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참 희한안 일을 자주 보고는 한다. 어떤 때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있다.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어릴 적부터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사회생활에서 문화재는 무엇이며, 우리가 문화재를 왜 보존해야 하는지 정도는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것은 비일비재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문화재를 나무로 두드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발로 차기가 일쑤이다. 목이 달아난 석불이며, 국보나 보물의 벽에 가득한 낙서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것일까?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본질적인 교육도 되어있지 않은 나라

문화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가 왜 보존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말로는 우리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고 잘도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보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우리의 문화재 보호 점수는 빵점이다.

답답한 정도가 아니다. 고작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나타난 행위는 바로 꽁꽁 잠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다고 올바로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숱한 문화재들이 도난을 당한다. 요즈음 TV 광고에 보면 문화재 도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그런 광고를 해야 할 정도로 문화재에 대해 무지한 것이 우리네들이란 이야기다.

왜 기를 쓰고 좋은 학교를 가야만할까? 그러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학원을 몇 군데씩 돌아야 한단다. 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공동체, 우리, 이런 말을 알기나 할까? 우리문화, 우리민족, 우리말, 우리글, 이런 것은 알기나 할까?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작금에 우리는 잊어도 너무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 내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내가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폄하나 훼손이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명문. 기단석에 쓰여진 명문.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고 적었다

여기서 모하는 짓이야!

답사를 하면 여기저기 많이 다닌다.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똑 같은 거리를 걷는다고 해도, 그냥 관람을 하는 사람의 세 배를 더 걸어야 한다. 그만큼 여기저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바쁘게 돌아다니는 날은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14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걷기도 한다. 그만큼 열심을 내지 않으면 문화재 답사는 의미가 없다.

문화재가 꼭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화재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산 속이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있기도 하다. 제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보물 제94호인 사자빈신사지석탑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덕주산성의 문이 보인다. 문을 촬영하려고 위로 올라가 보니, 누각의 문이 닫혀있다. 산성의 문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에 조성된 사사자 상은 내 마리가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안에서 기척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남녀가 둘이 부둥켜안고 뒹굴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순간 화가 치민다. “이 사람들 문화재 안에서 지금 모하는 짓거리야?” 순간 두 사람도 놀랐는가 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보니, 그 안에서 둘이 사랑이라도 나누려고 했는지. 여자가 황급히 옷을 추스르고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가버린다.

마침 밑에는 동행을 한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도 얼굴이 벌겋게 변해 어쩔 줄 모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문화재 안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타일러 보내고 나니 기가 막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상식인지도 모른다.

빈신사지 석탑의 상층 기단 중앙에 있는 비로자나불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일행이 무슨 일인가 묻는다. 여자가 황급히 내려와 차를 몰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를 이야기를 했더니,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만다. 이런 황당한 짓을 한 사람들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TV광고로 아무리 문화유산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를 해보았자, 누가 그것을 눈여겨 볼 것인가? 어릴 적부터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이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 "문화재 답사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답해진다. 문화재 답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문화재를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다니다가 보니 이제는 문화재와 내가 별개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하지만 아직도 어려운 것은 문화재 답사를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질문을 받을 떄다. 사실 난 문화재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전공을 한 우리 음악이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국악이 전공이다. 지금은 국악고등학교와 중학교가 구분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라고 하여서 중, 고 과정 6년제 학교를 다녔기 떄문이다.


문화재 답사 참 힘들다.

전통문화, 문화재, 참 어렵다. 그것을 지킨다는 것도 어렵고, 그것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찾아다니고, 그것을 글로 써야하고. 내가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글로 쓰는 것은 문화재의 면목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 문화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을 때의 느낌을 적는다. 물론 그 중요한 것은 알리지만.

찾아가고, 그것을 자료로 담아내고, 정리를 하고, 글을 쓰고. 남들은 참 쉽게도 글을 쓴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하나를 접할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니 정리를 할 떄마다 난감할 때도 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가. 그저 자료에 있는 그대로를 적는다면 쉬울 텐데, 일일이 느낌을 적는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글이라도 잘 쓴다면 좋으련만, 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더욱 어렵다.


문화재 답사 저는이렇게 합니다. 

1. 정보를 미리 파악한다.

어느 지역에 문화재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정보를 파악한다. 지자체 홈페이지를 들어가 '문화관광'을 찾아보면 그 지역의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다. 그곳에서 내가 찾아볼 문화재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두고, 어디에 있는지 꼼꼼하게 메모를 해둔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가장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문화재를 둘러볼 수 있는지, 동선을 정한다. 그렇게 준비를 하지 않으면 하루에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없기 떄문이다.

2. 안내판을 중요시 한다.

문화재는 모두 안내판이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언제 만든 것인지 등이 안내판에 적혀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문화재의 특징 등도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다. 이런 것을 미리 파악하고 난 뒤, 내가 어떻게 자료화 할지를 정하는 것이다. 안내판을 미리 보지 않는다면,무엇이 중요한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런 경우 자료를 만들려고 보면, 중요한 것을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부분부분 세심하게 살펴본다.

문화재는 어느 시기에 만들었느냐에 따라 그 특징이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쉽게 접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문화재 하나마다 특징이 있고, 그 특징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답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기에 작은 부분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예를 들어 탑이나 부도 등에 조각이 있다면, 그 조각 하나하나를 모두 담아내야만 한다. 탑 하나를 자료로 담아내도 적게는 20여장, 많게는 50여장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

4. 느낌을 메모한다.         
      
어느 문화재를 보던지 첫 느낌이 중요하다. 문화재의 가치는 국보나 보물, 아니면 지방 유형문화재 등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하기 나름이지만 그것이 가치의 척도가 되지는 않는다. 문화재라는 것 하나 만으로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문화재를 처음 접할 때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 그 느낌을 메모해야 한다. 소개를 할 떄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준비를 한다면, 문화재 답사에 맛을 들이게 된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소개하면서 그저 여기저기 나도는 자료를 이용한 글을 써댄다면, 그것이 올바른 문화재 소개일까? 항상 조심스런 마음을 갖는 것은 그런 문화재 소개가 될까봐서다.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언제인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우리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문화재는 우리 것이 아닌, 우리 후손들의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슴 아픈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어느 곳은 안내판이 다 지워져 글을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고, 아예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문화재의 훼손과 온통 문화재에 낙서로 도배를 한 곳들도 보인다. 주변은 잡풀이 우거지고 길이 없어진 곳도 여러 곳 보았다.

이렇게 문화재에 대해 수많은 훼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종교적인 괴리에서 오는 것도 있겠으나 관리 소홀도 묵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란 그것이 어느 부류에 속하든 간에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세계적으로 문화 상품을 개발하여 막대한 소득창출을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다. 그런데 있는 것조차도 이용을 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소중한 보물 앞에 세운 안내비석이 쪼개져 있다.

쪼개진 안내비석, 누구의 소행일까?

구례 연곡사는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국보와 보물을 소유한 사찰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연곡사 답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촬영을 하다가, 보물 제154호인 소요대사부도를 보려고 앞으로 갔다. 대개 문화재에는 안내판 외에 돌로 만든 안내비석을 하나 세워 놓는다. 앞에는 국보나 보물인지 등 문화재의 명칭을 적고, 뒷면에는 국보나 보물 등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이라 적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붉은 글씨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란 생각이 든다.

지방 문화재인 경우에는 전라북도 지정은 뒷면에 당연히 ‘전라북도(全羅北道)’라고 붉은 글씨로 음각을 하고, 경기도에서는 ‘경기도(京畿道)’라고 음각을 해서 세워 놓는다. 물론 설명을 한 안내판은 따로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소요대사 부도 앞에 세운 비석이 동강이가 난체 나뒹굴고 있다. 비석의 아래가 절단이 되어 나뒹굴고 있는 안내비석. 도대체 누가 어떤 것으로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깨져서 땅에 널브러진 비석에는 붉은 글씨로 쓴 ‘대한민국’이란 글씨가 보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민다.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비석을 무슨 이유로 이렇게 동강이를 내었을까? 자빠져 있는 비석의 글씨가 우리 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강 개발을 한다고 소중한 마애불에 구멍을 내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는데 또 이런 참담한 몰골을 보아야만 하다니.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도대체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한 것일까? 자빠져 있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이 단단한 돌이 저절로 쪼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서 있는 부도의 안내비석을 훼손을 할 사람이라면 문화재인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쪼개지고 자빠진 대한민국, 어쩌면 이것이 우리 문화재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 시대에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앉고 반성들을 해보자.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1에 가면 사적 제104호인 황산대첩비지가 있다. 솟을대문으로 마련한 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대첩비가 서 있다. 좌측으로는 사적비가 우측에는 파비각이 보인다. 이 사적지는 고려 말 우왕 6년인 1380년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성계를 대장군으로 한 고려군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를 고려군이 몰아쳐 완전히 섬멸하였다. 이곳에서 승리를 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주 이목대에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를 일으킬 의중을 보였다.


파비각(破碑閣)에서 분노를 느끼다

일본으로서는 이 황산의 대첩비가 상당한 수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이 비를 놓아들 리가 없었던 것. 선조 때 개국시조인 이성계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첩비를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에서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방치가 되어있는 대첩비를 1977년에 수습을 하고 비각을 세웠다.

파괴된 비는 몇 조각이 나 있다. 그리고 비문에 새겨졌던 글은 모두 쪼아 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렇게 소중한 역사의 기록을 망쳐놓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이런 패악을 저지르고서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면서도 이 나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조각이 나버린 황산대첩비. 일제는 비를 이렇게 파괴했다.

울분은 극에 달하고

대첩비지를 나와 담을 끼고 돌아가니 전각이 보인다. 안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고, 그 위는 축대를 쌓았다. 이 전각을 ‘어휘각’이라고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한 후, 다음에 본 석벽에 8원수 4종사관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승전을 적은 비를 모두 쪼아내 무참하게 훼손을 했다.

이 어휘각의 안에 있는 바위벽의 아래편을 보면 글이 써졌을 것 같은 공간이 보인다. 그런데 그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다. 600여년이나 잘 보존이 되어있던 이 글씨를, 1945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훼손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글씨를 모두 쪼아버렸다고 한다.

우리의 승전의 역사를 기록한 대첩비. 그것을 모두 훼손한 일제의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고도 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본. 그러한 나라에 대해 언제나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 도대체 우리 선조들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 황산대첩비지에서 본 파비와 훼파된 성지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수탈해 가고,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책임을 물어야 할 때란 생각이다. 그리고 당당히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요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이 민족의 상처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찾는 이 없는 황산대첩비지를 우리민족의 기개를 찾을 수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또 다른 문화말살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문화블로거. 이름만으로는 참 듣기가 좋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광역적으로 보면 문화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행동이나 말, 생활 등 모두가 다 이 시대의 문화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나누어 말하자면 <풍속>이라고 표현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문화는 일반적으로 동서양을 가르고, 대중적인 요소를 가미한 대중문화로 구분을 짓기도 한다. 대중문화를 세분하면 그 종류를 다 나열하기가 힘들정도로 많겠지만, 쉽게는 문화와 연예를 구분하기도 한다.

문화는 시대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하기에 그 문화적 내용을 파악하면 어느때의 문화인지 구별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갖고 전통문화, 근대문화, 현대문화 식으로 구분을 하기도 한다. 사실 전통문화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정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화를 어느 선까지가 전통문화인가를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다.


난 문화블로거인가?

전화를 한통 받았다. 반가운 목소리다. 사무실에서 아침부터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보면, 짬을 내어 블로그에 글을 읽기도 버거운 것이 요즘 내생활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 일찍 시간과 밤 늦은 시간 밖에는 여유가 없다. 조금 시간적 여유라도 생기면 보따리를 챙겨들고 답사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받은 전화는 반갑기도 하다. 잠시라도 여유를 누릴 수 있으니까.

"잘 계셨어요?"
"그래 덕분에 잘 있다. 너는 어떠냐 요즈음"
"예, 저도 잘 있습니다. 요즘 형님 블로그에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고맙다 그렇게 글까지 읽어주고"
"그런데 말이죠. 형님도 이제 그 힘든 답사를 해야하는 전통문화 블로거 그만하시고, 남들처럼 편하게 하시지 그러세요. 그렇게 힘들여 다녀도 보는 사람도 별로 없든데요"
"알았다. 생각해 보자"

아우녀석은 힘들여 답사를 다니고, 그것을 글로 올리는 작업의 어려움을 안다. 하기에 이젠 좀 편하게 작업을 하라는 이야기다. 그 말은 사실 무척이나 고마워해야 할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언짢을까? 저녀석이 이젠 내가 나이가 먹어 걷기도 힘들겠단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바쁜 사람이 틈이나면 바로 뛰쳐나가느라,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니 그런 것이 안타까워서일까? 별 생각이 다 든다.



난 끝까지 전통문화 블로거이고 싶다

힘들다. 답사를 나가기도 힘이 버겁고, 밤 늦은 시간에 글을 쓴다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다. 아니다, 아는것이 아니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접고 편안히 앉아서 글이나 쓰라니. 그럼 도대체 무슨 글을 쓰라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쓸 것이 없다. 남들처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전공이다'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전통문화일 수 밖에 없다. 전통문화도 그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수많은 문화 중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문화재에 느낌을 적어 올리는 것이다.

가끔은 사람사는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그것도 역시 답사를 다니면서 얻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굳이 구분을 하기위해 사람사는 모습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것도 풍속이 아니든가? 그래서 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티스토리를 개설할 때도 마음속으로 작정을 했다.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 문화재에 대해 이해를 해줄 사람만 있다면, 난 그를 위해 글을 쓰겠다고 말이다.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만큼 행복은 없다. 땀을 흘리고 몇 시간씩 산을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마애불. 그러나 글 하나로 그 노력은 끝이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길을 맥없이 몇 시간을 터벅이면서 찾아 낸 정자 하나. 그것도 글 하나면 끝이다. 눈길에 미끌어지면서 겨우 만나본 석탑 한 기. 눈이 여기저기 가리고있는 모습을 찍어 올리고나면 끝이다.

그런 쉽지 않은 답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전통문화, 특히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블로거이다. 다행히 몇 분 되지는 않지만 그 수고를 함께하는 이웃블로거들이 있어 행복하다. 그것만으로도 답사를 하는 길이 수월해지니 말이다. 오늘 낮 아우녀석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글을 쓸수 있는 한, 답사를 다닐 수 있는 한은, 영원한 문화블로거로 남고 싶다. 비록 단 한 사람이 찾아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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