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609-1번지. 미륵산 정상 부근에 있는 옛 절터인 사자사터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사자사지(師子寺址)’는 현재는 사자암이라는 작은 절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차도가 없어 걸어서 미륵산 정상 부근까지 걸어 올라야 한다. 날이 잔뜩 흐린 날 찾아간 사자암.

 

절 입구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기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만만치 않을 것만 같다. 천천히 좁을 길을 따라 오르니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그런데 얼마 오르지 않아 후두둑거리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런 낭패가 있나. 답사를 나갈 때 늘 챙기는 것이 우신이지만, 이 날따라 우산도 지참하지 않았다.

 

 

익산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한 사자사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 창건된 사찰이다. 백제의 무왕과 선화비가 이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그곳에 절을 이룩하라고 일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자사로 행차를 하던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라고 일렀으니 그보다 먼저 창건한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자사는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해준 점에서, 백제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하지만 이 사자사의 위치에 있어서 논란이 제기되어왔지만, 1993년 발굴조사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사자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지금은 옛 모습은 찾을 수가 없고, 현재는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그리고 창고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 석탑 1기가 남아있다.

 

 

자욱한 운무 속 풍광이 일품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가 않다. 그저 걸음을 빨리 옮겨 사자암으로 가서 피하는 수밖에. 조금 더 오르니 길이 가팔라진다. 그런데 우리가 걷는 소로 길 옆으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곁으로 지나가는 것을 짐을 운반하는 곳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화라도 걸어 볼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편히 오르려고 하지만,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 걷는 것을 우선한다. 그래야 절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다. 많이 내릴 것 같았지만, 비안개인 운무만 자욱하다. 길이 바위 위로도 나 있어 위험하다. 비에 젖은 바위는 더 미끄럽기 때문이다.

 

 

저만큼 사자암의 담장이 보인다. 그리고 절로 오르는 계단의 우측에 커다란 바위에는 獅子洞天이라고 깊게 음각한 글자가 보인다. 누가 이곳에 이렇게 글을 새겨놓은 것일까? 대웅전 입구에 낯선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석질로 보나 깨나 오래됨직해 보인다. 하지만 제 짝을 맞추지 못한 것만 같다.

 

문화재는 없지만 후회가 안 돼

 

미륵사보다도 먼저 창건을 했다는 사자사. 하지만 그 어디에도 문화재는 찾아볼 수가 없이, 사자사지만이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을 뿐이다. 하지만 비까지 맞으면서 힘들게 올라간 사자암에 문화재가 없다고 해도, 마음 한편이 너무 즐겁다. 운무가 자욱한 모습이 정말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절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사찰이면 문화재 하나쯤은 다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자암은 문화재는 없었다. 딴 때 같았으면 마음 한편이 허전했을 텐데, 사자암은 오히려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제 나도 슬슬 절에 익숙해져 가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미 30년 세월을 길에 서 있었으니.

사찰에 있는 탑이라고 해서 모두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거나, 부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사찰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탑 중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성한 것이 있다. 공주 갑사에는 갑사를 이룩할 때 노역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소를 위한 공우탑도 있다. 이와 같이 조금 특별한 탑이 바로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63 현등사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인 지진탑이다.

 

가평군 하면 하판리에 소재한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백 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층석탑의 1층 몸돌이 사라져

 

현등사 입구를 들어서면 위로 오르는 계단 한편에 지진탑이 서 있다. 지진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의 일부와 탑신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바닥돌과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경사가 흐르며 네 모서리 선이 뚜렷하다. 지붕돌과 몸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본떠 새겼다.

 

탑의 맨 아래 놓인 지대석은 2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다. 네 귀퉁이의 합각은 뚜렷하며 밑면에는 부연이 조각되어 있다. 위면에는 각각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이 지진탑은 탑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하였다. 이 탑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남아있는 2층과 3층의 몸돌에 좌상이 새겨져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지진탑

 

지붕돌은 느린 경사로 흐르는데 밑면에 받침은 1, 2층은 4, 3층은 3단으로 불규칙하다.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한데 .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에 다달아 급격한 반전을 이룬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석만 남아 있다. 상면에는 지름이 5cm 정도인 찰주를 꼽기 위해 조성한 구멍이 뚫려있다. 이 탑은 현존하는 부재의 조각양식과 이름에 얽힌 이야기로 미루어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탑은 사찰의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많은 탑들은 제각각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탑을 조성한 장인의 정신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비록 제 모습을 다 갖추고 있지 못한 지진탑을 보면서, 그래도 그렇게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지진탑을 찾아가는 날은 정말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였다. 하지만 그곳에 지진탑이 있어주어 그런 추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조차 제대로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이 이 나라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보덕사는 신라 문무왕 8년인 668년에 의상조사가 지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조선의 비운의 왕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유배당할 때, 절 이름을 노릉사(老陵寺)’로 고쳤기도 했다. 후에 단종의 능인 사적 제196호인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영조 2년인 1726년에 보덕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덕사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절이다. 영월읍내서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장릉을 찾아가는 길에 들릴 수 있는 절이기 때문에, 큰 불편을 겪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이 보덕사에는 수령 600년 이상이 된 느티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긴 역사의 질곡을 그대로 받아들인 곳이란 생각이다.

 

 

화려한 공포가 돋보이는 극락보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0이 소재하고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인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에 운허선사와 원경국사가 늘려 지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칸은 5개의 빗살문, 양 옆칸에는 각각 3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며 현판은 김규진이 썼다. 현재 보덕사의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아마도 고려 때 지은 극락보전은 유실이 된 듯하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원래 아미타불은 법장비구였다. 아미타불을 다른 명칭으로 무량수여래불이라고도 부른다. 아마타불은 서쪽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며, 석가모니가 살아생전 그의 부친인 정반왕이 아미타불에 의지하여 극락세계를 가실 것을 권고한 일화는 유명하다.

 

보덕사, 왜 슬픔이 일까?

 

극락보전으로 들어가 참배를 한다. 그저 습관적으로 절을 찾아가면 제일 먼저 중심 전각을 찾아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20년 넘게 다닌 답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서원을 할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슬픔이 말려온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도. 아마 이곳이 단종의 원찰이기 때문이었나 보다.

 

 

사실 보덕사를 찾아가기 전 먼저 장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청령포며 관음성, 자규루까지. 그 모든 곳에 단종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참이나 그렇게 맥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가 보다. 인기척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밖으로 나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신신각, 사성전. 해우소까지 한번 들러보지만 쉽게 아른 가슴이 가시질 않는다. 산자락 밑에 보이는 작은 부도 하나가 마음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도대체 누구의 부도일까? 부도란 그 절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입적하신 분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부도는 어느 스님의 것인데 이리 초라한 것일까?

 

 

올 봄에는 영월로 가고 싶다.

 

영월은 서너 번을 답사를 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찾을 때마다 비가 뿌렸다. 왜 그리도 철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갈 때마다 비가 뿌렸는지 모르겠다. 영월을 들어설 때까지도 말짱하던 날씨가 영월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비가 왔다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월은 늘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올 봄에는 영월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이미 다녀온 지가 수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날을 잡아 영월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싶다. 눈만 감아도 여기저기 돌아볼 곳들이 눈에 삼삼하다. 그곳에 가면 또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해가 지나며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으려는지.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 510에 소재한 영탑사. 해발 210m의 차령산맥에서 뻗어나간 상왕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찰이다. 영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서 사적기가 없어서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말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 보조국사 지눌이 중건했다고 한다.

 

영탑사라는 사명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탑사에는 부처의 진신을 이르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으며, 유리광전 뒤에는 바위 위에 7층 석탑이 서 있어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지는 절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칠층석탑

 

영탑사 경내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이 된 영탑사 칠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당진군사에는 조선 정조 22년인 1798년 연암당 지윤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하면서, 그 뒤 바위에 5층탑을 세운 후 절 이름을 영탑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석탑은 원래 7층탑이었던 것이 이후 훼손되어 5층만 남아있던 것을, 1920년대에 이 절의 신도들에 의해 다시 7층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영탑사 칠층석탑은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다. 별도의 석재로 구성한 기단부가 없이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칠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는데, 이 탑은 바위와 탑이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어, 원래의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탑신의 각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1층부터 5층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처마의 선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새로 조성한 6층과 7층은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리고, 밑면의 받침조각도 얇아서 서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지극히 간략화 된 모습이다.

 

대원군 때문에 이곳으로 탑을 옮겼다고?

 

이 영탑사 칠층석탑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대원군이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서 덕산에 소재했던 가야사를 불태웠는데, 이 대 가야사의 스님들이 영탑사로 금동삼존불과 법당의 범종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후에 가야사가 불에 타면서 무너져 있던 탑도 옮겨와 이곳에 다시 쌓았다는 것이다.

 

 

현재 영탑사 경내에 보관 중인 범종은 영조 36년인 1760년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이 종에는 ‘1760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쇠를 녹여 만들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원군이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 때 범종을 영탑사로 옮겼다는 설이 맞아 떨어진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영탑사의 칠층석탑도 가야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을 확률이 높다. 탑과 바위가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는 것도, 탑을 단 곳에서 옮겨 왔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가야사에서 이곳 영탑사로 옮겨온 범종과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이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사에서 옮겨온 탑에 무게를

 

영탑사에서 칠층석탑을 처음으로 대면을 할 때 참으로 특이한 탑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바위 위에 탑을 조성한다고 해도 기단부를 놓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영탑사의 칠층석탑은 보조국사 지눌이 가야사를 중건할 범종과 샅은 시기에 가야사에 세웠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 바위 위에 올라있는 칠층석탑.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하는 영탑사 칠층석탑은 기교는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힘이 있어 보인다. 오층까지의 지붕돌과 6, 7층의 지붕돌이 경사면 등에서 많은 차이가 보이고 있어, 이 탑의 윗부분인 6, 7 층은 후에 보완을 한 것임을 알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정자. 벼랑 밑 연못에 연꽃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병풍처럼 깎아내린 암벽 위에는 정자가 서 있다. 병암정, 황진이가 노닐던 곳이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장이 될만큼 아름다운 정자다.

 

병암정 앞 연못에 핀 연꽃들

 

병암정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병암정은 예천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권원하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병암정이 유명한 것은 드라마 <황진이>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다

 

병암정에 오르면 앞으로 들판이 시원하게 보인다. 정자는 이외로 단출하다. 가운데는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전면에 길게 마루를 두었다. 이 정자를 지은 권원하 선생은 이 마루에서, 너른 들판을 내려다 보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경북 문화재자료이다

 병암정에 걸린 현판

경관이 뛰어나 드라마 촬영장이 되기도 했던 병암정. 그러나 정작 이 병암정은 나라의 독립을 걱정하는 곳이었다. 권원하 선생이 이 정자를 짓고 멀리 들판을 바라보며 내 나라를 생각하고, 떠가는 구름을 보고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달렸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그 경관만을 본다. 하지만 그 정자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왜 정자를 지었을까? 단순히 시를 짓고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정자는 그 안에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병암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닌 나라를 걱정하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병암정. 세월이 지나면 그 본래의 뜻이 퇴색해 버린다. 병암정은 독립운동의 숭고한 뜻을 가진 정자에서, 명기 황진이가 거닐던 드라마의 촬영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사람들의 사고도 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라도 병암정이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발길이 이어진다면, 권원하 선생의 뜻도 함께 알려질 것이다. 멀리 들판 위를 떠가는 구름 한 점이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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