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들이 다 무엇이냐고요? 카메라입니다. 편하게 휴대를 하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입니다. 물론 고가의 카메라는 아닙니다. 이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 100만원을 조금 넘는 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카메라와 렌즈들은, 내 분신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벌써 오래된 것은 12년 째 되었으니까요.

지금 다 사용할 수 있느냐고요? 아닙니다. 하나도 사용할 수 없는 폐품들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버리지를 못하고 갖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참 슬퍼지네요. 일 년 열두 달, 제 몸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녀석들이기 때문이죠. 버리려고 생각하면, 제 눈과 몸의 일부를 버리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버리지를 못하고 있죠.


20년 넘은 문화재 답사길, 참 험했다

벌써 문화재답사를 시작한지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올 해 나이 62세이니, 내 인생의 3분의 1을 길에서 보낸 셈이다. 남들은 그 소중한 시간을 길에서 보냈다고 빈정대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그 길에서 보낸 20년 세월이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머니에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안절부절 좌불안석이 된다. 얼른 문화재를 만나러 나가고 싶어서다.

산으로 들로, 때로는 험한 꼴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 겨울에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매다가 얼어 죽을 뻔도 했다. 장마철에 산속을 뒤지다가 보니, 냇물이 불어 겨우 빠져나오기도 일쑤였다. 그런 문화재답사를 왜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물음에 내 대답은 한결 같다. ‘나도 모르지’



지금 생각하면 그 20년이 넘는 세월이, 참 험한 답사 길이었다는 생각이다. 미끄러지고 구르고,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보니 작은 카메라일망정 성할 리가 없다. 사람과 함께 깨어지고 부수어지기가 일쑤다. 아마도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이전, 아날로그 카메라까지 합친다면 이보다 몇 배는 될 것 같다.

오늘 보니 참 고맙다

이 카메라 중에는 내가 구입을 한 것도 있지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 답사를 하는 나를 보고 선물을 해준 것도 있다. 지금은 그래도 좋은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렇게 소형인 카메라가 나에게는 더 없이 반갑다. 산을 오를 때도 무겁지 않아서 좋고, 모두가 동영상까지 촬영을 할 수 있어서이다.

지금이야 동영상을 찍지 못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영상을 더 많이 찍었다. 아무래도 사진으로는 문화재를 세세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부족한 듯해서이다. 동영상을 이용하면 세세한 부분까지도 촬영을 해서 보여줄 수가 있으니,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사용하는 카메라와 함께, 소형 카메라 한 대를 더 지참하고는 했다.



그렇게 답사를 하면서 망가진 카메라들이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정리를 하다가 보니. 가방 안에 가득한 고장 난 카메라들을 보면서 지난날을 생각해 본다. 참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다는 것에 대해, 새삼 이 고장 난 카메라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수고했다’고 고별사를 남기고 보내주어야겠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아픈 기억들이 또 살아날 수도 있으니.


(알림)이 글은 2011년 2월에 발행했던 글입니다. 지난 글을 재발행을 하는 것은 문화재를 늘 소개하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재발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점 양해를 바랍니다  

 

봄이 되면 길을 떠나고 싶다. 가족이 함께라도 좋고, 연인사이라도 좋다. 아니면 혼자 간단한 걸망 하나를 둘러매고 떠나는 길도 바람직하다. 어디로 떠나는 것이 좋을까? 이 봄에는 옛 함성이 들리는 성곽순례를 추천하고 싶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족들이 함께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만큼 우리생활이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생활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화재답사를 하던 중 성곽답사를 하다가 보면, 운동을 하는 인근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도 건강을 위해서 산성주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걸음을 빨리해 운동을 하기도 한다.

충청수영성(2004, 2, 14 답사) 

 

건강에 도움을 주는 산성, 이래서 좋다

산성은 대개 산에 위치한다. 요즈음은 산성 입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 그런 곳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는 한다. 하지만 산성이라는 곳이 얼마만큼은 걸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람들에게 운동량을 요구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성이다.

산성을 오르는 길은 대개 숲이 우거져있다. 또한 산성 주변은 마을이 있기보다는 공기가 좋은 곳에 위치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산성을 한 바퀴 돌다가보면,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 때문이란 생각이다. 사람들이 흔히 찾아가는 곳이 아닌 산성중에서, 이 봄에 가족들과 함께 가볼만한 곳, 어디가 좋을까?

물론 이 열 곳 말고도 수많은 산성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돌아본 산성이 다가 아니기에, 그 중에서 산책과 주변을 돌아보기에 적당한 곳을 정리해 본다.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산성을 걷다가 보면,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되고 건강에도 도움을 주니 좋은 여행이란 생각이다. 거기다가 가족들의 유대감까지 생겨난다면, 일석삼조란 생각이다.

문화재답사가가 추천하는 가볼만한 성곽 열 곳

 

남원 교룡산성교룡산성(2010, 9, 18 답사)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16-2에 소재하는 교룡산성.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둘레가 3.1km에 달하는 이 산성은 아직 완전히 복원이 되지는 않았다. 산성 바로 입구까지 차가 들어 갈 수가 있지만, 밑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성 동쪽에 계곡이 있어 그곳에 반월로 된 출입구를 두었다.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장되는 교룡산성은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있어 좋은 곳이다.

교룡산성이 자리한 남원은 볼거리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인근에는 광한루와 남원성 등이 자리하고 있고, 교룡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동학과 관련된 유적지도 보인다. 성 안에는 선국사 등 고찰이 있어, 그 길을 오르다가 보면 숲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다. 운이 좋은 사람은 봄기운에 코를 간질이는 산더덕의 향기를 따라, 자연산 더덕을 채취할 수 있기도 한 곳이다.


단양 적성단양 적성(2008, 8, 24 답사)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에 소재한 사적 제265호인 적성. 성곽 안에는 국보 제198호인 신라적성비가 있다. 적성은 ‘하늘아래 길게 누운 성’이라는 표현들을 한다.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 휴게소에서 바라보면 산허리를 감고 쌓은 적성이 보인다, 신라 진흥왕 때 축성된 적성은 길이가 932m에 달한다.

적성은 단성면을 통해 들어가기 보다는, 단양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성으로 오르는 것이 편하다. 단양휴게소에서 적성을 오를 수 있는 문이 나 있다. 적성은 오르는 길은 숲이 없어 햇볕에 노출이 되기도 하지만, 성 위를 오르면 세상이 발아래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 위에 올라 성벽을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 산성을 왜 쌓았는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늘에 내가 닿고 그 아래 세상이 있어, 난 적성을 즐겨 오른다.’


무주 적상산성무주 적상산성(2009, 11, 14 답사)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은 적상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적상산성은 북창리, 포내리, 괴목리, 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있는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절벽을 이용해서 돌로 축성한 대표적인 산성이다. 사실 적상산성은 봄보다 가을이 더 아름답다는 곳이기도 하다. 산에 있는 자연적인 돌을 이용해 성을 쌓은 적산산성은, 과거여행을 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다.

적산산성 안에는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고, 새롭게 복원을 한 사고가 있다. 사고 안에는 당시의 모습과 사고의 내력 등에 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찾아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장소로는 적함한 곳이다. 더욱 앞으로는 양수발전소 상부댐과 전망대 등이 있어서 좋다.


문경 고모산성문경 고모산성(2009, 3, 22 답사)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에 자리한 포곡식 산성인 고모산성. 고모산성은 5세기경 신라가 북진을 하면서 축조한 최초이자 최대의 산성이다. 고모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전지역에 속해 있어, 늘 격전을 치렀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의 전투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거쳐 의병들의 주둔지 등으로 이용이 되었다.

고모산성은 역사적으로 전투를 가장 빈번하게 치룬 산성이기도 하다. 아마도 고모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일 것이다. 고모산성의 주변에는 조선시대의 관성인 석현성과 명승 제31호인 문경토끼비리 옛길이 있다. 또한 신라고분군, 성황당, 주막거리등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있어, 가족들과 함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보은 삼년산성보은 삼년산성(2010, 10, 3 답사)

3년에 걸쳐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한다.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1에 소재한 사적 제235호이다. 입구 가까이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고, 산성을 오르는 길이 그리 멀지가 않다, 하지만 이 삼년산성은 둘레가 1,800m나 된다. 지금은 성안 길이 이어져, 산성을 한 바퀴 이어서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벌써 1,500년이 지난 고성이다. 아직도 복원을 계속하고 있으나, 중간에 보면 옛 성곽의 속 모습까지 볼 수가 있다. 삼년산성은 한 바퀴 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주말에 가족들이 함께 걷기에는 가장 적당한 거리일 듯하다. 천 년 전 과거로 회귀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이다.


여주 파사성여주 파사성(2009, 10, 18 답사)


사적 제251호인 파사성.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파사산 정상에 쌓은 산성이다. 남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새로이 개축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복원이 되지는 않았지만, 남한강을 볼 수 있는 곳은 복원이 되어서, 주말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막국수 촌에 차를 대고, 천천히 걸어 오르면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파사성 위에 오르면 저 멀리 구불거리며 흐르고 있는 남한강의 모습이, 옛 이야기라도 들려줄 듯하다. 주변에는 마애불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함께 답사를 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성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온 후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은, 성을 돈 후의 허기짐과 갈증을 풀어주기에 적당하다.

그 외 네 곳

충청 수영성 사적 제501호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사진은 위에)

안성 죽주산성 경기도기념물 제69호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2008, 12, 2 답사)

제천 덕주산성 충북기념물 제35호 제천시 한수면(2009, 2, 28 답사)

하남 이성산성 사적 제422호 하남시 춘궁동 산36 일원(2011, 1, 3 답사)

 

 

신묘년 새해가 밝으면서 고민이 생겼다. 바로 티스토리 운영에 관한 일 때문이다. 그동안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나름 열심을 내었다. 그런데 그 열심히 점점 도를 지나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전날 정리한 글을 다음 뷰로 송고를 하고, 그 다음에 즐겨찾기를 한 블로그를 찾아다니면서 추천을 하고 댓글을 단다.


낮에도 잠시 틈을 내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저녁에 역시 블로그를 찾아다니면서, 추천을 하고 댓글을 달다가 보면 하루에 4~5시간을 매달려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한계에 부딪친다는 생각이 든다. 체력도 문제지만 일일이 문화재를 답사하여 글을 적는 것도 버거운 데, 거기다가 하루에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하다가 보면 내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댓글 없는 블로그 운영, 소통이 안되는 것일까?

  

몇 번인가 댓글을 막아놓았다. 나도 찾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댓글을 막아 놓으면, 그날 방문객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포스팅을 하는 나로서는, 그런 시간이 제일 걱정이다. 글을 올리는 것이야 정리를 하여 예약송고를 할 수도 있지만, 댓글은 일일이 찾아다녀야만 한다.


그런 댓글 달기가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열심을 내다가 보니 체력도 체력이지만, 수많은 시간을 블로그에 매달려 있어야만 한다. 하는 일이 머리를 많이 써야하는 일인데, 이렇게 블로그 운영에 오랜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하기에 포스팅 자체를 자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많은 분들의 걱정에도 대안은 없었다.


글을 올리지 않으니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한다. 그렇게 서로간의 소통을 하고, 안부를 걱정하는 것이 블로그의 운영의 묘이기 때문이다. 그런 서로간의 소통은 ‘댓글’이라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안부 글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댓글을 달 시간을 아껴야만 하는 나로서는, 불로그 운영에 대한 획기적인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수도 없이 생각을 해보지만, 댓글이 없는 소통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렇게 운영을 해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작정 방치를 할 수만도 없는 일. 고민 끝에 결정을 한다. 아무리 대안이 없다고 해도, 그저 꿋꿋이 문화재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등록문화재 부여 반교마을 옛 담장

순수한 문화재 소개로 이어가고 싶다.


물론 추천이야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충실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댓글을 다는 그 많은 시간이 나에게는 버겁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댓글은 막고 문화재 소개를 하는 글만을 올려야겠다고 생각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올리는 이유는, 바로 우리 문화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굳이 댓글 때문에 글을 막아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하루에 단 한 사람이 들어와 내 글을 본다고 해도, 그저 묵묵히 우리 문화재를 소개할 생각이다. 물론 댓글을 받지도 못하고, 찾아가서 댓글을 달지도 못한다. 이런 점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방법이 없다. 그저 지금까지 해오던 문화재 소개만을 하는 수밖에.


이제 2010년이 4일 남았다. 올 일 년 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들고 온 자료도 상당하다. 아마 전체적으로 돌아다닌 거리를 따지자면, 서울서 부산거리를 50여 번 정도를 왕복을 했을 정도의 거리를 돌아다닌 것만 같다. 그 많은 여정에서 만나 본 문화재만 해도 상당하다.

글 제목에 ‘얼마나 많은 소득을 올렸나?’라고 하니, 남들은 수입으로 알고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닌, 수많은 문화재를 말하는 것이다. 일 년 동안 어림잡아 4~500점 정도는 만나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답사한다. 그런 답사가 한 달에 두 세 번씩 일 년 동안 30회 정도를 나가 돌아다녔으니, 어림잡아도 500점 정도는 될 것 같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 예천 병암정

늘어나는 자료CD, 그동안 다닌 족적인데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자료를 담아 놓은 CD가 2,000장이 넘을 듯하다. 이제는 자료 정리를 더 말끔하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외장 하드를 사서 지역별과 종류별로 구분을 해 담아 놓아야 할 것만 같다. CD라는 것이 영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야만 안심이 될 것만 같아서이다.

만 2년을 티스토리를 접었다가 다시 시작을 한 것이 올 해 8월이다. 2010년 8월 2일 첫 글을 다음 뷰로 송고를 하고 난 후 270개의 글을 썼다. 첫 글은 ‘금강가의 아름다운 정자 만하루와 연지 ’라는 글을 송고했는데, 지금 보니 추천이 43에, 단 한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의 주인공이 바로 ‘친구 세라’ 님이다.

공주 공산성 안에 자리한 만하루와 연지

그리고 5개월 동안 270개의 글을 올렸으니, 적은 글은 아니다. 결국은 5개월 동안 250 점이 넘는 문화재를 답사를 했다는 것이니. 올 일 년 500점 정도의 문화재 답사를 했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 많은 문화재를 만나보면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나는 문화재를 보면서 눈물도 적잖이 흘린 듯하다.

2010년 한 해, 참 많이도 울었다.

길을 나서 만나는 문화재들은 다양하다. 국보서부터 보물, 사적, 중요민속자료, 등록문화재자료, 유형문화재, 민속자료, 거기다가 비지정문화재까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들을 접할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 문화재들의 현실을 보면서, 참 많이도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훼파된 문화재의 몰골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보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보물 연곡사 동부도비

티스토리에 송고를 하지 않을 때도 답사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꽃이 피는 봄부터 시작해, 무더위가 기승을 떠는 뙤약볕 아래서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갈 길의 시간을 못 맞추어, 몇 시간을 걷기도 했다. 앞이 안보이게 눈이 날리는 바람에 길을 잊어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답사를 하면서 일어난 일들이다.

사진 한 장한장이 소중한 까락은 바로 그런 고통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진 안에 소중한 문화재의 정신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예혼(藝魂)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 년 동안 적어 온 글을 열어보면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있어, 2011년을 걸어야 할 힘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중요민속자료 함양 일두 정여창 가옥과 천성산 홍룡폭포

답사를 하면서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분들. 신묘년에는 그런 분들은 더 많이 만나게 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 년간 그래도 어쭙잖은 글을 보느라 말없이 들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나를 버티게 한 진정한 힘은 바로 그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옛 고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인 것 같다.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소재한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은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에 무덤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덤을 원래의 모습대로 폐쇄를 해놓아 안을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앞에 그려져 있는 자료를 통해 무덤 속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고려시대의 고분은 산등성이에 자리를 하고 있는데, 무덤 한 기만이 자리를 할 수 있는 좁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양 옆으로는 급한 경사로 계곡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적으로 이런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묘가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을 마련한 횡혈식석실묘이다.



고려시대의 고분 둔마리 묘

둔마리묘는 마을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한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10여분 정도를 계곡을 끼고 걸어가면 비탈진 등성이에 묘가 몇 기 보인다. 주변에 있는 묘들은 모두 민묘라고 한다. 네모나게 판석으로 석실을 두른 묘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문화재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석실 묘 한 기를 사적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둔마리 고분을 찾았을 때는 답사를 온 사람들이 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실은 네모난 판석으로 주변을 두르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형태이다. 흙 속으로 손가락을 조금 밀어 넣어보니, 흙으로 덮은 봉분 안에도 판석으로 덮여 있다. 주변과 덮개를 모두 판석으로 처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덤 안에는 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무덤 안에 그려진 채색의 벽화는 묘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참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안 그림을 묘 앞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묘는 이중의 무덤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서쪽 돌방에는 한 개의 나무관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서쪽 돌방에는 이미 사용을 했고, 동쪽의 돌방은 배후자를 모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쪽 돌방의 석실 벽은 모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흑,녹, 갈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서쪽 돌방의 서쪽 벽에는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그려져 있다고 한다. 벽화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으로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적 요소가 가미 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에 보이는 그림으로 생각을 해보다.

무덤 앞에 세운 안내판에 그려진 벽화그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는 그림을 찬찬히 훑어본다. 이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종교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긴 장죽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다. 왼손은 머리 위로 치켜 올려 그릇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안에는 과일 같은 것이 들어있다.

벽화를 사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그림의 형태로 보면 비천인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고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면, 악기를 연주하고 한 손에 공양물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라면 단순히 남녀의 그림이 아니라 비천인을 그린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발밑에 그려진 뭉실한 것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선녀들의 그림이 있었다는 것도 이 그림이 비천인일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그저 안을 볼 수 없다는 갓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폐쇄를 시켜놓았다는 것에는 찬성이다. 고분 뒤로 돌아가 앞을 내다본다. 훤히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이 아름답다. 영원히 머무는 유택이라 했던가? 그 안에서 천인들의 음악을 듣고 저 건너 피안의 세계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둔마리 고분 앞에 서 있는 석인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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