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보다 더 빨리 동난 화전과 막걸리(화보)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에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들고 있다. 토종국민축제로 자리를 잡은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장에는 지난해 5만여명이 다녀갔으나, 올해는 그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린 것으로 추산된다. 사진으로 모악산 화전축제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축제
모악산에 오늘 다녀간 관람객들은 약 6만5000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에 비해 모든 것을 더 많이 준비를 했는데도, 1시간이나 더 빨리 준비한 막걸리며 화전이 떨어져 버렸다.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를 보러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김모(49, 남)씨는 '대한민국 어디를 가보아도 이런 축제는 없다.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야말로 정말로 바람직한 축제상이다'라고 말한다.
사진촬영대회에 참가를 했다는 사진작가 한 사람은 "이렇게 멋진 축제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며 '젊음이 분출하는 기운을 느끼고 간다. 나도 젊어지는 듯해 너무나 기분이 좋다'라고 말한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 아직 끝나지 않은 축제는 계속되고 있다.
남한강가 흔암리 선사유적지를 가다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줄다리기를 하고 난 뒤, 줄에 액송기를 꽂아 마을 뒤편에 흐르는 남한강에 갖다 놓는다. 정월 대보름 줄다리기를 할 때는 남한강이 꽁꽁 얼어 얼음 위에 줄을 올려놓게 되는데, 얼음이 녹으면 이 줄이 물에 가라앉아 수많은 물고기들의 산란처가 되기도 한다. 이 흔암리에는 선사주거지가 있다. 모두 16채의 집터가 발굴이 되었는데, 남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남한강가의 집단 선사주거지
흔암리 선사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0년대에 김원룡에 의해서다. 그 후 서울대박물관 고고학조사단이 1972년도부터 매년 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20여기에 가까운 움집터를 확인하였고 다수의 유물과 탄화곡물을 발견하였다. 집 자리가 확인된 곳은 마을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300여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표고 123m의 산정상부 지점으로 유적은 이 산 경사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선사유적지의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있다. 민무늬 토기에는 화분형, 사발, 단지, 짧은목 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와 붉은 간토기 등도 상당수 발굴되었다. 석기로는 돌칼, 반달돌칼, 바퀴날도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농경용 연모와 함께 땅을 파 만든 저장고에서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식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나온 탄화미는 늦은 연대라 하더라도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들로 판명되었다.
흔암리 유적지의 집의 형태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집들은 남북장축으로 풍화된 화강암반을 'ㄴ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것이며, 포탄형의 특징적인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에는 화덕자리, 간단한 저장구덩이, 기둥구멍 및 출입구 등이 있다. 움집의 구조는 평면은 긴 네모꼴이며 가장 큰 집터는 길이 10m, 너비 4.2m로 나타나 상당히 큰 편이다. 이렇게 큰 집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도 집단주거지의 주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발굴 당시 나타난 움집들은 움의 깊이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같은 집터에서도 4벽이 서로 다르고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연모 중에서 그물추가 있었다는 것은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생활에서 농경을 주로 했지만,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재현된 선사유적지 아쉬움이 남아
흔암리 선사유적지는 마을회관을 기점으로 양편으로 오를 수가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전신주에 '흔암리 선사유적 150m'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그런데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흔암리 선사유적 80m'라는 이정표를 걸어 놓았다.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이정표다. 이런 안내판이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미는 것은, 우리 문화재에 대해 관계부서에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이는 것이란 생각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정표 하나도 확인하지 않은 문화재보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 한 곳의 입구는 마을회관 우측 길로 남한강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석비가 서 있는 곳으로 오를 수가 있다. 얼핏 생각을 해보아도 두 개의 거리가 맞지 않는 이정표 중 하나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펜스로 둘러놓은 선사유적지는 현재 5동정도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덕자리만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나 연모 등을 모조품이라도 놓아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돌아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볼 것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한 움집에는 누군가가 술을 마시고 빈병과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흔암리 선사유적지. 우리의 농경문화와 더불어 강가를 주거지를 삼은 취락구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치고는 너무나 볼품없이 재현이 되었다는 생각이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16)
어느 환경미화원의 하루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 사람. '환경미화원'이라고 부르지만, 쉽게 이야기를 하면 청소부다. 새벽 2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손에서 빗자루가 놓이지를 않는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제대로 분리가 안 된 재활용품을, 종류별로 분리하는 손길이 바쁘다. 여주군청 소속 환경미화원 김기성(45, 남)씨. 눈이 잔뜩 쌓인 쓰레기봉투를 들어다가 수레에 싣기 바쁘다.
눈이 오면 힘들어요
눈이 오는 날이면 딴 때보다 더 바쁘다고 한다. 눈을 치우랴 밀린 쓰레기도 정리하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눈이 오면 시장 중앙통을 다 치워주어야 하는데, 정말 힘들어요."
"시장 사람들이 치우지 않나요."
"눈을 쓸어내기는 하지만 쌓인 것은 우리들이 치워야 하거든요"
"몇 시서부터 시작을 하나요?"
"새벽 두 시부터 나와야 해요"
하루에 15시간 반을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금방 쓰레기가 쌓인다니, 쓰레기가 어지간히 많이도 나오는가 보다. 하기야 시장통의 쓰레기니 주택가보다는 많을 것이다.
"군청 앞 중앙통 눈도 치워야 하고 시장통도 치워야 하는데, 남들은 눈이 와서 좋을 줄 몰라도 저희들은 정말 싫어요."
"그렇겠네요."
"남들이 즐거울 때 저희들은 하루 종일 그것을 치워야하니, 그것도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죠"
요즈음은 나름대로 자부심도 가져
환경미화원을 하기 전에는 양평 양수리에서 목욕탕에 근무를 했다고 하는 김기성씨. 그러나 힘이 들어도 요즈음이 한결 좋아졌다고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쉴 수가 있으니, 자신의 시간도 생겼다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름대로 일정한 수입이 생겨 생활을 하는 데는 안정적인 것이 가장 행복하단다.
"요즈음은 환경미화원의 인기가 높아요. 많이들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채용공고가 나면,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많이 오고요."
"시험이 어렵나요?"
"모래주머니를 들고 운동장 돌기 등 나름대로 어렵죠."
그래서 늘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설 때는 조금은 귀찮기도 하지만, 수입이 안정이 되니 그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쓰레기봉투를 수레에 싣느라 힘을 쓴다. 일을 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몸이 조금은 불편한 듯도 하다. 그래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분리수거 좀 잘했으면
일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느냐고 물으니, 힘이야 들지만 자신의 직업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릴 때 재활용품을 제대로 분리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내다 놓을 때 분리가 제대로 되어 있으면, 이중으로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되나요?"
"예, 깡통은 깡통대로 병은 병대로 해주면 좋은데, 그저 한꺼번에 봉지에 넣어서 내다놓기가 일쑤죠. 그럼 결국 또 한 번 분리를 해야 하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분리를 해놓지 않고 내다 놓는 사람들로 인해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에 시간을 뺏기게 되면, 그만큼 쓰레기를 치우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단다. 결국 그 피해는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눈이 또 오는데 힘드시겠네요?"
"늘 힘이야 들지만 즐겁게 일을 합니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연기를 내뿜는 김기성씨의 표정에는 행복함이 배어있다. 큼지막한 쓰레기봉투를 안아 수레에 가득 쌓으면서도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자신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눈이 그만 그쳤으면 좋겠다. 날 추운 날 물기가 묻은 쓰레기봉투를 옮기느라 옷이 젖지 않도록.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11)
"남자가 개시하면 잘 팔려, 좀 사가"
눈이 내리고 난 10일, 여주 5일장을 찾았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걱정이 되는 분들은, 난전을 펼치고 있는 어르신들이다. 눈을 대충 치운 장거리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몇 가지 안 되는 물건을 펴놓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계시는 할머니들이 보인다.
하늘이 하시는 일인데
"할머니 추운데 나오셨네요, 춥지 않으세요?"
"좀 춥네."
"이나저나 왜 5일 장날마다 이렇게 눈이 오거나 비가 오네요."
"그러게, 올해는 계속 그러네."
"많이 파셨어요?"
"아직 개시도 못했어. 이나저나 하늘이 맘이 상하셨나."
좌판에 벌려놓고 있는 물건을 보니 몇 가지되지도 않는다. 깻잎과 새로 뜯은 냉이, 그리고 동치미무와 짠지무가 전부다. 이것을 들고 장마다 나오시는 할머니께 함자를 여쭤보기도 죄스럽다.
"냉이는 어디서 캐셨어요?"
"집 근처에서 캤지"
"집이 어디신데요?"
"내양리"
여주 장날만 나오신다는 할머니
몇 가지 되지도 않는 물건을 벌여놓고 계신 할머니는, 장 한쪽 끄트머리 사람들의 왕래도 드문 곳에 자릴 펴고 계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어도, 이쪽은 왕래가 드문 곳이니 팔릴 것 같지도 않다.
"여기서 많이 파실 수 있겠어요?"
"아는 사람들은 오지. 이 짠지무는 식당을 하시는 분이 4만원 어치나 사셨어. 맛이 있다고. 사가서 양념해 놓으면 정말 맛있어"
"오늘은 좀 파셨어요?"
"이것 좀 사가, 남자가 개시하면 잘 팔려"
"그 깻잎 오천 원 어치만 주세요."
깻잎을 담고 계시는 할머니는 여주 장날만 나온다고 하신다. 이만한 물건을 갖고 어떻게 이 장 저 장을 다니겠느냐는 할머니는, 이렇게 작은 물건이나마 파는 것도 다 하늘이 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장날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것도 다 하늘이 하는 일이요,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안 보내는 것도, 다 하늘이 정해 놓은 일이라는 것이다.
할머니의 하늘은 왜 마음이 상하셨을까?
그런 할머니의 하늘은, 오늘이 장날인데도 눈이 오고 날이 춥게 만들었다. 연세가 드신 분이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계시면서도, 날씨 탓을 하지 않으신다. 할머니의 하늘은 과연 무엇일까?
"깻잎 많이 담지 마세요."
"먹을 만큼은 주어야지. 개시를 잘 주면 하루 종일 손님이 많아."
"많이 파세요. 추운데 불이라도 좀 지피시지 않고."
할머니는 모든 것이 다 하늘이 알아서 하신다고 말씀을 하신다. 인간이 마음대로 일을 저지르면 결국 그것은 인간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눈이 많이 오는 것도, 비가 많이 오는 것도 다 인간들 스스로가 하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것. 과연 할머니의 하늘은 어떤 것일까? 장을 돌면서 내내 생각을 해보아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머니의 하늘은 듬뿍 물건을 더해 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2000원의 관람료가 아깝지 않으려면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소재한 외암리 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안에는 충청지방의 양반집과 초가가 한데 어우러져, 우리의 기옥구조나 실생활 등을 볼 수 있는 전통의 마을이다.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이간 선생이 지은 <외암기>에는 마을 이름을 '외암'이라 기록한 사실이 있어, 외암의 명칭이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순천의 낙안마을과 강원 고성의 왕곡마을 등이 이렇게 집단으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입장료 징수에 맞는 관람이 이루어져야
외암리 민속마을은 사진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은 아산시민들은 주민등록증 등을 보여주면 무료로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외지인은 경우 성인들은 2000원의 관람료를 지불하여야만 한다. 문제는 이렇게 관람료를 지불하고도 몇몇 집은 밖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민속마을 등에 들어가면 그 안에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으로만 맴돌다가 나온다면, 굳이 관람료를 지불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외암리 민속마을의 경우 마을 안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이거나, 그 외에 몇 집은 아예 문을 걸어두거나, 개인의 소유임을 써 붙이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경우 누구나 관람료 없이 마을을 돌아볼 수가 있다. 물론 몇 집은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싫어 출입을 제한한다는 문구가 보이기도 한다.
만일 관람료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충분한 관람을 책임져야만 한다. 사람이 살기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하면,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하거나,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서라도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꼭꼭 닫혀있는 집들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관리소 측의 대답이다. 물론 주차료로도 그만한 돈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주 세종대왕릉이나 효종대왕릉의 경우 주차는 무료이다. 그리고 두 곳의 능을 관람하는 대도 대인의 경우가 일괄 천원이다. 2000원을 받든지 얼마를 받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외지에서 온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꾸며놓은 시설물, 외국인들에게 미안해
외암리 마을에서 관람료를 지불하고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물레방아가 있다. 물은 흐르는데 정작 방아는 찧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보니 물의 힘으로 수차가 돌아가면, 방아를 움직여야 하는데 연결되는 부분이 연결이 안 되어 있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디딜방아와 연자방아도 보인다. 그런데 이 방아들 역시 대충 모양만 꾸며 놓았다. 디딜방아 공이가 곡식을 찧는 부분은 무너져 있고 가득 낙엽 등이 쌓여져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디딜방아를 돌아보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대충 들어보니 어떻게 여기서 방아를 찧느냐는 것이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실제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모습만 갖춘 이런 것들을 볼 때,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보이지 않는 안내판 정비해야
마을을 돌다가 보면 집 앞에 그 집이 어떤 집이었나를 안내하는 안내판들이 있다. 여러 성씨가 살았으나 조선조 명종 때 예안 이씨인 이사종이, 세 딸만을 둔 진한평의 첫째 사위가 되면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동족마을이 된 곳이 바로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 내에는 종손집, 참판댁, 송화댁 등 가호가 붙은 집들이 있다. 이렇게 집집마다 명칭이 붙으면서 그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이 집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중 몇 곳의 안내판은 글이 지워지고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다. 마을의 여기저기서 보수를 하느라고 주변이 부산하다. 관람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어 놓아야 우리 것을 제대로 알릴 수가 있다.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모습에서 우리 민속마을의 아름다움이 제 가치를 잃는다면, 차라리 보여주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져, 민속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기분 좋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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