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장대나 긴 돌 위에 얹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솟대는 대개 마을의 입구에 세워,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미리 예방한다는 뜻으로 세운다. 솟대만을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돌탑, 장승 등과 같이 세우기도 한다. 솟대는 정월 열나흩날 밤에 새로 깎아 세우고, 주민들이 모여 정성스럽게 마을제를 지낸다. 솟대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여 솟대, 짐대, 돛대, 새대, 설대 등으로도 부르고, 그 기능으로 세분하여 수살, 진목, 추악대, 표줏대 등으로도 부른다.

 

이러한 솟대는 참나무로 만들어 마을입구에 세우고, 그 위에는 오리를 만들어 올려둔다. 대개는 솟대 위에 한 마리를 얹는 수도 있지만, 끝을 갈래지게 해 두 마리를 올리기도 한다. 이 위에 올리는 새는 마을마다 달라, 기러기나 까마귀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새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위에 새를 올리는 것은 멀리 날고, 높이 날 수 있는 새를 올림으로써 먼 곳에서부터 오는 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5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작은 솟대

 

▲ 솟대 잔가지로 만든 솟대는 섬세함이 요구된다.


김계용(남, 40세.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 282-7)이 대나무를 이용해 솟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쯤이다. 원래 국악기 중에서 삼죽(三竹)이라고 하는 대금, 중금, 소금 중 중금연주자로 활동을 하는 김계용은 우연한 기회에 중금을 배우는 제자들이 갖다 준 대나무를 접하게 되었다.

 

"대나무는 강하면서도 약하다고 하죠. 대나무가 속이 비고 곧다고 하지만, 많이 굽어져 있는 것이 대나무 가지의 특성이기도 하고요. 이 대나무를 다듬고 불로 펴고, 자르고 하는 작업은 최대한 공을 들여야만 합니다. 작은 소품 하나를 만들어도 몇 시간씩 걸리거든요"

 

대나무의 잔가지를 갖고 솟대를 만드는 작업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의 작품을 만드는 데도 서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처음 제자들이 갖고 온 잔가지를 갖고 만들기 시작한 솟대.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다보니 이제는 대나무 솟대를 만드는 장인이 되어 버렸다.

 

"제가 대나무를 갖고 솟대를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과 대나무가 모두 자연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옷깃만 스쳐도 하늘거리는 대나무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은 사람의 영향을 받고, 사람은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요. 이 솟대 하나가 자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어집니다."

 

대나무 솟대작품도 만들고

 

▲ 잔가지 손질 대나무의 잔가지를 갖고 만드는 솟대. 휘어진 가지를 펴고 자르고 하는 솟대만들기는 3~4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많은 대나무 솟대를 만들었다. 대나무로 만든 솟대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다고 하는 김계용. 경기통일미술전에 2008년에는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냈고, 2009년에는 '지금 우리는'이라는 작품을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솟대를 만드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다. 손가락 굵기만한 대를 갖고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큰 가지를 잘라내면 몇 년을 자라야 하는 대나무를 버릴까봐, 한 해 정도만 자라도 되는 잔가지를 이용하는 것이란다.

 

"처음에 대나무를 갖고 솟대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데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을 했어요. 대나무를 이용해 솟대를 만드시는 분들은 대개 기러기를 대나무로 만들고, 대는 쪽동백나무 등을 이용하는데 저는 전체를 대나무로 만들죠. 그러다보니 작업도 오래 걸리고 작은 소품이라 섬세함이 필요한 것이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솟대이고 싶어

 

"이렇게 작은 솟대를 만들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작은 솟대에 모든 염원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차 안에도 놓고 다닐 수가 있고, 아이들의 책상머리에도 놓아둘 수가 있거든요. 우리 솟대는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입시철이 되면 입시생들에게 하나씩 만들어 주고는 하죠."

 

그동안 사람들에게 솟대만들기 체험을 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도 쉽게 만들 수가 있어서 부모님들과 함께 만들기 체험을 하러 온다는 것이다. 지금은 여주 명성황후 생가 앞 민가마을에서 솟대만들기 체험을 지도한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이런 솟대를 만들었다는 것을 즐거워하죠. 그리고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께서는 솟대를 만들면서,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체험을 하시는 분들이 30~40대 장년층입니다. 그 분들은 솟대를 만들면서 자신의 소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 솟대 때로는 대나무를 휘어서 대를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모습의 솟대가 김계용의 손에서 탄생한다.

 

사람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솟대를 만들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솟대를 만들 때 친구를 생각하면서 만들라고 한단다. 그러면 그 솟대가 친구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 솟대 안에 부여하면, 솟대의 의미가 남다르게 표현이 된다는 것이 김계용의 주장이다.

 

"앞으로 이 솟대와 한지공예, 그리고 천연염색을 함께 곁들여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이 솟대로 작품전시회도 가지려고 하고요."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작은 대나무 솟대. 그 안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는다는 김계룡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전설속의 대금인 '만파식적'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밝게 웃는 김계용의 표정이 좋다. 그 웃음이 그저 자연이란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22)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479번지 작은 사랑이라는 집골목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서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두 개가 한 쌍이지만, 이곳 당간지주는 한 개만이 외롭게 서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나머지 한 개는 일제강점기에, 당시 일인 경찰서장이 당간지주 중 한 짝을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자기네의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갈산 일대를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일본으로 가면서 가져갔다고도 이야기들을 한다.

 

아직도 길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미끄럽다. 앙평군의 사나사를 찾아보고, 옥천면에 들려 문화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두 개의 당간지주가 서 있어야 하는데, 영 찾을 길이 없다. 마침 지나는 마을 분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신다. 원래는 옥천리 논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당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그런데 당간을 보는 순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당간은 현재 양평군 향토유적 재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런데 안내판 앞에 개를 매어 놓아 안내판이 가려졌다. 안내판 전체를 읽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하나 남은 당간에는 눈이 밑 부분의 원공까지 덮어버렸다. 길을 치우면서 당간에 눈을 쌓아놓은 것이다. 눈을 치우고 나서 원공을 찍으려는데, 묶어놓은 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이래서야 어디 문화재 답사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현재 하나뿐인 당간지주도 원래의 간대와 기단은 소멸이 되었단다. 최근에는 시멘트와 석축으로 보수를 해 놓았다고 하는데, 눈이 쌓여 확인할 수가 없다. 옥천리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305cm, 폭 50cm, 두께 36cm 정도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 옥천리와 인근 용천리에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당간지주는 신라말 고려초에 세운 가치 있는 문화재라는 것이다.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소홀한 문화재관리 마음 아파

 

문화재 안내판과 당간지주 사이에 놓인 개집, 그리고 치운 눈을 가득 쌓아올린 당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한 개의 당간을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꼭 이렇게 문화재 옆에다가 개까지 묶어놓아야만 했을까? 새삼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재이거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고 있다니. 세상 어느 나라가 이렇게 자신들의 문화재를 함부로 방치하고 있는지, 아마 아무데도 이렇게 방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 원공 당간지주의 가운데 뜷려있는 원공. 당간을 고정시키는데 쓰인다.

▲ 개와 당간 당간의 안내판에는 게집을 놓고, 눈은 당간지주에 쌓아 놓았다.

 

치운 눈을 쌓아놓아, 당간의 지주부분은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딴 곳과는 달리 이곳의 눈부터 치워야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갖다가 쌓아올린 모습.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진 것일까? 추운 날 서둘러 나선 답사 길에서 마음만 아파 돌아온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8)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들. 충북 음성에 자리한 극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인 만학도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댔다. 자신들은 늦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 졌고, 또한 학과가 사회복지학과인데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밀알봉사회'(회장 사영화)다. 지역에 있는 불우한 이웃들에게, 무엇인가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시작한 모임이다. 그렇게 2년 남짓한 시간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봉사활동이었다.

 

눈 오는 날 손을 '호호' 불며 연탄배달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눈까지 날린다. 그래도 얼굴과 손, 옷에 검은 칠을 해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연탄배달을 한다. 매년 겨울마다 음성지역의 독거노인 및, 기초생활 수급자들을 위한 연탄배달이다. 2008년에는 2000장을, 그리고 지난해 연말에는 3000장을 준비했다. 회원들은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른다. 남을 위해 자신이 봉사를 한다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다.          

 

2008년 11월 22일 부천 삼정 정신 장애 시설 주말 프로그램 참여

2008년 12월 13일 음성군 독거노인 연탄 2000장 전달

2009년 2월 20일 ~ 23일 필리핀 바세코 지역 학용품 전달

2009년 3월 5일 샘물 노인 복지 센터 온천 나들이

2009년 6월 17일 ~22일 몽골 에든솜 지역 학용품 및 의류 전달

2009년 9월 19일 음성군 독거노인 및 한 부모 가정에 쌀 60포 전달

2009년 12월 29일 음성군 연탄 3000장 전달

 

회원이라고 해보아야 고작 25명 정도다. 그 중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회원은 불과 10여 명 안팎이다. 하지만 그 인원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 봉사야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행동이 앞서야 할 수 있다.

 

2010년에는 더 많은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3월에는 네팔로 날아가 그곳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고, 명절에는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 쌀을 사들고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이미용 봉사도 하고 방문요망 대상 노인들과 함께 온천을 다녀 올 계획이라고 한다.

 

▲ 몽골 봉사 몽골 에든솜 지역을 찾아 학용품 및 의류를 전달하는 회원들과 몽골 주민

▲ 필리핀 봉사 2009년 2월 20일 ~ 23일 필리핀 바세코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누어주는 봉사회원

 

이 모임을 사영화 회장과 함께 처음으로 주도했던 오승하(43) 사무처장은 음성군 금왕읍에 70평 규모의 노인복지센터를 열었다. 교육원을 겸하고 있는 이 노인복지센터는 오승하 개인이 자비를 들여서 세운 것이기에 더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요양원까지 세울 계획입니다'라는 오승하를 만나보았다. 

  

밀알봉사회 오승하 사무처장 대담

 

- 처음으로 이런 봉사회를 조직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버님께서 치매에 걸리셨어요.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음성에 있는 극동대학교 사회복자학과를 뒤 늦은 나이에 들어갔죠. 거기서 같은 만학도이신 사영화 회장님을 뵙고, 무엇인가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보자고 시작을 했어요."

 

- 현재 회원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 회원은 25명 정도가 되고요. 처음에는 만학도인 회장님과 제가 함께 하고, 학생들이 4명 정도 참여를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은 지난해부터 취업을 나가고, 지금은 저희와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이 함께 봉사를 하고 있어요."

 

- 학교를 졸업하시고 나면 봉사회의 유지가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희들 욕심에는 후배들이 이 봉사회를 좀 지속적으로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관심들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회원들을 일반회원으로 모집을 했어요. 저희가 졸업을 하고나면 학교와 관계없이 계속하려고요."

 

- 그동안 봉사를 하시면서 보람된 일이 무엇이었나요?

"지난해에 필리핀과 몽골을 가서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옷가지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때 아이들의 그 초롱초롱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즐거운 하는 표정을 보고 단단히 다짐을 했죠. 앞으로도 봉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요. 심지어는 받아든 학용품을 뺏기기라도 할까봐,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나기도 했고요."

 

- 힘든 점도 있었을 텐데

"많은 분들이 국내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하세요. 아직은 저희들이 많은 일을 해보지 않아서 관공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회원들이 상처를 많이 받아요. 그래도 저희들은 생각을 해서 힘들게 찾아갔는데, '빨리 주고 사진이나 찍고 가라'는 식으로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연탄 봉사를 할 때도 '차라리 돈으로 주면 안되겠느냐'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럴 때는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요. 더구나 명단을 받아서 가보면 연탄이 몇 곳에서 받은 연탄이 천장 가까이 쌓여있는 집들도 있어요.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배부가 되어서 그렇다고 하네요. 심지어는 그것을 팔기까지 한데요. 올해부터는 저희가 직접 발로 찾아다니면서 정말 필요한 분들에게 드리려고요."

 

▲ 연탄배달 연탄배달을 하는 오승하 밀알봉사회사무처장(앞). 앞으로도 더 많은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 노인복지센터를 개설하셨다는데?

"예, 아버지가 치매이시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없을까하고요. 그래서 이번에 노인복지센터를 2층, 70평 규모로 세웠고요. 앞으로 요양소를 지으려고 땅을 준비했어요. 그거서 이익금이 나오면 그것으로 또 봉사를 하고 싶어서요."

 

- 앞으로의 계획은?

"봉사를 열심히 해야죠. 그동안 해온 봉사는 저희들이 아무것도 몰라, 봉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올해부터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듯함을 나누어주는, 그런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정작 손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보고, 그분들과 함께 마음을 따듯한 작은 마음을 나누는 그런 봉사모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6)


벌써 두어 달이 지났나 보다. 이천시 율면에 있는 어재연장군 생가를 답사하기 위해 가보니, 한창 공사 중이었다. 안내판에 2009년 5월 29일부터 11월 25일까지 지붕보수를 한다고 적혀 있다. 복잡한 공사 중인 집을 촬영할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다. 12월 6일이니 공사를 마쳤을 것 같아, 다시 이천시 율면 산성리 74번지 중요민속자료 제127호인 생가로 향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답게, 걷는 길이 쉽지가 않다. 어재연장군 생가가 보이는 소롯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지붕 위에 파랑색이 보인다. 공사기간이 10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공사는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공사 중인 어재연장군 생가, 멀리서 온 분들의 불평

 

어재연 장군 생가를 들어가니 멀리서 왔다고 하는 분들이 안을 둘러보고 계시다. 이분들도 나처럼 황당하다고 한다. "공기를 적었으면 책임지고 공사를 마쳐주어야지, 무엇하러 안내판에 공사기간을 적어요. 의미도 없는 기간을"이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렇게 어지럽게 널려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제대로 촬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것인가. 여기까지 두 번이나 찾아왔는데, 볼썽 사납기는 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할 수 없이 몇 바퀴 집안을 둘러본다.

 

  
▲ 안내판 공사 안내판에는 2009년 11월 25일까지 공사를 한다고 적혀있다.

 

350년 된 안채, 평범함 속 돋보이는 미

 

어재연장군 생가는 초가로 지어진 조선 후기 살림집 형태이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사랑채와 헛간채가 - 자로 자리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방과 광채가 ∣자로 배치가 되어 있다. 사랑채와 광채를 마주 하고 ㄱ 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 가옥구조다.

 

안채는 조선조 현종 1년인 166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350년이나 되었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 마루, 그리고 안방이 일렬로 배치가 되었고, 꺾인 곳에 부엌과 광이 있다. 대청은 방에 비해 꽤 넓게 자리를 잡았다. 대청에는 두 곳 문을 내어 바람을 통하게 하였다. 그런데 건넌방 앞에 있는 문 위에, 세 개의 작은 창이 보인다. 무엇이었을까? 열어보니 다락이다. 이렇게 대청에 작은 다락을 만든 용도가 무엇일까?

 

  
▲ 대청의 창호 대청 뒤편에 난 문과 그 위에 작은 창호

  
▲ 다락 윗부분만 있는 다락. 대청에 있어 많은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윗문이 있는 곳이 돌출이 되어 있다. 밑은 나무로 지줏대를 만들고, 그 위 벽을 돌출된 다락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여름에도 집 뒤쪽에 있으니 시원하게 바람이 소통될 듯하다. 대청에 있고, 습기가 차지 않는다는 점, 바람이 잘 통한다는 점에서 돌출된 작은 다락 용도를 생각해보면, 과일이나 습기에 약한 비싼 천 가지를 보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릴 적 시골 친척집에 갔다가 이런 대청에 붙은 다락에서, 친척할머니께서 과일을 꺼내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 문틀 안채의 안방 뒤. 가로지른 문틀의 나무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다.

 

안채를 돌아보다가 안방 뒤쪽으로 돌아갔다. 안방은 길게 놓여있는데 뒷문이 두 개나 나 있다. 그 뒷문 문틀을 보고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휜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문 밑에 틀인 가로기둥을 삼았다. 흙벽으로 바른 안방 벽에 가로지른 문틀. 그 하나의 여유가 이렇게 사람을 푸근하게 할 줄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다듬고, 자르고, 가꾸기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아마 성형미인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자연 그대로 미인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그래서인지. 괜히 비교도 안되는 것을, 억지로 비교를 해가며 혼자 웃는다.           

 

사랑채와 대문간의 여유

 

어재연장군 생가의 사랑채는 6칸 규모다. 사랑방과 대청 앞뒤에 개방된 툇간이 있다. 그리고 4칸의 헛간이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10칸 규모다. 사랑채 앞에 놓인 대청은 시원하게 만들어졌다. 문도 없고 그대로 개방이 되어 있다. 대문과 연결 된 곳에는 작은 골방이 있다. 방들이 전체적으로 작은 것은, 겨울철 방을 따듯하게 보온하기 위해서이다. 대개 민가의 초가집은 방이 작고 천정이 얕다.

 

  
▲ 사랑채 공사중으로 어수선하다. 대문과 연결된 사랑채의 대청은 문이 없이 개방이 되어있어, 시원하개 보인다.

  
▲ 문간방의 담 문간방 앞에 돌로 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한 가림벽이지만 바람벽의 구실도 함께 한다

 

광채 끝에 마련한 문간방 앞에는 돌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는 가림벽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바람벽이기도 하다. 초가집의 이런 오밀조밀함이 고래 등 같은 기와보다 오히려 정겹다. 그런 돌담 하나를 두었다고 안채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것 하나를 갖고도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의 여유가 어느 정도인가 가늠이 된다.

 

돌로 붙인 담벼락이 투박하다고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 바깥벽 아랫부분은 돌로 담벼락을 만들었다. 기존 벽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절반쯤 올려붙인 것이다. 진흙과 함께 바른 돌들이 그대로 문양이 된다. 높이는 어른 가슴 정도지만, 돌출된 돌 담벼락이 아름답다. 누군가 내가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했더니, 별걸 다 아름답다고 감탄을 한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나 난 이런 작은 것 하나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을 한다.

 

  
▲ 담벼락 돌로 문양을 넣은 담벼락. 기존의 담벼락에 덧붙여 보온의 효과를 높였다.

 

이것이 단지 담벼락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붙인 것일까? 아니다. 이렇게 이중으로 아랫부분을 만들면 그 담벼락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그만큼 찬 겨울에 보온이 된다. 외부의 바람과 맞닿는 곳에 이런 담벼락을 만든 것도, 알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재연장군 생가는 야산 기슭에 북서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바람을 막을 구조물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도 집이 들어서 있지를 않아, 바람에 그대로 노출이 된다. 그런 집의 구조상 이중의 담벼락이 보온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방한의 효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돌담에 초가를 올렸다.

 

어재연 장군은 조선조 말기 무장이다. 순조 23년인 1823년 이 집에서 태어나 고종 8년인 1871년에 고아성보 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때인 1871년,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 4월 15일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 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나가 적과 대치를 하였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수륙양면에서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 맞은편에는, 장군과 형제인 재순 등의 위폐를 모셔놓은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 돌담 돌담 위에 용마름을 틀어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올렸다. 어재연장군 생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이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에서 보는 또 하나의 색다름은 바로 담장이다. 안채 뒤편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밭이 있고, 담장을 둘러놓았다. 이 담장은 돌과 황토를 섞어 만들고, 그 위에 용마름을 엮어 초가를 올렸다. 용마름을 얹은 담장. 지금은 정비가 되지 않아 조금은 지저분하게 보이지만, 공사를 마친 후에는 이 또한 색다른 멋으로 다가올 것이다. 공사를 다 마치고 나면,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겨우겨우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이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소개하는 데는 버겁지만, 그래도 이 초가로 된 고택의 아름다움은 조금은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2, 7)

처음에는 일지도 못하고 쓰는 것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음식도 잘하고 문화도 많이 배웠습니다.

필리핀에 계신 엄마도 전화하면 한국에 있는 딸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딸이 씩씩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2009년 가을에 지날린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결혼이민자 지날린의 글이다. 그저 우리말과 글을 배워 자신의 현 생활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도자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도자기의 고장 여주로 시집을 온 외국인 결혼이민자와 취업을 한 이주노동자, 그리고 그 다문화가정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글을 적은 것을, 도자기에 담아 4개 종교단체를 돌며 전시회를 가질 것이라고 한다.

 

  
여주 이주민문학제에 선보일 도자기. 초벌구이를 한 접시에 글(전기중)과 그림(서종훈)을 그려 넣었다.

  
고우찌 마찌꼬의 충효예라는 글. 어찌보면 우리들보다 더 한국인다운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여주이주민문학제>는 그렇게 준비가 되고 있다. 이주민문학제를 열 그림과 글을 도자기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에, 여주읍에 있는 한 작업실을 찾았다. 여주의 민예총 등에 소속한 문화예술인들이 초벌구이를 한 둥근 접시, 사각 접시 등에 글을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편에는 이미 가마에서 구워진 그릇들이 반짝이는 윤을 내고 있다.

 

여주이주민센터 진재필 사무국장은 '이번 전시가 그동안 우리말과 글을 배운 이주민들이 자신들이 배운 것을 자랑하는 계기를 만들어, 한국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하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주민 각자가 자필로 쓴 종이에는 맞춤법도 틀리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다가도, 이렇게 한자 한자 배워서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숙연해진다.

 

"말은 배워서 바로도 할 수 있지만 글을 배워 써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가진 목적의 하나도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이주민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음에서죠.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런 이주민문학제를 열어, 더 많은 이주민들이 우리말과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난 후 심사를 하여 상을 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협찬을 받아서 일등에게는 자신의 고향을, 부부가 다녀올 수 있는 비행기표를 끊어주려고요"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진재필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갓 구워 낸 도자기를 보고 있다가 문득 마음이 울컥해진다. 하호분교 김도희 학생이 쓴 '우리와는 다르다고'라는 글 때문이다.

 

  
김도희 학생이 쓴 '우리와는 다르다고'라는글은 우리들을 낯뜨겁게 만들었다

 

우리와는 다르다고 무시하지 마요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기가 살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더욱 더 많이 알고 있는걸...

 

어린아이가 우리들보다 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런 간단한 글 하나에 우리들을 질책하는 내용을 보고 낯이 뜨거워진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우리와 같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까? 어찌 보면 '다문화'라는 용어 '이주민'이라는 용어자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속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이주민문학제에 선보일 도자기들. 처벌구이를 한 접시에 글과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필리핀 출신 결혼이민자 비오레타의 글은 우리 어머니들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오레타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우리 남편 수술이 잘되고 빨리 나서 아이들을 봐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제가 회사에 다니고 돈을 벌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도 사주고

남편에게도 맛있는 음식해주고 필리핀 가족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힘들어도 우리 아이들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친정어머니 말씀대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족들 매일매일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친정어머니께서 우리가족이 필리핀에 가는 날까지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파이팅!

- 여주 점동면 당진리에서 희망을 갖고 사는 비오레타

 

필리핀출신 결혼이민자 비오레타의 글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남편이 수술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가보다.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 가진 염원을 글로 적었다. 남편이 수술을 하고 아이들만 돌보아준다고 하면, 자신이 나가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마음. 바로 예전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결혼이민자라고 해서 무엇이 다를까? 언어와 피부색, 외형이 조금 다르고, 음식문화와 생활문화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남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번 여주이주민문학제에서 그러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카미 아야의 소원. 초벌구이를 한 사각접시에 쓴 글

  
우즈벡 출신 이주노동자 우르벡 보졸로프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들과의 교감을 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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