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 많은 곳을 다니고 직장에 매달린 사람이 밤에 글까지 쓴다고 하더니 일이 터졌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블질을 쉴 수가 없는 것은, 하나의 문화재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데, 과연 그 문화재 사랑은 얼마만한 효과를 얻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블로그 한편에 <인기글 위젯>을 달았다. 그런데 참 마음이 씁쓸하다. 정작 문화재 소개를 전문으로 하는 블로거는 맞는데, 인기글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화재에 대한 글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보지만 문화재에 대한 글이 없다. 이 정도되면 문화재는 역시 찬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긴 요즈음 사람들 문화재에 대해 무슨 관심이 있으랴. 그저 벗고, 가슴이 절반 쯤 보이고, 배꼽 들어내고, 장딴지 보이고, 흔들어 대고, 빨아대는 것에나 관심이 있지.

그 다음 페이지를 한 번 넘겨본다. 그 끝에 하나가 달랑 보인다. 결국 문화재 블로기의 치욕이란 생각이다. 얼마나 감칠 맛 나게 글을 쓰지 못했으면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 것일까?

 


이래 갖고 무슨 문화재 블로거라고 떠들고 다닐 수 있을까? 이제는 생각을 좀 종리를 해야할 듯하다. 죽어라 하고 갈겨대 보았자, 별 관심들이 없는 것을, 몸 망가져 가면서 기를 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3일이나 들락거리며 통증을 참아가면서도 글을 써 보지만, 이제는 좀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것들이 더 마음이 아프다. 정말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욕이라도 신나게 해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중단했단 블질을 다시 시작하면서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서를 했으니 참아야지.     

문화재란 참 기묘한 것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문화재를 답사할 때는, 가급적이면 철마다 한 번씩 찾아간다. 물론 일부러 철마다 찾아가는 곳도 있으나, 대개는 그 지역을 지나칠 때 들려가는 경우가 많다. 10월 29일 전주에서 ‘오마이뉴스’ 전북지역 시민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곳 가까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가을마다 한 번씩은 꼭 들리는 곳이다. 가을경치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에는 주말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전 역시 여기저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깊어진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고 북적인다. 경기전 안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인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자리하고 있다.


단풍과 어우러진 문화재, 분위기 정말 좋아

가을에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답사일정을 많이 잡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아울리는 문화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철마다 왜 문화재의 모습이 그리 달라져 보이는 것인지. 그렇다고 문화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화재 주변의 경치가 달라지는 것이지.

29일 찾아간 경기전의 예종대왕 태실과 비도 마찬가지이다. 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은 형형색색의 단풍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냥 볼 때는 조금은 삭막한 석재들이 단풍과 어우러지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을에는 이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문화재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람들도,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서 한 번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 주변에 단풍을 심을 수는 없을 테니,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문화재 중에 복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까?

태 항아리를 가져간 조선총독부, 좋아할 수 없는 이웃

이웃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난 일본이라는 나라를 한 번도 이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일본은 죽어도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일본 땅 곳곳에 있다니, 이런 나라를 어떻게 이웃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두 사람이 태실의 돌난간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그것마저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라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해주기만 한다면.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안내판이라도 한 번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태실(胎室)’이란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여 땅에 묻는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태실’ 혹은 ‘태봉’이란 지명은 태를 묻은 곳이란 뜻이다. 예종대왕의 태도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이다. 원래 이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 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묻었다가, 영조 10년인 173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태실이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근처에 방치가 된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결국 이 태실 안에는 예종대왕의 태는 없고, 그 태를 감쌌던 석조물과 비만 남은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태실과 비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화려하지 않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조성한 돌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배가 부른 원통형의 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도탑의 형태이다. 난간은 두 개의 6각형 장대석을 이용해 난간을 둘렀는데, 이음새 부분에는 문양을 한 받침돌을 놓았다.


석비는 태실과 함께 옮겨온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귀가 적혀있고,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연대를 음각하였다.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의 얼굴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다. 앞뒤로 새긴 용은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날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는 평범하게 조각이 되었다. 다만 거북의 귀갑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채로운 문양으로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도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본질이야 어디로 갈 것인가?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를 보면서, 이 가을에도 미움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 태를 훔쳐다가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이 아름다운 단풍도 그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러나 그 문화재들을 다 찾아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데만 무려 20년이 걸렸다. 참으로 긴 세월이다. 이런 긴 세월동안 난 길바닥에 서 있었다.

오늘 그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이 가을에 보여주고 싶은 곳들이 있다. 보여주기보다는 가본 곳 중 그래도 이 가을 날 한 번 쯤은 찾아주기를 바라는 곳이다. 이 문화재들은 모두 접근이 용이한 곳으로 정했다. 다만 마애불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산 위에 있는 것을 소개하지만. 올 가을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찾아보기를 권한다.


(정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정자 무진정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고택) 기가 모이는 곳이라는 명성황후 생가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10월 24일,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천연기념물) 작가들이 찾는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이맘 때 쯤이면 꼭 가보는 곳이 있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가을철에 보면 반계리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천연기념물이 되려면 이 정도 위용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무의 높이는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자그마치 17m에 달한다. 동서로 38m 정도에 남북으로는 31m 정도의 거대한 나무다. 밑동의 둘레만 해도 15m 정도이니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령은 800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나무가 가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그 멋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반계리 은행나무만큼 무성한 나무가 흔치 않다. 또한 균형이 잘 잡혀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중 가장 아름답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지나가던법력 높은 대사가 물을 마신 후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이야 어느 곳에나 있지만, 은행나무 안에 흰뱀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또한 은행잎이 한꺼번에 물이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애불) 제작시기가 분명한 함안 방어산 마애불

불교유적의 제작연대를 가늠하는데는 그 생김이나 재질, 모습의 특징 등을 보아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 그래서 불교유적의 제작시기를 대개는 몇 세기경이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물 제159호 함안 방어산 마애불은 유일하게 그 제작연도를 새겨놓아, 통일신라 불상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널직한 바위에 선으로 음각을 한 마애불.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이 산중에 도대체 왜 오랜시간 공을 들여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 선 하나 하나를 파면서 스스로 피안의 세계를 그리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방어산 마애불의 조성년대는 신라시대인 801년이다. 중앙에 본존은 약사여래이며, 좌, 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새겨 넣었다. 왼편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이며 오른편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그려진 여성상이다.


(산성) 태조의 어진을 피신시키던 위봉산성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석탑) 통일신라 석탑의 백미 정혜사지 석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에 소재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 석탑. 이 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도대체 이 탑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정혜사지 13층 석탑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이러한 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동남아 쪽 탑사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 탑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 13층 석탑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정혜사지 13층 석탑.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석탑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볼 때마다 '누가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누구에 의해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문화, 문화재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은 벌써 2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 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고, 기쁜 일도 많았습니다. 또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 좋은 분들 중에는 가까운 지인들도 있고, 이웃 블로거님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혀 일자면식도 없는 낯선 거리에서 만난 분들도 있습니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도 남들은 돈을 벌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인간은 어찌 된 것인지 지금까지 벌기는커녕, 수없이 없애기만 하였습니다. 그 돈, 절대로 아깝지가 않은 것은 우리문화재에 대해서 단 한 명이라도 더 알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보람된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방치된 문화재가 반듯하게 제 자리를 잡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 정말 쓰기 싫습니다.

문화재 답사를 하고나서 글을 쓰는 일은 재미있어야 합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문화재의 문화적 특징과,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어 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답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난 문화재에게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의 훼손, 관리의 허술, 문화재 폄하 등 정말 쓰기 싫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문화재를 볼 낯이 없습니다. 문화재는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화재를 조성한 장인의 숨결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전 문화재는 각기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문화재에 대해 나쁜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문화재를 아프게 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제성은 있으십니까? 문화재의 소중함이나 중요성은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묻습니다. 문화재가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것을 의식 있게 바라보고 있는 분들은 극히 일부라는 것입니다. 아니 일부가 아니라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주장을 해왔습니다. 모든 분들이 문화재 지킴이가 되어 줄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백날 소리를 질러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립니다. 문화재는 우리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과 사고를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문화재를 훼손하고 폄하하며 나하고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등한시 하는 행위, 이것은 매국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떻게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날마다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은 소중한 문화재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것에 더 광분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무관심과 문화재를 비하하는 행동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에 동조를 하며 외래의 문화나, 이상한 것들에 심하게 광분하고 있는 분들, 무관심으로 바라보는 문화재와 우리 문화. 그것은 바로 매국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



전 오늘도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의 낯선 문화재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합니다. “문화재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맞습니다. 밥 안 먹여 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문화를 방치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말입니다. 일본도 끝내 빼앗지 못한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우리의 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네들은 그들보다 더한 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우리 문화를 지금 여러분들이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가 문화의 매국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찌 보면 일본인들보다도 못한 쪽팔리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립니다. 답은 당신들 스스로가 내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쪽지가 하나 날아왔습니다. 전화번호가 적혀있어 통화를 했는데, 문화재를 꾸준히 답사하고 글을 쓰다가보니, 불교단체인 태고종에서 발행하는 <원간 불교>에서 1년 ~ 2년 정도 매달 원고를 보내달라는 청탁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가끔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써주기도 하고 가뭄에 콩나 듯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년간 문화재에 대한 원고를 써 달라는 부탁은 처음인 듯합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그간 문화재를 답사한 자료CD가 3,000장이 넘을 정도이니, 꽤 많은 문화재를 만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늘 이야기를 합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답사를 하고, 글을 쓸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쓸 것입니다.


끊임없는 답사의 결과란 생각을...

 

내년이나 후년 쯤에는 마애불이나 정자에 관한 책을 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학술적인 책이 아닌, 문화재를 만나서 느끼는 나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글이 제대로 쓰여질지도 걱정입니다. 요즈음은 그저 연습을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적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도 모두 이웃 블로거님들의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졸필이지만 그래도 찾아와 보아주시고, 따듯한 격려의 말씀을 들려주어, 힘을 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함께 기뻐해 주십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함께해서 힘이되고 즐거운 블로거 여러분에게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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