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광재. 조선의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곳이다. 한옥마을 최명희 문학관 인근에 있는 승광재는 2004년 8월 경에 지어진 집이다. 이곳은 조선황실의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설예원과 함께 있다. 현재 전라북도 도지사인 김완주 지사가 전주시장으로 재직시 이 승광재를 지어 이석씨를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승광재는 한옥마을의 한편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긴 흙담 사이로 난 골목 안에 일각문이 보이고, 그 문 위에는 ‘승광재’라는 현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는 설예원이 있고, 우측으로는 ㄷ 자로 꾸며진 승광재가 자리한다. 승광재는 ㄱ 자 집 두 채를 연결해 ㄷ 자로 꾸민 집이다. 승광재에는 황실 사람들의 사진과 황실에 관련된 내용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보다.

내가 황손 이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0월 8일 명성황후 생가에서이다.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를 생가 마루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해로 벌써 70세인 이석 씨는 한 때 가수로도 활동을 했으며, 터전을 잡지 못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황제의 손이고 아버지는 의친왕이다. 하기에 명성황후는 이석 씨의 할머니가 된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 황손 이석씨. 그리고 현재 한옥마을의 승광재

황손 이석 씨는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사동궁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결국 궁에서 나오게 되고,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전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도 쫓겨나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단다.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황손 이석 씨였다. 한 낮에 찾아 든 승광재에는 문이 닫힌 채 나그네들만 왁자하니 집안을 돌아보고, 예절을 배우러 온 아이들인지 소리를 치면서 뛰어다닌다.

요즈음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는 사극을 보면서, 만일 일본과의 그런 개탄스런 과거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승광재가 조금은 남다른 집일 것만 같다. 오래된 고옥도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조용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그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끄럽게 만든다. 그 한편에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는 승광재를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승광재와 설예원(아래)

오늘 황손의 집은 낯이 설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도 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고맙다는 황손의 말을 되새겨본다. 글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 한옥마을 한 끄트머리에서 만난 황손의 집에서,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이다.


위는 영조의 가계도, 아래는 고종황제의 가계도(전단지 전사)

우선 편안하게 옛 집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고택, 가옥, 생가, 생가지라는 용어를 써서 소개를 하는 집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옛집 기행을 하면서 돌아본 바로는, 고택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 않거나 집을 지은 일족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살 경우에 붙은 명칭이고, 가옥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명칭을 붙인다.

가옥의 경우 처음 그 집을 축조한 사람이 아닌, 현재 소유권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가옥’이란 명칭으로 사용한다. 생가는 그야말로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집을 말하는 것이고, 생가지란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는데 집의 형태가 당시의 집이 아닐 때 붙이는 명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전국의 가옥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런 형태로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명칭을 어떻게 붙였는가는 정확히 가늠은 되지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다니면서 본 결과 대개는 이런 형태로 명칭을 붙인 것 같다.


독립만세의 고장 천안

충남 천안은 독립만세의 고장이다.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구국전선에서 열정을 받쳤던 이동녕 선생이 목천에서 태어났다. 목천과 병천은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또 한 분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유석 조병옥은 병천면 봉두리에서 태어났으니, 이곳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유석 조병옥(1894, 5, 21 천안 병천 ~ 1960, 2, 15 미국) 박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또한 정치가로 일생을 살았다. 부통령 출마와 대통령 출마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유세 중 병으로 인해 미국으로 급히 이송이 되어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병옥은 일제 강점기에는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와 외무부장관 등을 거치기도 했다.



집안에 있는우물과(위) - 자형으로 꾸민 안채(가운데), 그리고 헛간채(아래)

조촐한 초가집, 그러나 쓰임새 있게 꾸며

유석 조병옥의 생가는 천안시 병천면 봉두리 261-6 도로변에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유관순의 생가가 있어, 두 곳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날따라 국지성 호우로 인해 길을 걷기도 힘든데, 다행히 답사를 하는 시간에는 비가 멈추어주었다.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조병옥의 생가는,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조병옥 박사가 이 집에 살던 때는 초가였으나 와가로 변형되었던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원형 그대로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였기 때문에 ‘생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집은 - 자형의 초가로 지어졌다. 대지 550평에 안채가 15평, 헛간채가 7평 정도의 크기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으로 우물이 보인다.



좌측 끝에 툇마루를 달아내고(위) 정면으로는 반 칸 정도의 한데공간을 마련했다(가운데)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부엌을 놓았다(아래)


-자 형으로 꾸민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을 하였고, 동편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았다. 이곳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을 보면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한 칸의 사랑으로 꾸며져 있다. 맨 끝에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 부엌을 놓았으며, 정면에는 반 칸 정도의 빈 공간을 개방형으로 만들어 이동이 편리하게 하였다. 측면은 이러한 개방된 곳 때문에 칸 반 정도로 보인다.

헛간채는 모두 세 칸으로 광 한 칸을 두고 가운데는 헛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끝에 한 칸은 마구간으로 사용을 하였으며, 처마를 길게 달아내 비에 젖지 않도록 한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특별한 것은 없는 초가집이다. 그러나 15평이라는 적은 공간을 아주 짜임새 있게 꾸며 놓았다.



헛간채는 처마를 길게 빼어 눈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위) 여물통과 안채와 헛간채(아래)

지금은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어린 시절 조병옥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뛰놀았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찾아간 조병옥의 생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는 이 집에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한 세대를 풍미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 것을 생각이니, 괜히 마음이 경건해진다. ‘사람은 죽어서 그 이름을 남긴다.’라는 옛말처럼, 이 작은 초가집에서 그 이름을 남긴 역사의 인물이 살다가 갔다. 그래서 옛집의 순례는 의미가 있는가보다.


방안과 뒤뜰. 간소하게 꾸며진 이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유석 조병옥 선생은 독립운동과,
나라의 민주주의의 꽃을피우기 위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 - 12에 자리한 필경사. 충남지정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이 된 이 집은,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필경사는 심훈(1901~1936)이 서울에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심훈은 이 집을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짓고, 필경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필경사란 이름은 1930년 선생이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내지 못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제목을 딴 것이라고 한다. 심훈은 민족의식과 계급적 저항의식을 지닌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인으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운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썼다.

심훈선생이 소살 상록수를 집필한 당진 필경사

농촌계몽을 하기 위한 노력

심훈의 본관은 청송이며 본명은 대섭이다. 어릴 적에는 ‘삼준’이나 ‘삼보’로 불렸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심훈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퇴학을 당하여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 중에는 베이징, 상하이, 난징[南京]에서 활동을 했다. 이 기간 동안 항저우에 있는 지강(=즈강)대학에 입학을 했다. 귀국을 한 후 연극을 하던 심훈은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31년에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창작활동에 힘을 쏟았다. 1935년에는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 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록수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당시 부곡리에는 경성농업학교 출신인 조카 심재영이 주동하는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장편이 바로 ‘상록수’였다. 당시의 상록수는 동아일보에 1935. 9. 10 ~ 1936. 2. 15까지 연재가 되었다.

상록수는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한국농촌의 참상을 보여주고, 농촌계몽운동을 실천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심훈의 뒤를 이어 필경사에서 생활을 하던 조카 심재영은 상록수의 남자 주인공인 동혁의 모델이기도 하다.



필경사 경내의 전시관과 '그날이 오면' 시비 심훈선생 상

「상록수에서 영신과 동혁은 신문사 주최의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학업을 마치고 동혁은 한곡리로, 영신은 청석골로 내려가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한다.
 
동혁은 ‘농우회’를 조직하고 회관 건립과 마을 개량 사업을 추진하나, 지주인 강도사의 아들 강기천과 당국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 청석골로 내려간 채영신도 예배당을 빌려서 농촌 아이들에게 한글 강습을 실시하는 한편, 기부금을 모아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을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괴로워한다. 갖은 어려움 끝에 영신은 과로와 맹장염으로 학원 낙성식 날 졸도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동혁이 영신에게 문병을 와 있는 동안 강기천은 농우회원을 매수하여 명칭을 진흥회로 바꾸고 회장이 된다.

이에 분노한 동혁의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자, 동혁이 대신 수감된다. 출옥한 동혁이 청석골로 갔을 때 영신은 이미 죽어 있었다. 동혁은 영신을 장례지내고 산을 내려오면서 상록수들을 보며 농촌을 위해 평생 몸 바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상록수는 끝을 맺는다.」


한진항과 한진 앞바다. 멀리 서해대교가 보인다.

그동안 몇 번인가 찾아갔던 필경사였다. 오랜만에 들린 필경사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처음으로 필경사를 찾은 것은 1995년 인가였다. 그 당시에는 심훈의 조카인 상록수의 모델인 심재영 옹이 묵고 있었기 때문에 따듯한 온기가 있었는데, 그런 온기가 사라졌기 때문인가 보다. 당시에 심재영 옹에게서 상록수가 만들어진 배경과, 심훈선생이 한진항을 통하여 인천으로 오가며 집필을 했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한 심훈선생은 농촌계몽운동을 벌여, 농촌이 잘 살고 농민들이 배워야한다고 늘 주장을 폈다고 한다.

“선생님은 늘 우리 농촌이 먼저 잘 살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셨죠. 농민들이 먼저 잘 살지 않으면 민심이 바로 설 수가 없고, 그러면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것이죠”

생전에 심재영 옹이 하신 말씀이다. 어디 농민들뿐이랴,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를 뻗고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바로 선 나라가 아닐까? 어디를 가나 주변이 바뀌면서 예전의 정감어린 모습이 자꾸 변해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 필경사를 찾았을 때는 뒤편이 숲으로 뒤덮여 운치가 있었다. 마루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심재영 옹과 담소를 나눌 때도 그윽한 차향과 함께 숲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정리를 한다고 말끔해진 주변이 오히려 낯이 설다. 방안에 있는 때 묻은 고가구나 여기저기 걸린 소품들도 딱히 정겹지가 않다. 그저 처음 본디 모습 그대로가 때로는 더 정겨울 수도 있는데. 저 멀리 한진항 앞에 정박한 고깃배들이 일몰직전 한가롭게 조는 모습이, 그저 무슨 또 다른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하다.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지 114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아침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 앞에 있는 문예관에서는 명성황후 114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처음에는 행사를 크게 하기로 했으나 신종플루로 인해 대폭 축소해, 이기수 여주군수를 비롯한 300여 명의 내외빈 인사들이 모여 명성황후의 뜻을 기렸다.

 

명성황후는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이다.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 명성황후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에 모셔진 명성황후의 영정

  
▲ 생가 정면 여주읍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지

아침 일찍 서둘러 생가지로 향했다. 명성황후 생가지는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8세까지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생가지에 잇는 집은 숙종 13년인 1687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지어졌다. 당시의 건물로 남아있던 것은 안채뿐인데, 1995년 행랑체 사랑체 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이 생가의 우측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서 있다.

 

  
▲ 안채 명성황후 생가 안채. 이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내력을 기록한 탄강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것이다. 탄강이란 왕이나 성인 등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고, 구리란 고향이라는 뜻으로 탄강구리비란 명성황후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뜻이다.

 

  
▲ 별당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의 별당. 1895년 동학혁명 때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탄강구리비의 뒷면에는 광무8년인 1904년에 세워졌으며 '5월 어느 날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제27대 황제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황제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탄강구리비 뒷편에 위치한 별당은 명성황후가 1851년 음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가 8세가 되던 해에 부친인 어성부원군 민치록이 영천군수를 끝으로 감고당에서 세상을 하직했으니 명성황후는 그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명성황후 생가지 명성황후 추모를 하는 날 어린 아이들이 생가지를 찾았다. 명성황후의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1895년인 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가 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혁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맞섰던 명성황후는 그렇게 비극적인 생을 마쳤던 것이다.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가 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 황손 이석씨 추모제날 명성황후 생가지를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추모제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촬영을 하고..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생가 곁에 마련된 민가마을에서 간단한 점식식사로 국수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는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가 참여를 했다. 올해 69세로 전주 승광재에 기거하고 있는 이석씨가 외가를 찾은 것이다. 곱게 두루마기를 입은 황손 이석씨는 그동안 수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는 고종황제가 할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친왕이다. 결국 명성황후는 황손 이석씨의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긴 황손 이석씨. 영국이나 일본 같으면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겠지만 마땅히 터전을 잡지 못하고 방랑을 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가수를 비롯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다가 2003년 8월부터 태조 이성계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 김완주 전라북도도지사가 전주시장을 지낼 때 배려를 한 것이다.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하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나라에서 일본 천황을 초청한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질 않습니다. 할머니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장본인인 그들이 모든 것을 깊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은 격해진 마음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으면 아버님께서는 항상 칼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답니다. 심지어는 독약을 받을 것에 대비를 해 비상을 조금씩 마셨다고도 합니다."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라면서 말을 하는 황손 이석씨의 웃는 얼굴에 잠시 노기가 스민다. "그저 제가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마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사동궁에서 보냈다. 궁에서 나온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여기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 때가 힘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이후로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고,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갈곳이 있다면서 쓸쓸히 명성황후 생가를 뒤로하고 떠나는 황손 이석씨. 왜 그 뒷모습에 분노가 보였을까?   

 

  
▲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의 대화 명성황후 추모제장을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할머니댁인 외가를 찾은 황손 이석씨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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