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 - 12에 자리한 필경사. 충남지정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이 된 이 집은,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필경사는 심훈(1901~1936)이 서울에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심훈은 이 집을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짓고, 필경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필경사란 이름은 1930년 선생이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내지 못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제목을 딴 것이라고 한다. 심훈은 민족의식과 계급적 저항의식을 지닌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인으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운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썼다.

심훈선생이 소살 상록수를 집필한 당진 필경사

농촌계몽을 하기 위한 노력

심훈의 본관은 청송이며 본명은 대섭이다. 어릴 적에는 ‘삼준’이나 ‘삼보’로 불렸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심훈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퇴학을 당하여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 중에는 베이징, 상하이, 난징[南京]에서 활동을 했다. 이 기간 동안 항저우에 있는 지강(=즈강)대학에 입학을 했다. 귀국을 한 후 연극을 하던 심훈은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31년에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창작활동에 힘을 쏟았다. 1935년에는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 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록수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당시 부곡리에는 경성농업학교 출신인 조카 심재영이 주동하는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장편이 바로 ‘상록수’였다. 당시의 상록수는 동아일보에 1935. 9. 10 ~ 1936. 2. 15까지 연재가 되었다.

상록수는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한국농촌의 참상을 보여주고, 농촌계몽운동을 실천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심훈의 뒤를 이어 필경사에서 생활을 하던 조카 심재영은 상록수의 남자 주인공인 동혁의 모델이기도 하다.



필경사 경내의 전시관과 '그날이 오면' 시비 심훈선생 상

「상록수에서 영신과 동혁은 신문사 주최의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학업을 마치고 동혁은 한곡리로, 영신은 청석골로 내려가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한다.
 
동혁은 ‘농우회’를 조직하고 회관 건립과 마을 개량 사업을 추진하나, 지주인 강도사의 아들 강기천과 당국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 청석골로 내려간 채영신도 예배당을 빌려서 농촌 아이들에게 한글 강습을 실시하는 한편, 기부금을 모아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을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괴로워한다. 갖은 어려움 끝에 영신은 과로와 맹장염으로 학원 낙성식 날 졸도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동혁이 영신에게 문병을 와 있는 동안 강기천은 농우회원을 매수하여 명칭을 진흥회로 바꾸고 회장이 된다.

이에 분노한 동혁의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자, 동혁이 대신 수감된다. 출옥한 동혁이 청석골로 갔을 때 영신은 이미 죽어 있었다. 동혁은 영신을 장례지내고 산을 내려오면서 상록수들을 보며 농촌을 위해 평생 몸 바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상록수는 끝을 맺는다.」


한진항과 한진 앞바다. 멀리 서해대교가 보인다.

그동안 몇 번인가 찾아갔던 필경사였다. 오랜만에 들린 필경사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처음으로 필경사를 찾은 것은 1995년 인가였다. 그 당시에는 심훈의 조카인 상록수의 모델인 심재영 옹이 묵고 있었기 때문에 따듯한 온기가 있었는데, 그런 온기가 사라졌기 때문인가 보다. 당시에 심재영 옹에게서 상록수가 만들어진 배경과, 심훈선생이 한진항을 통하여 인천으로 오가며 집필을 했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한 심훈선생은 농촌계몽운동을 벌여, 농촌이 잘 살고 농민들이 배워야한다고 늘 주장을 폈다고 한다.

“선생님은 늘 우리 농촌이 먼저 잘 살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셨죠. 농민들이 먼저 잘 살지 않으면 민심이 바로 설 수가 없고, 그러면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것이죠”

생전에 심재영 옹이 하신 말씀이다. 어디 농민들뿐이랴,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를 뻗고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바로 선 나라가 아닐까? 어디를 가나 주변이 바뀌면서 예전의 정감어린 모습이 자꾸 변해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 필경사를 찾았을 때는 뒤편이 숲으로 뒤덮여 운치가 있었다. 마루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심재영 옹과 담소를 나눌 때도 그윽한 차향과 함께 숲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정리를 한다고 말끔해진 주변이 오히려 낯이 설다. 방안에 있는 때 묻은 고가구나 여기저기 걸린 소품들도 딱히 정겹지가 않다. 그저 처음 본디 모습 그대로가 때로는 더 정겨울 수도 있는데. 저 멀리 한진항 앞에 정박한 고깃배들이 일몰직전 한가롭게 조는 모습이, 그저 무슨 또 다른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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