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황후가 태어날 만한 기가 응집된 곳

 

명성왕후 생가를 돌아보다가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생가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행랑채와 곳간, 측간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솟을대문 안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중문에 연결되어 대청과 방으로 연결된다. 헛간을 두고 꺾여 중문채를 두었다. 중문과 사랑채, 중문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배치가 되었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 곳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안채와 중문채 사이에 일각문을 두어 별당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명성황후 생가를 출입구는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중문 곁에 붙은 사랑채의 마루가 된다. 일직선상에 놓인 대청은 솟을대문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이 바람을 막는 것을 피해, 솟을대문과 마루를 일직선상에 놓아 바람이 맞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으로 연결이 되며 마루에 안으로 문을 내어 바람이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문은 사랑채의 마루에 붙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나 있다. 이 중문 안에 방과 헛간은 청지기가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과 안방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중문을 들어가 방과 헛간, 부엌을 지난 후 ㄱ 자로 꺾여 있으며 대청과 건넌방, 곳간으로 마련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건넌방이다.

 

 

대청을 지난 건넌방은 안채의 대청보다 높은 마루가 앞에 있다. 그리고 그 마루 밑에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이 건넌방은 솟을대문과 샤랑채의 마루, 그리고 건넌방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바로 이 기가 모이도록 지은 집안의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좁은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기능성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랑채와 중문채를 이어서 구성한 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반가의 집과 같이 집을 띄엄띄엄 지은 것이 아니고, 오밀조밀하니 붙여지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평지와 작은 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편에 있는 구릉에 막히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형태의 집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여유를 보이는 별당채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이 이어지는 곳에 일각문을 통해 별당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별당채는 명성황후가 8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별당채는 안채와 사랑채보다도 넓은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을 드나드는 문은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에 연결한 일각문과,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있다.

 

그런데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장에 연결된 일각문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다. 별당채는 안채보다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그런데 행랑채의 끝에 있는 초가로 만들어진 측간 곁에 별당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내었다는 것은, 우리 전통가옥의 구조상 어긋난다는 생각이다.

 

 

 

별당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이 별당채도 1995년 복원이 되었다. 별당채는 매우 간결하게 꾸며져 있다. 별당채는 정면 세 칸으로 좌측의 한 칸은 방으로, 우측의 두 칸은 대청으로 꾸몄다. 방과 대청의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의 문은 들어 올리게 되어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추운 계절에는 문을 닫아 보온을 하였다. 대청의 뒤는 판자문으로 막았는데, 대청 끝 우측 벽을 창호를 내어 멋을 더했다. 어린 소녀가 이곳에서 자라, 한 나라를 뒤흔들만한 역사의 중심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굴뚝이 없는 거북등 연도와 부엌의 비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이상한 점이 있다. 연도는 있는데 굴뚝이 없다.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굴뚝이 없다. 대신 거북이가 웅크리고 앉은 듯 한 연도가 있다. 안채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 집은 굴뚝을 세우지 않고 연도를 뺀 듯하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우연히 이 집을 복원할 때 일을 맡아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복원을 할 때 안채의 부엌바닥을 조금 고쳤다는 것이다. 어째 옛 모습 그대로였다면 조금은 더 깊어야 할 부엌바닥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엌바닥은 조개무덤이 생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조개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바뀐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복이라고 하셨다. 많은 집들이 보수를 하면서 이런 조개무덤이 사라졌다.

 

 

부엌이 깊어야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방에 불을 때고 음식을 조리하려면 부뚜막이 있어야 하고, 그 부뚜막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방을 데우게 만든다. 그러려면 부엌의 아궁이가 깊어야 불길이 위로 잘 솟아 방이 빨리 뜨듯해진다. 아마 바닥 정리를 하면서 조금 돋은 듯 하다. 고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옥의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제각각이다. 어느 누구는 치부를 자랑으로 사는가 하면, 어느 누구는 청빈한 삶을 살기도 한다. 명성을 찾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할 일만 죽어라 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인생이 성공을 했는가는 후세의 사가들이 기록을 한다고 하니, 사람마다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녹녹치가 않다는 생각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1420 ~ 1489)의 생가가 있다. 단종의 폐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이곳에 내려와 은거를 하면서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다. 건물이 그 때에 지은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아마도 그 집 자리에서 몇 번은 보수를 한 듯하다.


청빈한 생활 그대로

울안에는 수령 500년의 보호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어계 조려선생이 이곳으로 낙향한 시기와 흡사하다. 아마 집을 짓고 난 뒤, 이 은행나무를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높이 20m에 둘레가 3,4m나 되는 적지 않은 나무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룬 분이 바로 어계 선생이다.

당시 사약을 받고 청령포에 시신을 버렸다고 일설에 전하고 있다. 그 시신을 수습하고 위폐를 동학사에 모신 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어계선생은 일체 좋은 음식을 먹지를 않고, 고사리와 풀만 먹었다고 전한다.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와 같은 생활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 뒤편 산의 명칭도 백이산이라고 한다.




어계선생의 생가는 단출하다. 당시 벼슬을 한 사람들의 집이 고래등 같은데 비하면, 기와집이라고는 하지만 초막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전하는 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은 대문채와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원북재,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졌다.

대문 위에 걸린 충신지려

어계생가를 들어가려고 솟을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 위에 현판이 걸려있다. 충신지려이다. <충신 증 이조참판 조려지려>라 적혀있다. 생육신의 한분이었으니, 충신이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원북재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 원북재를 재실로 보고 있다. 살림집이 아닌 재실로 보는 까닭은 부엌 등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양편에 한 칸씩의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두 칸 대청을 놓았다. 별난 것도 없는 검소한 고옥이다. 이 원북재는 사랑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두 단의 축대 위에 지은 원북재. 그 집에서 조려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조금의 화려함도 찾아볼 수가 없는 집이다.

원북재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대나무 숲을 뒤로 한 사당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주변을 돌담으로 둘렀다. 사당에서는 조려선생과 부인의 항례가 행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당에서 제를 올리기 위한 집이기에, 원북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담장에 붙어있는 집, 안채가 아닐까?

조려선생 생가 곁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다. 따로 담장을 쌓고 문을 내었는데, 주추 등으로 보아 조려선생 생가와 년대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집에 대해서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집은 네 칸으로 지어진 팔작집이다. 기단은 시멘트로 발라놓아 정확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측 한 칸을 내달았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부엌방과 안방, 한 칸의 대청, 그리고 높임마루를 둔 건넌방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부엌이 딸린 방 벽 밑에는 창불을 때는 아궁이가 보인다. 주추도 마름모꼴로 조성을 하였다. 여느 일반집 같지는 않다. 아마도 조려선생 생가의 안채는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려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어계 조려선생의 생가는 일반적인 집 구조와는 다르다. 선생의 평소에 청빈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아마도 사랑채가 없는 것은, 바람 부는 청풍대를 사랑채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따라 어계선생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날마다 커져가는 집들을 자랑하는 세상사가.


우리 고택을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은 비밀스런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비밀스런 곳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다. 대개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채에서 안채를 들어가려면 중문을 이용하게 된다. 중문을 이용하지 않고 안채로 가는 길은, 그 중간에 쪽문인 일각문을 두어 출입을 한다.

그러나 고택 중에는 그런 쪽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채의 뒤쪽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한 곳도 있다. 그런 집들을 보면 괜히 즐거워지는 지는 힘든 답사 길에서 가끔은 혼자 멋대로의 상상을 즐겨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샛길의 용도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샛길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조 사대부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거창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에 소재한 정온선생 생가는, 처음 지은 지가 500여 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정온선생의 생가였고 종택이었다는 하는 이 집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선생의 생몰연대가 조선조 때인 1569~1641년임을 감안한다면, 줄잡아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순조 20년인 1820년에 후손들이 중창을 한 후로 줄곧 자리를 지켜 온 집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의 중요한 자리를 하고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사대부가나 그러하듯 하나 정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정온선생의 생가는 지역의 기후에 맞게 북부지방의 보편적인 결집형태와, 남부지방의 특징인 높은 툇마루를 두어 두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조화를 시키고 있다.



남부지방 사랑채의 전형을 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정원이 있고, 그 뒤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ㄱ 자형인 사랑채는 7칸인 사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방을 두고, 연이어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방과 누정을 두었다. 누정의 경우에는 기단을 쌓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놓아 올린점이 특이하다.

난간을 두른 누정의 지붕은 길게 내달아 겹처마로 꾸며졌으며, 바깥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다. 좌측의 방 앞에 툇마루에도 난간을 두른 것이 사랑채의 멋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특이하며 남부지방 특유의 사랑채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의 주금 비켜선 뒤편으로는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사랑과 안채의 연결구실을 하고 있다.


중문과 광채

정온선생은 조선조에서 충절로 이름이 높은 분이다.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이 되었다. 선생은 함양 남계서원, 제주 귤림서원 등에 배향이 되었다.

높임마루를 놓은 안채의 여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지만, 안채를 막는 바람벽 등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대신 안채를 조금 비켜서 구성한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중문 앞으로는 길게 광채를 놓고, 그 옆으로 - 자 형으로 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두 칸의 부엌에 이어 방과 대청, 그리고 맨 끝에는 한 칸의 높임마루를 둔 방이 있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높임마루는 남부지방의 특징이다.

앞으로는 사랑채의 뒤편이 보이게 지어진 이 안채는 대청을 지나 구성된 건넌방의 툇마루를 높이고, 그 앞을 난간을 둘렀다. 남부지방 특유의 높임마루의 형태로 꾸며진 것이다. 이러한 집의 구성이 색다른 정온선생의 생가는 북부와 남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집의 꾸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은밀한 동선인가? 사랑채 뒤편 터진 담

그런데 안채에서 사랑채 쪽으로 보니 담장이 트여있는 곳이 있다. 대개는 사랑채와 연결을 할 때는 일각문을 두는 법인데, 그대로 담장의 한 편 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랑채 방 뒤편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동선은 대개 어른들이 기거를 하는 사랑에서, 집안의 젊은 남정네들이 안채에 있는 젊은 새댁을 보러가기 편하게 꾸미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물과 사랑채 뒤편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동선이 있다.
 
더구나 안방에 안주인이 기거를 한다면, 건넌방을 새댁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뒤편에서 중문채에 기거하는 식솔들을 피해, 바로 안채 건넌방으로 갈 수가 있다. 옛 사대부가에 보면 가끔 이런 동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뒤편으로 난 방문에서 댓돌을 찾아보는 것은 그런 은밀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 선생. 자는 순오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학자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이용우의 아들로 입양된 이상설은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등을 공부하여 고종 31년인 1894년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이상설은 의정부 참찬에까지 올랐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의 폐기를 상소한 후 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하여 서전서숙을 세웠다. 이곳에서 교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47세의 나이로 병사를 하였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는 이상설 생가. 유허비와 뒤편에 동상, 그리고 생가의 모습이다

숭열사와 생가가 한 자리에

숭열사는 이상설 선생의 존영을 모신 사당이다. 1972년 진천읍 교성리에 세워진 목조와가 9평의 맞배집으로 된 사당과 숭모비 등을, 1997년 현재의 자리인 산척리 생가 곁으로 옮겨 놓았다. 숭열사에는 사당과 솟을문, 추모비와 동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한편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인 이상설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상설 생가는 초가 세 칸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초가집은 황토벽으로 발라놓았다. 이 집은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광복을 전후 해 무너진 것을, 근년에 옛 분들의 고증을 받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집 옆으로는 1957년에 세운 유허비가 서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이상설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세 칸 초가인 안채와 맞은 편에 있는 헛간채

초라한 세 칸 초가가 품은 인물

지금은 정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마 선생에 태어날 당시에 생가는 더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세 칸 초가는 앞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이 있고, 안방과 윗방이 있다. 앞으로는 툇마루도 놓지 않았으며, 방은 겨우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윗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안방은 뒤편으로 난 문이 조금 크다는 것뿐, 일반 민초들이 사는 집보다도 초라하다. 윗방 앞에는 조금 돌출이 되게 내달아 곡식을 넣어두는 곳간을 만들었다. 부엌은 조금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아궁이를 두었다. 벽 한편에 돌출이 된 곳은, 예전 등잔을 올려놓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윗방 앞으로 달아낸 곳간채와 안방. 안방은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만한 공간이다.

이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난 이상설 선생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세계에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선생이 이 집에서 자란 것은 7세 때까지였을 것이다. 그 뒤로는 이용우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생가에서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다

눈발이 날린다. 마음을 먹고 나선 답사 길이 폭설로 인해 중단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변동이 오히려 이상설 선생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요즈음 사람들은 자라나는 환경만을 그렇게 핑계를 대는 것인지.



거적으로 된 부엌문과 아궁이, 그리고 벽에 불거진 것은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대이다.

선생을 위시한 여러 선인들은 자라난 환경이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라는 환경이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그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을 이상설 선생. 오늘 그 생가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그 동안 참으로 세상을 잘못 살아왔음을 깊이 반성하면서.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그저 부끄러움에 그 눈발이 고맙다. 부끄러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수가 있으니.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명창의 마을이다. 일찍 우리 판소리사에 한 획을 그은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며, 여류 국창이라는 박초월 선생이 바로 이웃집에서 태어나셨다. 이 마을에는 현재 명창의 생가라는 두 채의 집이 10여 m도 안 되는 거리에 남아 있다.

운봉을 찾아 간 것은 바로 이 명창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일세를 풍미하는 명창들이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였기에, 우리 판소리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인물들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일까?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을 찾아가 본다.



이웃하고 있는 두 분의 명창 생가

지금은 밖으로 초가대문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나온다. 소리를 하는 동상이 서 잇다.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의 형태이다. 이 뒤편으로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송흥록의 집은 정면 세 칸에 측면은 한 칸 반의 초가집이다. 한 칸은 부엌이고 가운데 한 칸은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방이 바로 안방이 된다. 박초월의 집은 그 앞에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송흥록의 집과는 역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방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고, 뒤편에도 문을 내었다. 가운에 방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끝 방은 한편에 아궁이를 들였다. 경국 방의 넓이는 정면과 측면 모두 한 칸인 셈이다. 이 비좁은 집에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것이다. 송흥록은 조선조 정조 초기인 1780년경에, 명창 권삼득의 고수인 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생가. 세칸으로 된 초가에서 태어났다.

귀곡성의 대가 가왕 송흥록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를 했다는 송흥록명창. 중고제의 시조인 김성옥과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김성옥이 여산 동굴로 들어가 동굴독공을 하다가 만들어진 진양조를, 송흥록에게 전해주고 찬 굴에서 얻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송흥록은 그 소리를 판소리에 접목을 시켜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조선말기 우리 판소리에 소리의 극치라는 계면조와 진양조가 송흥록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다.

박초월은 이곳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익히고,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익혔다. 김정문은 남원 출신의 명창이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소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긴 명창이다. 송만갑은 송흥록, 그의 동생 송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인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소리꾼의 집안이다.



명창 박초월의 생가. 송흥록명창 생가 앞에 있다.

결국 박초월은 송흥록과 같은 소리의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박초월은 (사) 한국국악협회 초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시대를 거슬려 두 명의 명창이 태어난 이곳. 사람들은 그 내력을 잘 모르고,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를 걱정을 한다.

사는 집이 중요한 것일까? 그 좁은 초가 삼 칸 집에서 일세를 풍미하는 두 명의 명창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우리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운봉을 떠나면서 뒤로 들리는 소리가 발길을 붙들고 있다.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동백 명창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 한 야산에 올라 북을 치면서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라는 말이. 그렇게 전국을 20년이 넘는 세월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제를 알만하니 기운이 달린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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