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자리한 소석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3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농의 상징으로 멋을 자랑하는 소석고택은, 기와에 새겨진 명문을 확인한 결과 조선조 고종 22년인 1885년에 지어졌다. 소석고택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안채에 수직축을 맞추어 사랑채를 놓았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곳간채를 배정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었다.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경에 없어졌다고 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넓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에는 너른 안마당이 있어, 전체적으로 집안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소석고택을 찾은 날은 쌀쌀한 날씨였다. 옷깃을 여미고 찾아간 소석고택은, 초강천을 옆에 두고 너른 평지에 자리한다. 주변에는 초강초등학교가 있어 찾기에도 수월하다.

 

 

안채 다락방을 아궁이 위에 둔 까닭은?

 

소석고택의 안채는 'ㅡ' 자형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경기도 이남의 남부가옥에서 보이는 평면구성으로 안방, 윗방, 2칸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열되었다. 그런데 이 안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2칸 대청을 지난 건넌방의 다락이다. 이 다락은 밑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아궁이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큰 창을 내었다.

 

이렇게 아궁이 위에 다락을 내는 까닭은 바로 습기를 제거하는 목적이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그 온기가 올라 다락을 건조시키는 것이다. 창이 큰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안채는 대개 부녀자들이 기거를 하는 곳으로, 이 아궁이 위의 다락에 옷가지 등을 보관하면 늘 뽀송뽀송하다는 것.

 

 

 

 

 

집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한 곳까지 배려를 한 것이 바로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자 실효성이다. 이러한 것을 점차 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주거문화가 참담하기까지 하다.

 

H자형의 사랑채의 멋스러움

 

우리 고택 중 와가의 멋은 바로 지붕이다. 버선코로 비유되는 처마 끝은, 그야말로 멋스러움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위로 치켜 올려진 것은 무한한 발전을 이끌어 낸다. 모든 일에 대한 희망에 견주기도 하는 이 처마 끝의 멋이야말로 한옥의 특징이다.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H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남편에는 돌출된 누마루를 놓았다. 삼면을 기둥만 세워 시원하게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시를 짓기도 하고, 벗들과 어울려 술 한 잔에 시름을 덜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간단한 난간으로만 치장을 한 누마루는, 그대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누마루와 반대편에 있는 서편의 방 옆에는 커다란 문을 달았다. 이 문의 용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 초강천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겨울이면 문을 닫아 찬바람을 막아내는 구실을 했다. 기단으로 쌓은 돌 하나하나에서 소석고택이 부농의 상징임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는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한옥의 멋을 그대로 살린 아름다움이다.

 

 

 

 

 

곳간은 둘, 지붕은 하나의 색다른 건축

 

소석고택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바로 곳간채다. 안채와 사랑채가 와가로 지어진데 비해, 곳간채는 초가로 꾸며졌다. 그것이 소석고택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 곳간채는 지붕이 하나인데 곳간부분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했을까?

 

서향으로 지어진 소석고택의 곳간채는 뒤주처럼 가로로 널판을 끼워 맞추고 있다. 이 곳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각 칸마다 세로로 중인방을 넣고, 널판을 가로로 끼워 벽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곳간채는 바닥은 널마루로 깔고 천정 또한 널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이렇게 분리를 해 놓은 것은 한 곳은 곡간으로, 한 곳은 뒤주로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돌담과 측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건물만큼 돌담을 쌓았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안채와 남정네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를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서편 'ㄱ' 자로 꺾인 부분에 측간을 지었다. 측간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널판자로 벽을 만들었다. 1칸으로 지어진 이 측간을 사랑채 뒤에 두고, 담장을 막은 것도 소석고택이 그저 건축물을 놓은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도 신경을 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뒤쪽에 측간을 내어 냄새를 방비하기도 했지만, 담을 두어 자칫 불편한 모습과 소리를 안채에서 듣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우리 고택을 둘러보면 하나하나가 철학이다. 그리고 자연과 동화를 하면서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과 동화되는 심성이 아름다운 집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집을 짓는 마음이 그립다.

아마 명칭을 육송정 홍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다리 부근 어딘가에 육송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1337호인 고성 육송정 홍교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가 두 곳의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 홍교를 놓은 내가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간성읍에서 고성 건봉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군 훈련장과 같은 곳이 보인다. 그리고 현재 사용하는 다리 옆에 육송정 홍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홍교는 보물인 건봉사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24년인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에는, 이 홍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건봉사 능파교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 암반을 이용해 축조한 홍교

 

육송정 홍교는 하천의 폭이 12.3m 정도가 되는 곳에, 10.6m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위는 양편으로 네모난 장대석을 줄지어 놓고, 그 위에 황토 등으로 메우는 방법을 택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육송정 홍교는, 동쪽은 그대로 암반을 이용해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을 올렸다.

 

서쪽은 3단의 지대석을 쌓은 뒤, 그 위에 홍예석으로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 지대석의 1단은 땅 속에 묻혀있어,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단과 3단의 지대석은 커다랗고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각각 두 장의 돌을 붙여놓았다. 그 크기는 2단의 높이가 70cm 정도이고, 3단은 60cm 정도인데, 3단의 가운데는 안쪽으로 파손이 되었다.

 

 

이 육송정 홍교는 축조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능파교와 함께 영조 21년인 1745년 대홍수 때 붕괴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능파교를 축조한 숙종 30년인 1704년이나 그보다 앞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꾸밈이 없는 단아한 육송정 홍교

 

이 육송정 홍교의 특징은 홍예와 날개벽 사이의 교각 면석을 장대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적인 냇돌을 사용하였는데, 아래편에는 큰 돌을 위편에는 작은 돌을 써서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단칸 홍교로는 보기 드물게 단아한 형태로 축조가 된 육송정 홍교는, 20066월에 홍교를 해체 복원하였다.

 

 

홍예를 구성하고 있는 장대석은 갈고 짧은 것을 적당히 섞어 공고하게 축조를 하였다. 2~3장의 장대석으로 이를 맞추어 쌓은 홍예는 매우 견고하게 보인다. 홍예밑으로 흐르는 물은 암반 위로 흐른다. 하기에 물이 스며드는 것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듯하다.

 

동편 홍예의 지대석을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육송정 홍교는 단아하다. 화려하게 모양을 낸 여느 홍교와는 달리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다리 하나를 놓으면서도, 이런 세세한 면까지 신경을 쓴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을 할만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육송정 홍교. 아마도 이 다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육송정 홍교 위에 서서,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감탄을 한다.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에 소재한,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6호인 팔괘정.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이 팔괘정은 송시열 선생이 율곡선생을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진다.

 

스승과 가까이 하고 싶어 지은 팔괘정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이 강경 황산리 금강가에 임이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서 있고 싶어서 정자를 지었다. 임이정과 불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팔괘정은 그 모습도 임이정과 닮았다. 팔괘정은 금강을 바라다보는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은 동일한 간격으로 그중 두 칸은 넓은 대청을 만들고, 한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초익공식과 동일한 구성의 공포를 짜 올린 팔괘정. 창방 위에는 기둥사이마다 다섯 개의 소로 받침을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팔괘정은, 한식 가옥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옛 모습을 그려보다.

 

송시열은 선조 40년인 1607년에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계 김장생이 강경 황산에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송시열이 팔괘정을 지은 때를 인조시대로 보는 이유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임이정과 팔괘정은 크기나 모습이 흡사하다.

 

당시 황산은 김장생과 송시열이라는 두 거목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두 정자 사이에는 조금 아래서 내려서 죽림서원이 있었으니, 날마다 금강가에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을 것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글을 읽으며 세상을 논하고, 시 한수를 지어 어딘가에 적지 않았을까? 팔괘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마 당시 이곳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그 자리에 끼는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았을까? 무심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팔괘정 앞을 날아간다.

 

바위벽에 남긴 흔적

 

팔괘정 옆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있다. 예전 이 팔괘정을 세운 송시열은 이 바위를 바라다보며 나라를 위한 충정의 굳은 의지를 키웠을 것이다. 바위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청초암(靑草岩)'과 ‘몽괘벽(夢掛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젊음의 기상을 떨치고, 꿈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마음에 새기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금강을 한가롭게 유영하는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아마 멀리 북녘까지 날아갈 차비라도 하려는가 보다. 저녁 햇볕이 저만큼 강물에 길게 붉은 띠를 두른다. 이런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이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했을 선생의 마음이 그려진다. 봄날 이는 황사바람 한 점이 스치고 지나간다. 정자 옆 바위는 미동도 없다. 그것이 팔괘정을 지은 선생의 마음일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