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시 읍내동 159번지에 소재한 온주아문 및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의 뒤로는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문은 동헌의 문을 말하며, 현판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명칭을 붙인 것은 신라 문무왕 3년인 663년에 이 군의 명칭을 온주라 붙인 데서 비롯한 것이다.

 

온주아문의 문루는 이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문은 모두 장대석으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사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 정도의 주형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중건한 아문은 모두 세 칸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누대 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놓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 곳 누대로 오르는 계단 위도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존을 위함이지만, 차라리 관리자를 두고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 온주아문 온주아문에 걸린 현판. 이곳이 신라때 온주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듯하다.

 
▲ 잠긴 문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자물통으로 잠겨있다.

 

원형 복원을 마친 동헌

 

동헌은 아문을 들어서면 뒤편에 서 있다. 현재 이 문화재 지역 안에는 동헌건물과 아문 두 동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동헌의 건물은 조선조에는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일제 때인 1928년부터는 일제의 주재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 후에는 20년 간 온주동 동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이용을 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동헌은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동헌을 바라보면 좌측 한 칸은 돌출된 방을 놓았고, 다음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한 칸의 방을 두었다. 좌측의 한 칸의 방을 빼면 대청 앞으로 낸 툇마루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동안 동헌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93년 4월 예산을 들여 1995년 5월에 원형대로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 보면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어, 온주 동헌의 옛 모습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동헌 원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문과 동헌 두 동만이 남아있다

 
▲ 경고문 동헌의 방문 등에 하얀쪽지가 경고문구다. 여기저기 많이도 보인다.

 
▲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란 문구를 글자를 지워놓아 '들어가십시오'가 되었다.

 

문화재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면, 관리 소홀은?

 

동헌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여기저기 보수를 해야 할 곳들이 보인다. 겨우내 손을 보지 않았는지 동헌 뒤편 배수로의 축대 돌들은 무너져 내리고, 문을 바른 창호지는 누군가 일부러 찢었는지 모두 너덜거린다. 마루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리고 쓴 푯말은 '지'와 '마'를 지워놓아 '들어가 십시오'란 푯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훼손이 된 창호의 밑에 무엇인가가 안팎으로 붙어 있다. 글씨를 보니 건조물 파괴, 창살문, 창호지 훼손 등 문화재를 파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징역 2년 이상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리소홀인 담당자는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까? 물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양식 없이 하는 행동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렇게 경고성 문구를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라는 문구를 적었다면, 관리 소홀도 그와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

 

▲ 무너진 배수로 배수로의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겨우내 한 번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 창호 심하게 찢어져 걸레가 된 창호

▲ 경고 관람객들에게만 경고를 할 것이 아니라, 관리소홀을 한 사람들이 먼저 경고를 받아야 할 판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온전히 관리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문구나 무조건적인 잠그기보다는, 온전히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인원배치가 우선이다. 매번 들어가는 보수비용만 갖고도, 그런 지킴이 한 명 정도의 인원을 쓸 수 있는 예산은 충분하단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7)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385 보안사 대웅전 안에 자리한, 충북 문화재자료 제22호인 보안사 석조여래좌상. 1957년 경에는 노천의 석단에 모시고, 사람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는 했단다. 1997년 현재의 법당을 짓고 그 안에 주존불로 모셔놓았다. 보안사를 찾아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에 금분을 입혀, 원래의 석불로서의 상태가 아니라 조금은 아쉬움이 든다.

 

얼굴에 비해 어깨가 왜소해 보이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턱을 내리는 등 조금은 위축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반가사를 착용한 점 등으로 볼 때 그 시기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신없는 문화재 주변

 

▲ 문화재 앞 문화재 주변에 늘어놓은 소불들이 문화재의 가치를 반감시키지는 않는지

 

석불좌상의 앞으로는 작은 소불들이 놓여있다. 주변에 즐비한 이런 소불들이 막혀있어, 정작 문화재를 찬찬히 훑어보기에는 난감하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정작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찾아갔는데, 이런저런 것들을 늘어놓아 정신이 없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보안사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17cm이다. 금분을 입히지 않았으면 더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금박을 입혀놓아 오히려 문화재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우려가 된다. 광배나 연화대는 없으나 석불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인 보안사 석조여래좌상. 법의를 반가사로 입은 것도 특이하다.

 

약사여래불로 보이는 석불좌상

 

▲ 얼굴 육계와 백호가 뚜렷하다. 얼굴은 둥근편으로 위엄이 있다. 그러나 금박을 두텁게 입히고 그려넣어 본래의 모습은 알기가 어렵다.

▲ 수인 수인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보안사 석불좌상은 미간의 백호가 뚜렷하다. 안면은 칠을 하고 눈썹과 입술 등을 그려 넣어 정확한 모습을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어깨에 닿았고, 코는 큼지막하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크고 둥근 편이며, 훼손이 되지 않았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반가사로 표현을 하였고, 왼쪽 가슴에서 내려진 옷의 주름은 무릎까지 덮고 있다.

 

법의가 끝나는 곳에 양쪽 발바닥이 노출이 되어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위엄을 보이고 있다. 다만 금칠이 너무 두터워 무겁고 탁한 감을 준다. 수인은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고, 왼손을 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손바닥이 이렇게 위로 올려진 것은, 손바닥 위에 물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약병을 든 약사여래불로 추정된다.

 

문화재의 원형보존은 절대적으로 중요해

 

▲ 귀 귀는 길게 느려트려 어깨까지 닿았다. 전체적으로 육중한 느낌을 준다.

▲ 가사 반가사를 입은 모습이 특이하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중한 문화재의 원형보존은 중요하다. 문화재가 어느 시기에 일부 훼손이 되었다고 하면, 철저한 고증을 거쳐 훼손이 된 부분을 보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답사를 다니면서 보면 전혀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상한 형태로 보수를 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보는 문화재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형태는 보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재를 더 가치 없게 만드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보존. 물론 보안사의 석불좌상도 허락을 받고 금분을 입힐 것이겠지만, 이렇게 원형을 바꾸어 놓는다면, 참다운 문화재 보존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소중한 문화재의 주변에 어지럽게 진열한 많은 전시품들이, 오히려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한다면 과감히 법적 제도를 만들어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다. 소중한 보안사의 석불좌상이 오히려 그 가치가 반감이 되기 때문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27)


여주군에는 현재 5일장이 서는 곳이 세 곳이 있다. 여주읍의 하리 5일장과 가남면의 태평리 5일장이다. 또 한 곳은 대신면의 5일장인데, 대신면의 경우에는 5일장이라고 해도, 그 규모가 작아 전국 5일장에는 끼지를 못한다. 현재 가남면 농협 앞쪽으로 서는 5일장을 '태평리장', 혹은 '선비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을 선비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지명 때문이다. 여주군 가서곡면에 속했던 마을인 섬비를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명동, 방아다리, 섬배, 신대동, 구장터를 병합하여, 큰 들이라는 뜻으로 태평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태평1리는 마구실, 방아다리라 부르고, 태평2, 4리는 섬배 또는 선비, 태평3리는 새터라고 불렀다. 이 태평2, 4리에 서는 장이라고 하여 '선비장', 혹은 태평리에 선다고 하여 '태평리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통칭 '가남장'이라고 부른다.

 

1일과 6일에 서는 가남장

 

▲ 가남장 그래도 한번도 장을 쉴 수는 없다. 가남장의 장꾼들은 대목 밑이라고 해도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5일장을 연다고 한다.

 

가남장은 매달 1일과 6일에 선다. 한 달에 6번을 서는 5일장은 1일과 6일, 11일과 16일, 그리고 21일과 26일이 장날이다. 평소 같으면 50명이 넘는 장꾼들이 모여서 길게 장을 이룬다. 하지만 2월 16일 찾아간 가남장은 썰렁하다. 대목 밑에 선 5일장이라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를 않았다. 여기저기 10여개 남짓한 난장이 섰을 뿐이다.

 

가남장에 모이는 장꾼들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물건을 싣고 와, 이곳에서 장사를 한다. 남양주, 양평, 이천, 성남 등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장을 이루고 있는데, 멀리 충북과 강원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5일장이라는 특수성이 거주 지역에 관계없이 모여서 장을 이루기 때문에, 전국 어디서나 모여들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5일장은 장꾼들이 모이지를 않아, 몇 개의 난전이 자리를 펴고 있을 뿐이다.

 

'가남장을 찾는 사람들은 다 선비 같아요'

 

▲ 김광열 가남장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모임인 상우회 김광열회장은 부부가 함께 30년 넘게 가남장에서 화장품을 팔고 있다

 

가남장에선 지역의 특산품인 쌀이나 고구마, 땅콩 등보다 더 유명한 것이 바로 건어물전이다. 아무래도 멀리 가서 구해야하는 건어물이다 보니, 이렇게 찾아드는 5일장의 사람들이 고마울 수도 있겠다. 그래도 5일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장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장사를 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곳은 '상우회'라고 하여, 난전을 하는 상인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침 대목 밑 장인데도 불구하고 상우회 김광열(남, 57세)회장이 화장품 난전을 펴고 있다. 남양주 금곡동에 거주하는 김광열 회장은 안성, 충주, 마석, 문산, 가남장을 돌면서 장사를 한단다. 이곳 가남장에서 장사를 한지가 벌써 30년이 넘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김광열 회장은 5일장을 돌면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한 달 내내 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분이 어떻게 화장품을 파느냐고 물으니, 곁에 서 있는 여자 분이 부인이라는 것이다. 부인 최명숙(52세)씨와 함께 5일장을 다니면서 장사를 한다는 것.

 

"힘들지는 않으세요?"

"힘들죠. 하지만 산다는 것이 어디 편할 것이 있나요. 그래도 이렇게 같이 장사를 하러다니니 저희들은 나은 편이죠"

"전에 비해 장사는 잘 되나요?"

"점점 힘들어요. 대형 할인점이 들어오면서 그쪽으로 손님들을 많이 빼앗기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부인 최명숙씨가 선비장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선비 같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니, 5일장을 다녀보아도 이곳처럼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곳 장을 찾는 분들은 물건 값을 깎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러니 시비가 붙지를 않죠. 딴 곳에 가면 덤을 달라고 아우성인데, 이곳 분들은 주는 대로 받아가요. 그래서 장사를 하는 분들이 항상 더 올려주고는 하죠. 그래서 선비장인가 봐요."

 

찾는 사람도 없이 썰렁한 장을 하루 종일 지킨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시종 웃음을 잃지 않는 부부. 서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5일장을 돌면서도 피곤을 이겨내는 것인지.   

        

봉사를 하는 5일장 사람들

 

▲ 기구 5일장에는 별별 것들이 다 있다. 그래서 5일장은 재미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전국에서 모이는 갖가지 물건을 파는 난전상들이다. 어떻게 '상우회'라는 모임을 만들게 된 것일까?

 

"저희가 이곳에 와서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는 것도, 다 물건을 사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매번 장에 장사를 하러 오시는 분들과 의논을 해서,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해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회원 50명이 넘는 상우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단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이 아니고, 봉사를 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한다.

 

"일 년에 두 번씩 봉사를 하죠. 6월 30일과 12월 30일, 두 차례 쌀을 여섯 가마쯤 어려운 분들에게 전해드리죠. 주로 가남면 지역에 사시는 어려운 분들에게요."

 

그래서인가 이 5일장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가족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건 값을 흥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훈훈한 정이 있는 곳. 가남 5일장에는 마주만보아도 절로 웃음이 나는 부부가 있어 즐겁다. 5일장의 이야기가 즐거운 것도 이렇게 정이 넘치기 때문이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17)


2월 5일, 며칠 안남은 설 대목을 준비하고 있는 여주 5일장.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장을 찾았다. 아무래도 설이 10여 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꼭 장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저것 알아보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 양평, 이천 등 가까운 곳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처럼 활기를 띠는 여주장이다.

 

여주 전통 5일장은 경기도에서는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장으로 손꼽힌다. 5일장 날이 되면 장 주변의 주차장은 물론, 인도에까지 난전이 서는 바람에 통행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5일장의 북적이는 재미 중의 하나이다. 고함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심지어는 작은 스피커까지 들고 나온 판이니 소음도 만만치가 않지만, 사람들은 그런 북적임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하다.

 

5일장의 아름다운 부부장꾼

 

▲ 족발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족발이 군침을 돌게한다. 두 사람의 정성이 있어서 인지, 더욱 맛이 좋다고 한다.
 

 

여주 5일장 한 복판에 족발을 파는 난전이 있다. 두 사람의 남녀가 열심히 족발을 썰고, 그릇에 담아낸다. 벌써 여주 장에서만 3년 넘게 한 자리에서 족발을 팔고 있는 오재현(남, 46세), 방영심(여, 42세) 부부. 여주 5일장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이들 부부의 금슬을 늘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죠, 누구나 다 그런 실패 한 번쯤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대로 무너질 수가 없어서, 족발 장사를 시작을 한 것이 벌써 6년째네요. 여주 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은 올해로 3년이 되었고요."

 

말을 하면서도 연신 족발 썰기를 멈추지 않는 오재현씨.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부부가 함께 장에 나와 장사를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여주 장을 돌아다니면서 몇 번을 보았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늘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대한다.

 

"5일장을 돌면서 보면 지난해보다 많이 힘들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져요. 하지만 열심히 하다가보면, 그 또한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으니까요. 5일장을 돌면서 하루 종일 서 있다는 것이 여간 힘이 들지가 않아요. 그래서 4일은 장을 돌고, 하루는 쉬고 있죠. 그렇지 않으면 체력이 달려서 할 수가 없어요."

 

네 곳의 장을 돌고, 하루는 쉬어

 

▲ 썰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연신 족발을 썰고 있다.

▲ 족발 여주장이 다니는 5일장 중에서 단골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오재현씨 부부는 여주 5일장을 비롯해, 충북 단양의 매포장, 충남 천안의 성환장, 그리고 충북 괴산 등 4곳의 5일 장에서 장사를 한단다. 현재 충주에 거주하면서 이 네 곳을 4일 동안 돌고, 하루를 쉬어 다시 장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하루에 70 ~ 80개 정도를 파는데, 하루 종일 쉴 수가 없어요. 다음 장은 대목장이라 아무래도 수량을 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즈음은 그래도 단골이 많이 생겨서 많이 좋아진 편이죠"

 

주변의 상인들은 이들 두 사람의 부부가 정말 열심히 산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부부가 다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저는 네 곳을 모두 돌지는 못해요. 집안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주장과 괴산장만 돌고, 매포와 성환은 장이 좀 작다보니 아이들 아빠가 혼자 다녀요."

 

그렇게 혼자 남편을 장으로 보내고 나면, 늘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한다. 남편이 썰어 놓은 족발을 포장을 하면서 방영심씨가 하는 말이다. 힘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같이 다니니 오히려 즐겁다고 웃음을 짓는다. 언제나 손님이 오면 웃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5일장을 함께 나오는 장꾼 중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

 

5일장의 장꾼들은 끈끈한 정이 있어

 

▲ 대담 장사를 마칠 시간이 오후 7시. 오재현, 방영심 부부와 대담을 하는 기자.

 

"5일장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끼리 모이고 있어요. 이렇게 난전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과 만나면 오히려 점포를 지니고 계신 분들보다 더 정이 깊어요. 아무래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 더욱 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주변의 난전을 하는 상인들과 속 깊은 우대관계를 갖고 있다는 오재현씨. 그래서 장에 나온다는 것이 단지 물건을 팔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장사를 하는 분들이 보이지를 않으면, 내색은 하지 않아도 걱정이 많이 된다고 한다.

 

"저 부부를 보면 참 부지런도 하지만, 어째 저렇게 금슬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년 넘게 보아왔지만 힘이 들기도 할 텐데, 한 번도 낯을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우리 5일장의 보배죠."

 

장마다 나온다는 한 할머니의 칭찬이다. 앞으로 이 부부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처럼 여주 5일장에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역시 웃으면서 산다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고, 주변이 모든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 같다. 오후 7시가 넘어 어둠이 깔린 장터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아름디운 부부.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6)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선덕여왕' 중에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 김유신이 연을 날려 비담의 추종세력을 약화시키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다. 우리 연은 단순히 연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의 신호나 정월 대보름에 '액연(厄鳶)'이라 하여, 일 년의 액막이 등으로도 사용을 했다.

 

연장(鳶匠)은 연을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고 전통연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알려주고, 즐거움을 주기위해서 시작한 연 만들기. 지금은 그것으로 인해 노후를 즐겁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집안 가득 연으로 도배를 했다는 신건수(남, 69세, 여주군 대신면 천남1리 189)옹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을 만드는 사람'으로 주변에 소문이 나 있다. 왜 그렇게 연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일까?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배운 연 만들기

 

신건수옹이 연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3년도 교사로 재직 시였다고 한다. 벌써 30년 가까이 연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우리 민속 연을 만드는 것을 지도하기 위해, 연 만드는 것을 배웠어요. 그런데 연을 만들다가 보니 이것이 노후 취미생활을 하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연 종이를 풀로 붙인다. 그동안 전시회도 몇 회를 했고, 국내 연날리기 대회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여러 번 초청을 받아서 나갔다. 그렇게 연을 만들면서 집안은 온통 연으로 뒤덮이고, 늘 어떤 연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연은 하늘을 나는 것이잖아요. 연이 하늘에 오르면 아름답죠. 그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 대회를 가보세요. 수많은 연들이 하늘을 나는 것이 장관이죠."

 

▲ 신건수 하루에 10여 시간씩 연을 만들고 있다는 신건수옹.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에 대한 인식 바뀌어야

 

신건수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전통 연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을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 하면, 높이 날리기나 연실 끊기 정도로만 알아요. 하지만 연은 단순히 놀이문화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제대회에 나가보면 연을 예술로 승화를 시켜, 정말 아름다운 연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제는 연을 과학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기도 하고요."

 

연에 대한 찬사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30년 세월동안 연을 만들면서, 많은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하루도 연을 접하지 않고는 삶의 의미를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지도하고 노후에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시작한 연 만들기가, 이제는 삶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전통문화로의 연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더 많은 연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연의 연구는 삼국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죠. 다양한 연을 만들어 연날리기 대회를 하고는 있지만, 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 공기와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등 새로운 연구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건수옹의 연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연을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할까를 연구한다. 아침이면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자리한 민가마을로 나가, 찾아오는 아이들과 함께 연날리기를 한다.

 

▲ 연 여주의 명품쌀 포대로 만든 연

 
▲ 연종이 접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연종이를 접고 있다. 이렇게 연에 대해 푹 빠져 지낸다고 한다.

 

친환경적인 창작연 연구에 몰두

 

요즈음 신건수옹은 새로운 창작연 연구를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다. 하루에 10여 시간씩을 연과 씨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연종이를 접는 옆에 삼각형으로 꾸민 연이 보인다. 얼핏 보면 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하다.

 

"이것이 입체연입니다. 제가 연구를 한 것인데 3면연이라고 하여, 세계 최초로 이런 연을 만들었습니다. 연을 만들면서도 자연과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둥글게 3면으로 된 연에는 호랑나비가 그려져 있고 '자연사랑 나라사랑' '자연보호 연 시리즈1'이란 글자가 보인다. 신건수옹은 연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연을 만들고 나면 어떻게 아름답게 그 연을 하늘로 띄울 것인가? 그리고 어떤 연이 더 하늘을 아름답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우리 연을 대표하는 것은 방패연입니다. 방패연은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연으로, 연 가운데 있는 반구멍이 이 연의 생명입니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면이죠. 세계 연대회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방패연을 보고 의아해 합니다. 연은 바람을 이용해 하늘로 오르는 것인데, 방패연의 가운데 있는 반구멍을 보고 바람이 빠져 어떻게 뜨느냐는 것이죠. 일본사람들은 불가사의라고 이야기를 하고, 중국 사람들은 연이 절대로 뜨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 삼각연 삼면의 창작연. 세계 최초로 신건수옹이 창작해 만들어 낸 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방패연은 그 반구멍이 있어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고, 연체를 휘어지게 해 안정적으로 하늘을 날게 돼 마음대로 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우수한 우리민족의 연 문화에 걸맞은, 또 다른 연을 창작해 내는 것이 신건수옹의 사명이라고 한다. 우리 것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이 이 시대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신건수옹. 그 마음과 같이, 아름다운 창작연이 하늘을 수놓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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