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사지 경내에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오르면서 조금 못미쳐 우측으로 길이 나 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산능선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보호철책 내에 정비되어 있는 석실을 볼 수 있다. 무덤 서쪽에는 연도폐쇄석이 놓여 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 46-1에 해당하는 곳. 경기도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의 형채를 상방하원형이라 부른다. 상방하원형이란 하부의 석실평면은 원형이고 연도가 달려 있으며, 상부는 네모난 방형의 2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임이 밝혀져 그 구조상의 특징을 살려 '상방하원석실묘'란 명칭이 붙여졌다.


지상구조는 2층의 제단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기단 1층의 규모는 동서가 442cm, 남북이 412cm, 높이 46cm로 장방형을 이루었고, 기단 2층은 동서가 322cm, 남북이 280cm, 높이는 50cm이다. 기단하부의 석실은 돌을 쌓아서 평면원형의 현실과 평면장방형의 연도를 만들었고, 평면의 모양은 열쇠구멍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고달사지를 답사한 후 석실묘를 답사하기 위해 산길로 올랐다.  산림욕도 즐길 겸 천천히 이야기를 하면서 20여분 만에 보게 되는 석실묘. 그런데 언제 정비는 했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석실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보호철책을 둘렀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보호철책에는 문이 없다. 석실 내부를 보아야 석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데, 보호철책에 문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석실을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 석실묘 입구 잡풀이 무성한 석실묘. 정리가 안된 문화재.

  
▲ 석실 내부 원형으로 된 석실내부

 

문제는 보호철책을 넘어 들어가서다. 석실 입구를 막은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창살 틈으로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어두운 석실 내부를 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떠야 한다. 이때쯤이면 화가 치민다. 도대체 문화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보호만 하겠다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문화재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들어갈 수 없는 철책을 두르고, 거기다가 열 수 없는 문을 만들었다면 문화재를 보라는 것인지, 보지 말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닫고 감추고 하는 것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고 느끼고 가야 올바른 문화재의 가치를 알 수가 있다. 고려 말기의 묘제 연구에 소중한 자료인 상교리 석실묘. 하루 빨리 묘실 안을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출처 : 오마이뉴스)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지 114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아침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 앞에 있는 문예관에서는 명성황후 114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처음에는 행사를 크게 하기로 했으나 신종플루로 인해 대폭 축소해, 이기수 여주군수를 비롯한 300여 명의 내외빈 인사들이 모여 명성황후의 뜻을 기렸다.

 

명성황후는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이다.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 명성황후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에 모셔진 명성황후의 영정

  
▲ 생가 정면 여주읍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지

아침 일찍 서둘러 생가지로 향했다. 명성황후 생가지는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8세까지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생가지에 잇는 집은 숙종 13년인 1687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지어졌다. 당시의 건물로 남아있던 것은 안채뿐인데, 1995년 행랑체 사랑체 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이 생가의 우측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서 있다.

 

  
▲ 안채 명성황후 생가 안채. 이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내력을 기록한 탄강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것이다. 탄강이란 왕이나 성인 등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고, 구리란 고향이라는 뜻으로 탄강구리비란 명성황후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뜻이다.

 

  
▲ 별당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의 별당. 1895년 동학혁명 때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탄강구리비의 뒷면에는 광무8년인 1904년에 세워졌으며 '5월 어느 날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제27대 황제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황제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탄강구리비 뒷편에 위치한 별당은 명성황후가 1851년 음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가 8세가 되던 해에 부친인 어성부원군 민치록이 영천군수를 끝으로 감고당에서 세상을 하직했으니 명성황후는 그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명성황후 생가지 명성황후 추모를 하는 날 어린 아이들이 생가지를 찾았다. 명성황후의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1895년인 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가 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혁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맞섰던 명성황후는 그렇게 비극적인 생을 마쳤던 것이다.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가 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 황손 이석씨 추모제날 명성황후 생가지를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추모제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촬영을 하고..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생가 곁에 마련된 민가마을에서 간단한 점식식사로 국수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는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가 참여를 했다. 올해 69세로 전주 승광재에 기거하고 있는 이석씨가 외가를 찾은 것이다. 곱게 두루마기를 입은 황손 이석씨는 그동안 수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는 고종황제가 할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친왕이다. 결국 명성황후는 황손 이석씨의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긴 황손 이석씨. 영국이나 일본 같으면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겠지만 마땅히 터전을 잡지 못하고 방랑을 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가수를 비롯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다가 2003년 8월부터 태조 이성계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 김완주 전라북도도지사가 전주시장을 지낼 때 배려를 한 것이다.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하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나라에서 일본 천황을 초청한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질 않습니다. 할머니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장본인인 그들이 모든 것을 깊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은 격해진 마음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으면 아버님께서는 항상 칼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답니다. 심지어는 독약을 받을 것에 대비를 해 비상을 조금씩 마셨다고도 합니다."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라면서 말을 하는 황손 이석씨의 웃는 얼굴에 잠시 노기가 스민다. "그저 제가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마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사동궁에서 보냈다. 궁에서 나온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여기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 때가 힘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이후로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고,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갈곳이 있다면서 쓸쓸히 명성황후 생가를 뒤로하고 떠나는 황손 이석씨. 왜 그 뒷모습에 분노가 보였을까?   

 

  
▲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의 대화 명성황후 추모제장을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할머니댁인 외가를 찾은 황손 이석씨의 근황

 

봉황정,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정자가 서 있는 밑으로는 물이 흐른다. 저 멀리 내 건너 보이는 사람들은 그 물에 발을 담구고 앉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님 두 사람이 주변 시선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까? 봉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냇가에는 손 장난을 치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서 있다.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 물이 맑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봉황이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일반 정자와는 달리 담이 처져있고,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면 정자가 서 있다. 대문 입구에는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가 한편에 서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자 안편에는 람휘정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 흐르는 내 흑천 쪽으로 정자를 돌아가면 구성대라는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있다. 한 정자에 세 개의 이름을 붙인 봉화정.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기야 한 정자에 네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정자도 있다.'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뜻하고, '覽輝(남휘)'는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이조참의 양응청과 의해 건립되었다. 그 후 정조 14년인 1791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봉황정은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 명시인 유희경, 김창흡, 이중하 등이 봉황정에 올라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암긴 사람들은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시가 전한다.  봉황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건물로서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규모는 정ㆍ측면 각각 3칸으로 정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봉황대남휘정중수기'부터 최근에 만든 시문현판까지 모두 7개의 글을 적은 게판이 걸려있다.

 

  
▲ 현판 정자 안에는 람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시 한 수 적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잊고 산지 오래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라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날들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이 봉황정에 올라 스스로를 시인이라 했다면, 글 한 수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속 좁은 사람도 정자에 오르면 저 아래 흐르는 광탄에 세속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버릴 수 있을텐데, 그저 덧없는 세월만 탓한들 무엇하리. 오늘 이 봉황정에 올라 엣 선인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출처 : 오마이뉴스)

지난해 제9회 때 공연모습


국민토종축제인 제10회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가 4월 11일(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대원사 일원에서 열린다.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는, 축제 당일 5만 여명의 인파가 모이는 토종축제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축제이다.

모악산진달래 화전축제는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축제의 주인공이 된다. 누구나 다 축제장에 들려 볼거리를 즐기고, 화전과 막걸리 등을 먹으면서 하루를 즐기게 된다. 더욱 화전축제는 초, 중, 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그리기, 글짓기, 사진촬영대회, UCC대회, 모마일 삼행시 짓기 등 종목이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비롯하여, 전북도교육감상, 전북도지사상, 전주시장상, 완주군수상, 전주교육장상, 완주교육장상 등 많은 상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의 축제이기도 하다.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운집한 축제장


올해로 제 10회를 맞이하는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는 딴 곳의 축제와는 다르다. 모악산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축제의 주인이 되어 축제를 가꿔 나간다. 올해 제전위원장을 맡은 민주당 최고위원인 송영길 의원은 "꽃이 피는 봄철 모악산에 올라 모든 걱정을 다 떨쳐버리고 하루를 화전놀이로 즐기기를 바란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곤혹을 치룯던 화장실 문제도, 올해는 수세식 화장실로 말끔하게 신축을 해 한결 기분 좋은 축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젊음과 전통이 어우러지는 화전축제>답게 공연장에서는 하루 종일 초, 중, 고 댄심팀 등이 출연을 해 공연을 한다.

그 외에도 옛 기와 그림전시, 화전전시, 대나무 솟대전시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올해는 날이 따듯해 모악산에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모악산에 올라 가족들간의 정이 넘치는 하루를 마음껏 즐겨보기를 바란다. (우천시는 일주일 순연)

    

제9회 축제 때 학생들의 공연모습




황포돛배, 돛을 바람에 나부끼며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떠다니는 배를 보노라면, 왠지 까마득한 과거 속에 있는 나를 그려보고는 한다. 여주 남한강은 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 조포나루 중 두 곳의 나루가 있고, 여주지역에만 크고 작은 17개의 나루가 있었다. 그만큼 조운으로 인한 여주는 중요한 곳이었고,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황포돛배들이 늘 강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옛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서 제작된 황포돛배. 여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남한강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제작한 황포돛배는, 남한강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돛배 외에도 황포 2호 등의 유람선이 남한강 물길 위를 떠다니며, 관람객들의 흥을 돋아 주고는 했다. 그러나 이제 황포돛배는 남한강을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다. 보 공사로 인해 무수히 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오탁방지막' 때문이다.  

 

  
▲ 황포2호 남한강을 쩌다니는 유람선인 황포2호가 선착장을 떠났다.
ⓒ 하주성
남한강

 

황포 2호는 유람선이다. 조포나루 인근에 마련된 선착장을 떠나 남한강을 한 퀴 돈다. 보를 먹기 전에는 그 활동 영역이 넓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착장 주변 밖에는 다닐 수가 없다. 무수히 강을 가로지르는 오탁방지막 때문이다.

 

  
▲ 유람선 유람선에 승선한 관광객들이 남한강의 장취를 즐기고 있다.
ⓒ 하주성
유람선

  
▲ 오탁방지막 한 옆에 트인 오탁방지막을 넘어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 하주성
오탁방지막

 

선착장 근처에는 오탁방지막의 한편을 트여놓았다. 아마 유람선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렇게 트여있으면, 오탁방지막의 구실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결국 그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발상일 뿐이다.

 

  
▲ 오탁방지막 오탁방지막을 넘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리고 있다. 뒤로는 파헤쳐지고 있는 여주의 명소인 금모래은모래 밭이다.
ⓒ 하주성
오탁방지막

  
▲ 유람선 결국 선착장 근처에서 한 바퀴 돌 수 밖에 없는 유람선이다.
ⓒ 하주성
선착장

 

유람선이 조금 상류를 향해 가다가 뱃머리를 돌린다. 길게 늘어진 오탁방지막을 넘지 못해서다. 뒤로는 여주의 가장 아름답다는 금모래은모래 모래밭이 송두리채 파헤쳐지고 있다.

 

  
▲ 황포2호 황포2호는 슬프다.
ⓒ 하주성
황포2호

 

황포돛배도, 유람선인 황포 2호도 슬프다. 마음대로 강물 위를 돌아다녔는데. 그리고 그 밑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제 언제 다시 돌아다닌다고 해도, 그 밑에는 생명체들이 살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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