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9월 16일) 오후에 구례 화엄사를 찾아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참 낯 뜨거운 일을 당하고 말았다. 구례구역은 구례에서 벗어난 순천에 자리를 한다. 이 역은 구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어 ‘구례구역’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전남 순천시 황전면 선변리에 소재한다. 구례읍내에서는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차를 타려고 가보니 내가 타야하는 열차가 기관차 고장으로 인해 30분이나 연착을 한단다. 그렇다고 딴 방법이 없으니 역사 앞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역 앞을 보니 구례군 관광안내도가 보인다. 어디를 가나 역 앞에는 이런 지도가 붙어있다. 그 지역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기 위해서다.

구례구역 앞에 서 있는 구례군 관광안내도

“정신 빠진 사람들, 얼마나 오래 방치한거야.”

그런데 이 지도를 보다가 이상한 점이 있다. 아마 딴 사람들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부분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문화재를 먼저 찾아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같은 문화재가 두 곳에 있다고 나와 있다. 같은 논곡리 삼층석탑이 두 곳에 있다는 것이다. 지도를 보니 그나마 한 곳은 석탑이 분명한데, 한 곳은 신도비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삼층석탑도 ‘삼층’인지 ‘상층’인지 구별이 안 갈만한 글씨이다.

지도의 아래에 있는 삼층석탑은 구례읍 논곡리에 소재한 보물 제509호 삼층석탑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도 위편에 있는 논곡리 삼층석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산동면 이평리에 소재한 보물 제584호인 윤문효공 신도비이다. 그림도 신도비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논곡리 삼층석탑이라고 쓰여 있다. 이건 도대체 어찌 설명을 해야만 할까?



관광안내판에는 논곡리 삼층석탑이 두 곳에 있다고 그려져 있다.

구례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특히 가을이 되면 열차를 이용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그들은 관광지도를 보고 갈 곳을 정하기도 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역 앞에 있는 지도를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간판을 언제 세운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담당자가 한 번도 이 관광 안내판을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발 문화재 푸대접 그만하세요. 부탁합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그동안 이런 것에 대해서 지적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지나는 사람들이야 관광을 목적으로 왔으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적어도 구례군의 관광이나 문화 담당자들은 이 지도를 한 번 쯤은 살펴보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렇게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면,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지도의 아래편에 있는 삼층석탑은 구례읍 논곡리에 소재한 보물 제509호 삼층석탑이다.(사진 위) 그리고 위에 있는 논곡리 삼층석탑은 산동면 이평리에 소재한 보물 제584호인 윤문효공 신도비이다(아래). / 사진출처 :구례군


우리 땅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 지역에 있는 보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문화재는 또 얼마나 방치되고 있을까?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찾아다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저 할 말이 없다. 행여 아이들이라도 볼까봐 주변부터 살피는 내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안내판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구례군은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너무 많은 문화재가 있어서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인지. 적어도 이 안내판이 설치된 이후에 한번이라도 담당자가 나와 보았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다음 스카이뷰에서 찾아보았다. 위는 논곡리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아래 붉은 원은 삼층석탑, 위 하늘색 원은 보물 제584호인 윤문효공 신도비가 서 있는 곳이다.


제발 부탁합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해 신경을 조금만 더 써주세요. 우리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할, 후손들의 것입니다. 이 안내판을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하고 싶다. ‘정말로 부끄럽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데이터베이스[database]란 일반적으로 ‘DB’라고 약자로 많이 적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자료 기지 또는 자료틀. 보통 DB라고 약칭한다. 동시에 복수의 적용 업무를 지원할 수 있도록 복수 이용자의 요구에 호응해서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저장, 공급하기 위해 일정한 구조에 따라서 편성된 데이터의 집합이다. 기업이나 조직체의 활동에 필요 불가결한 자원이 되는 정보에 대한 다양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를 수집, 관리하여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다음 백과사전)

데이터베이스란 언제나 그 자료에 대한 가장 최근 의 것, 혹은 가장 정확한 것이라야 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관계부처에서 제대로 된 사진하나를 데이터로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까?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 검색. 강경 미내다리

데이터베이스는 관리가 잘 되고 있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다음 뷰에 글을 송고한다. 문화재라는 특성상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화와 관련된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찾아보는 자료는 문화재청, 해당 지자체 사이트, 그리고 현장의 안내판 등이다. 그리고 혹 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운이 좋을 때는 근처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고 챙겨온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소개나 해당 지자체의 관련 사이트, 그리도 현장의 안내판 등도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속한다. 그런데 다니면서 보면, 잘못된 자료가 너무 많다는데 대해 놀랍기만 하다. 적어도 한 나라의 문화재를 설명하는 자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다니면서 잘못 된 안내판 등을 수도 없이 관련 단체에 전화를 해 시정을 요구하고는 했다. 그동안 꽤 많은 자료들을 고치기도 했지만, 매번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도 번거롭다. 또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가끔 본의 아니게 말투가 거칠어지기도 하고, 말끝이 올라가기도 하는 일이 있다 보니 그도 반가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 소개된 미내다리 사진

최고기관인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 관리 꼼꼼히 살펴야

오늘 강경 미내다리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조사를 하다가, 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미내다리의 설명을 보았다. 물론 미내다리의 설명으로 본다면 가장 신빙성 있는 곳이 문화재청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유산을 총괄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문화재청에서 일일이 관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보나 보물, 중요민속자료, 중요무형문화재, 사적, 천연기념물 등 그중 가치가 중요한 것은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를 하고, 지방의 유무형문화재나 기념물 등은 광역자치단체에서 관리를 한다.

그렇다고 지자체에서 관리를 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란 그것이 어떤 분류에 속해있던지 모두가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내다리 자료를 보니 사진이 이상하다.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사진은 복원이 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논산시청을 들어가 보았다. 현재의 미내다리 모습이다.

논산시청의 미내다리에 소개된 사진

그렇다면 문화재청은 이 미내다리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놓아두어야만 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 자료도 소중하겠지만 복원 전의 모습과 복원 후의 모습이 있었다면, 더 훌륭한 데이터베이스였을 것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최고 기관의 데이터베이스가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면,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가도 좋을만한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가는 곳이다. 더욱 요즈음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전국을 수많은 블로거들이 찾아다니면서 답사하고 글을 올리고 있다. 꼭 블로거가 아니라고 해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재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청도 항상 새로운 모습의 자료를 구축하고 그것을 올려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온전한 데이터베이스의 관리라는 생각이다.

함양군처럼 장자와 누각이 많은 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보아도 한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누각이다.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보다 바람직한 마을은 없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이번 답사 길에서는 두 곳의 누각을 돌아보았다.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서 있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학사루와,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소재한 제92호인 광풍루이다. 두 곳의 누각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모두가 관아에 속해 있던 건조물로 보인다. 이 중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광풍루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학사루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시,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은 곳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학사루의 건축 년대를 신라 때로 본다. 학사루의 서쪽에 객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이곳 동헌의 부속건물이지 않았을까 추론도 해본다. 학사루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영남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4년인 1498에 무오사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사루는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현재의 학사루는 320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학사루는 2층 누각기둥에 주련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학사루. 비가 오는데도 답사를 강행하였다.

정여창이 명칭을 지은 광풍루

광풍루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서 있다. 광풍루의 원 이름은 선화루였다. 선화루, 선화당이란 명칭은 동헌의 누각이나 전각에 많이 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누각은 동헌의 건물이었다고 본다. 광풍루는 조선조 태종 12년인 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 전우가 창건하여 한다.

그 후 조선 세종7년인 1425년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조 성종 25년인 1494년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 하였다. 그 뒤에도 소실과 복원 등을 거친 광풍루의 현 건물은, 숙종 9년인 1683년 현감 장세남이 중건한 건물로 340년 정도의 세월을 지낸 누각이다.



광풍루. 금호강가에 서 있는 운치있는 누각이다.

꽁꽁 닫아라, 머리카락 보일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꽁꽁 닫힌 문이다.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 등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문화재들이 문을 잠그고 있다. 특히 이런 문을 닫아놓는 현상은 전각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문을 잠그는 것은 바로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학사루 계단 위 닫힌 문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어딜가나 낙서로 몸살을 잃는다. 그래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학사루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는 잠을통이 걸려있다.

하지만 문을 닫아 걸어놓는다고 훼손이 되지 않을까? 요즈음 들어 각 지자체들마다 정자나 누각 등을 개방을 한다. 마루를 깨끗이 손질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으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독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누각이나 정자 등이 바람이 잘 통하게 구조가 되어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인 촉석루 등도 모두 개방을 하고 있다.


광풍루에도 계단에 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문 밖에서 본 이층

하지만 함양군의 두 곳 누각은 모두 잠가놓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잠을 통을 잠가 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문화재 보존이 잘 되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더니, 더 조심스럽고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풍루 이층 누각은 잠겨 있는데 저 소주병은 신선이 내려와 마시고 갔을까?

가는 곳마다 잠겨있는 누각.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못 들어갈까? 광풍루 이층 누각 마루에 소주병을 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덧없는 관리인가를 묻고 싶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면, 저렇게 소주병이 그곳에 있었을까?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이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하는 이 문화유산은 문화재청이 개화기인 1876년 무렵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조형된 건축물, 산업물, 예술품 등을 포괄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했다. 이 등록문화재는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와 광복 당시 등의 연관성을 지닌 것들 중,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여 보존하자는데 있다.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중앙동 일대를 ‘소주가’라고 부른다. 중국인 거리라는 뜻이다. 이 중국인 거리는 사적 제288호인 전주 전동성당을 건축할 때, 중국에서 들어 온 100여명의 중국인 벽돌공들이 살게 되면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주 다가동에 있는 중국인거리. 그러나 이제는 몇 집만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100년이 된 전통적 거리

전동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중국인 거리는, 이제는 몇 집 남지 않은 중국인들이 살아갈 뿐이다.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다.

이 때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명이 직접 구워서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상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신흥상회와 전주화교소학교 등 몇 집이 남아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던 중국인 거리는 이제 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 포목점 건물

이 중국인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포목점이 있다. 4대 째 포목점을 열었다는 이 집은, 완산구 다가동 1가 28번지에 있는 왕국민의 소유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1920년대에 1층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전주 전동성당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정착한 벽돌공들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중국 상하이의 전통 비단 상가 건물의 형태를 따랐다고 전한다.

옆에는 같은 형태로 지어진 중국화교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당시 화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건물의 주인은 나란히 붙은 신흥상회를 운영하고 있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에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자리를 하고 있다. 건물이 지어진지 90년이 지나 건물은 낡고 퇴락했으며,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샌다고 현재 이 건물에 세입자들은 이야기를 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4대째 중국인이 포목점을 이어가던 집이었으나,
현재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세들어 있다.

지정만 해 놓으면 당상인가?

이 집이 등록문화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벽에 붙은 등록문화재를 알리는 작은 동판 하나이다. 주변 어디에도 이 문화재에 대해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지를 않는다. 명색이 등록문화재라고 지정을 했으면서도, 안내판 하나 없이 서 있는 건물.




중국 상하이에 있는 포목점의 건물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물이다. 건축양식이 우리와는 달라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이발소 앞 벽면에는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동판이 부착이 되어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창문을 모두 아치형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문은 쇠창살을 사용했으며, 건물 전면 상단에는 둥그런 원과 꽃그림을 새겨 넣었다. 붉은 색을 칠한 벽돌이 깨어진 틈으로 보니 안에도 붉은 색이다. 그러나 그 점질이 약해 보인다.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지만 보수를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 불편하다고 한다. 4대를 포목점으로 운영을 한 이 등록문화재는 이제 건물의 외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건물이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로 인정을 하여 지정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보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고, 비가 새고 헐어지는 부분은 보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정만 해놓고 나 몰라라 하는 식의 보존방침은 차라리 지정을 안 함만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자체가 망가져가고 있다. 비가 오면 천정이 샌다고 한다. 보수신청을 했으나
이루어지지도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문화재 앞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다. 

처음으로 블로그를 접한 것은 2005년인가 보다. 그 전에는 플래닛이라는 것을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가 블로그를 하게 되고, 그 재미에 한참이나 빠져 있었다. 아마 블로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접하게 되고, 더 많은 지식을 얻기 때문이었나 보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 아픈 일도 많았다. 그러나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다음뷰에 송고를 하면서(그 때는 다음 뉴스였었던 것 같다) 쌓여가는 자료들을 보고, 그나마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2006년 3월에 19번 째로 황금펜촉을 달았다. 

블로그를 접고 난 후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에서는 황금펜촉이라는 것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지금도 베스트 블로거라는 황금펜촉이 있지만 당시의 황금펜촉은 남달랐다. 그만큼 황금펜촉 달기가 어려웠다는 생각이다. 2005년 12월부터 베스트 블로거인 황금펜촉을 단 블로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내가 2006년 3월 마지막 주에 달았으니 당시 베스트 블로거인
황금펜촉을 단 블로거로서는 19번째로 황금펜촉을 단 셈이다.

지금 보니 428명의 베스트 블로거들이 있으니, 내 뒤로 꼭 400명이 더 황금펜촉을 단 셈이다. 당시에는 베스트 블로거들의 글도 많이 올라왔지만. 오프라인에서의 블로거들도 상당히 친근하게 지내고는 했다. 물론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 무슨 일이 있으면 블로거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흔쾌히 함께 해주고는 했던 것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그렇게 열심이던 블로그를 하루아침에 삭제를 해야 하는 사건이 생겼다. 주위에서는 삭제는 말고 중단만 하라고 권유를 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완전 삭제’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에도 다음블로그와 티스토리에서 모두 100대 블로거 중에 포함도 되었고, 블로거상 후보에 까지 오르기도 했으니, 삭제를 하면서도 그 아픈 마음을 누가 알고나 있었을까?

이제 두 번째 황금펜촉에 도전한다.

2008년 초에 블로그를 삭제를 하였으니 이제 만 2년이 지났다. 그때만 해도 50대라고 박박 우기고 살았는데, 이제는 환갑을 넘어버렸다. 만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블로그를 시작한다. 물론 블로그는 삭제를 시켰지만 아이디를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도 엄연한 황금펜촉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그 황금펜촉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블로거들은 왜 그 아이디를 안 쓰느냐고 성화다. 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시작하려고 한다. 늘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모처럼 돌아 온 블로그의 세계가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다양하던 다음뷰의 많은 글들이 한편으로 치우쳐버린 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써오던, 그리고 앞으로 써가야 할 문화재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몇 사람이 읽어준다고 해도 좋다.

아직도 블로그를 운영하던 아이디는 황금펜촉을 달고 있다.

환갑이 지나서 다시 시작하는 블로그. 그리고 두 번째 도전하는 황금펜촉. 나에게는 이 두 가지만 있어도 즐겁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온라인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황금펜촉을 다는 날은, 코가 삐뚤어지게 막걸리를 마시겠다고 미리 작정도 해본다. 늘 도전하는 삶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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