을 느끼게 만든다.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해암정은,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벌써 역사가 650년에 이른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

 

해암정은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심동로는 이곳에서 시를 짓고 후학들을 키우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 그 후 몇 번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역사가 깊은 정자다.

 

해암정은 평범한 정자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크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은 방을 두었으며 또 다른 반은 마루를 깔았다. 마루 뒤편에는 동해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무문을 내었다.

 

 

 

아마도 해암정의 뒤편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 해암정이야말로 가장 평범한 곳에 자리한 평범한 정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편을 돌아보면서 해암정과 뒤편 동해안의 모습에 깜짝놀란다. 한 마디로 반전의 극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심동로는 이 해암정을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지었다. 해암정을 둘러보면 심동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뒤에 솟아 난 기암괴석을 넘지 않는 소탈한 정자다. 그 안에는 심동로의 겸손이 배어 있다. 옛 조상님들은 이렇게 자연을 넘지 않았다. 스스로 자연의 일부분임을 깨닫고, 후대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해암정을 비켜서 우측으로 오르면 그 유명한 추암이 있다. 흔히 촛대바위라고 하는 추암은 그 모양새가 특이해 절경으로 꼽힌다. 촛대바위는 매년 수만 명이 찾아드는 명소다. 1월 1일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곳에는 산책로를 비롯해 전망대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이 추암이 분열이 되고 있다고 하여 보존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추암해수욕장과 촛대바위 그리고 해암정. 이렇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은 흔치가 않다. 절경과 정자 그리고 해수욕장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동해안의 절경 중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곳이다.

 

 

난 이 해암정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해암정을 처음 건립한 심동로의 마음이다. 자연을 넘어서지 않고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운다는 것은, 곧 겸손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을 후학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해암정이다. 그래서 해암정은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 그저 다소곳 자연 안에 순응되어 간다.

경기도 여주읍 하리 200-1에는 강한사라는 곳이 있다. 이 강한사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인 우암 송시열을 모신 사당이다. 강한사는 조선조 정조 9년인 1785년에 건립되었다. 이 강한사 안에는 강한루가 있다. 강한루는 남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데, 가을 은행잎이 떨어져 마당 가득 노랑 물을 들이고 있었다.

 

손에 노랑 물이 들것 같은 곳

 

지난 가을, 마당 어디를 보아도 온통 노랗다. 주변에 서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잎을 다 떨어뜨려 강한루를 장식하고 있는 듯하다. 강한루는 단지 누각으로만 사용했던 곳은 아니다. 그 앞쪽에 보면 대로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어, 한 때는 이곳을 서원으로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루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름다운 정자가 아니다. 널찍한 평마루는 난간이 없다. 우측 한편에 붙어있는 조그만 방은 겨울철에 이용한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넓은 마루에 한 쪽 편에 방을 드린 형태다. 마루 양편에는 기둥이 서 있어 정자라기보다는 객사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조의 명으로 건립되었던 대로사

 

원래 이 강한사는 대로사였다. 정조대왕이 세종의 능인 영릉과, 효종의 능인 녕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양행 등에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름을 '대로사'라고 내려주었으나, 고종 10년인 1873년 10월에 지금의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강한루의 이름도 이때 같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가을이 깊었을 때 강한루는 주변의 은행나무들과 어울려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찾아갔으나, 멀리서 보니 은행나무에 잎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허망한 생각에 그저 돌아갈까 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그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잎들이 모두 마당에 쌓여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은행잎이 달렸을 때보다 더 아름답다. 강한루 주변이 온통 노랗다. 마당, 담장, 지붕, 뒤뜰,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다. 모두가 다 노랗다. 그저 강한루를 노랑 물을 들인 듯하다.

 

 

 

가을의 장관을 기억해 내다

 

가을이 되면 강한루가 아름답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정경을 보았기 때문인가 보다. 무엇이 이보다 아름다울 것인가? 노랑 물을 들이고 남한강을 굽어보는 강한루. 강한루를 찾아본지 몇 번 만에 처음으로 보는 장관이다. 그래서 한곳을 여러 번, 그것도 계절마다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지난 가을 강한루에 올라, 그 빛에 취해 세월을 잊는다.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가을 날 강한루를 보지 않았거든 남한강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만큼 온통 노랑 물을 이고 서 있는 강한루이다. 올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 또한 이 노랑물감 때문이다. 어디를 만져도 손끝에 노랑물이 들 것 같은 곳이다. 그 가을이 기다려진다.

사진 한 장만 갖고도 그 정자의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가 있다. 그저 주변 경치로만도 이 정자는 예사 정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정자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을 안겨 준 정자의 기억은 잊히지가 않는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은 수많은 정자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정자들이 많다. 어느 정자인들 산천경계를 중요시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정자들은, 바로 스스로 자연이 된다. 그 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정자가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62호 열화정(悅話亭)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 하나로도 집의 역할을 감당해 내

 

열화정은 조선 현종 11년인 1845년에 이재 이진만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이재의 손자인 원암 이방회가 당대의 석학 영재 이건창 등과 학문을 논하는 등 많은 선비들이 수학하였다고 한다. 열화정은 이 지방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구한말 때 일제에 항거해 싸웠던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 기개 높은 의인 열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열화정은 소박한 구조의 건물은 주변의 정원시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해가 설핏 넘어가기 전에 바쁜 걸음으로 찾아간 열화정. 돌계단을 올라 열화정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탁 막힌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정자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운치 있는 정자는 처음이다. 아마도 이런 정자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거리에 있었나 보다.

 

단골 영화촬영지인 열화정

 

크지도 않고, 마을의 뒤편에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열화정. 누각으로 한편을 지어 그곳에는 연정(蓮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봄이 되면 정자 앞에 작은 연못에 연꽃이라도 피어나는가? 연정인 누각의 앞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이곳에 연꽃이 많이 피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한편에는 물이 차면 빠져나가 정자 앞의 작은 계곡으로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참으로 단아하다. 한편은 벽을 안으로 넣어, 방에 군불을 지피는 사람이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에서도 지은이의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정자의 마당에는 여기저기 오래 묵은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뒤편으로는 울창한 산림과 대밭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상상을 해보아도 열화정이 지니고 있는 멋스러움을 알 것 같다. 사계절 그 모습이 다 달라질 것 같은 모습에서 더욱 더 찬사를 아낄 수가 없다. 영화 <서편제>와 <태백산맥>,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 등에 이곳 열화정이 보인다. 열화정은 그만큼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지켜가고 있다. 봄철 연꽃이 작은 연못을 아름답게 수놓는 날,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사적 제156호인 무성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고 불렀으나, 숙종 22년인 1696년에 임금이 내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무성서원이라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전국에 4개 서원만이 남았는데, 무성서원은 그 중 하나이다. 이 무성서원이 있는 무성리에는 몇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성리 뒷산인 성황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송정(松亭)이다

 

송정은 절경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들판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산죽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무성리 정극인의 동상이 서 있는 우측, 성황산을 소로 길을 오르다가 보면 하마비(下馬碑)가 나온다. 무슨 일로 하마비가 이렇게 성황산을 오르는 길에 놓여있는 것일까?

 

 

아마 과거에는 이곳이 무성서원을 들어가던 길목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하마비를 지나 조금 오르면 단아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송정(松亭)이라고 새겨져 있다. 소나무 숲에 자리한 정자라는 뜻일까? 아니면 소나무처럼 그렇게 마음을 푸르게 살고 싶어서일까? 송정이란 단순한 이름을 붙인 것이 어쩌면 이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세상을 등지고 세월을 보낸 7광 10현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폭정에 벼슬을 버린 선비들

 

송정은 광해군 재위시절 지어진 정자이다. 광해군의 폭정이 극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정자를 지었다. 광해군의 재위가 1608 ~1623년이었으니, 송정이 처음 지어진 지는 이미 400년 가까이 되었다. 이곳에 낙향한 선비들을 세상 사람들은 7광, 10현이라 불렀다. 이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이 송정에 올라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명예를 초개같이 대했다. 아마 주변에 무성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정자를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송정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읊으며 즐기던 곳이다. 7광(狂)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미쳐버린 7명의 선비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질문을 해보지만 딱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10현(賢)이란 어진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7광은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을 가르킨다. 10현이라 함은 7광에 이름이 있는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 외에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 등을 말한다.

 

 

 

이들 7광 10현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담소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들 중 광해군의 재위를 마친 후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정자에 모인 이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자연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송정의 모습에서 알 수가 있다.

 

자연 속에 묻힌 정자 송정

 

송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 정도의 작은 정자다.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부정형의 주추를 놓았다. 마루는 난간도 없이 그저 평마루다. 가운데 들인 방은 4면에 모두 문을 내었다. 마루 한편 밑을 보니 아궁이가 있다. 여기에 불을 때서 겨울에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헸다. 주변에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고, 바람에 날리는 산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연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다. 스스로 자연인양 자랑을 하지 않는다. 송정이란 정자의 이름이 '왜'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만 같다. 7광 10현이 모여 스스로 자연과 같은 마음을 갖고,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변함이 없는 마음, 그리고 산죽과 같이 곧은 마음을 갖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송정에 깃든 속내를 읽은 후에, 정자의 작음은 오히려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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